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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8화 (13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8화

* * *

휘익-!

허수아비에 닿기 바로 직전.

종이 한 장 들어갈 만큼의 아슬아슬한 틈만을 남겨 둔 채 목검이 우뚝 멈췄다.

화아아악-.

짚 가루가 휘날렸다. 파공음과 함께 주변에 한차례 돌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바람이 가라앉았음에도 허수아비는 조금의 흠집조차 나지 않았다.

검기를 뿜어내는 단계에는 이르렀으나, 아직도 칼끝에 모으지 못하고 매번 흩어졌다.

이클리스는 무표정한 얼굴로 쳐들었던 검을 내렸다.

무미건조한 회갈빛의 눈동자에 얼핏 실망이 스쳤다.

- 요즘 들어 잡생각이 무척 많아졌구나.

- 수련하러 온 놈이 매번 무슨 생각이 그리 많은 게야.

어제 낮, 스승이신 스펜 경이 도통 집중을 못 하는 머리를 목검으로 후려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클리스는 고개를 크게 뒤흔들며 내린 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리고 검의 끝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집중은 오래가지 못했다.

검 끝에 검기 대신 어른거리는 누군가의 얼굴 때문이었다.

- 이클리스.

그의 하나뿐인 주인은 웃음이 없고, 냉정하고 차가웠다. 그러면서도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설사 자신이 직접 사 온 노예에게조차 마음을 내주지 않았다.

이클리스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어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비싼 값을 치르고 자신을 사와 돌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매번 걱정하였다며 읊조리는 그 어여쁜 입과는 달리, 자신을 응시하는 눈은 단 한 번도 온기를 띤 적이 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그 여자를 내심 기다리게 되던 이유를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쓸모를 입증하지 않으면 곧바로 경매장으로 돌려보내겠다며 자신을 사들일 때까지만 해도, 이클리스는 그녀를 증오했다.

기실 그는, 그녀뿐만이 아닌 모든 제국인들을 증오했다.

‘멍청한 계집.’

1억 골드씩이나 낭비하여 자신을 사들인 멍청한 여자를 철저하게 이용해 주겠다고 다짐했었다.

지금은 고분고분 발을 핥는 개처럼 굴고 있지만, 기회가 오면 그 가녀린 목을 꺾고 빌어먹을 공작저와 잉카 제국을 떠나겠노라고.

하지만 그 다짐은 여자의 미소에 매번 속절없이 무너졌다.

차갑고 매정한 주인은 가끔 미소를 지을 때면, 전설 속에 나오는 마수들의 여왕처럼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종종 사르륵 눈을 접고 사근사근 제게 속삭일 때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곳에 안주하고 싶어졌다.

그를 경계하기 위하여 공작저를 벗어나 외부에서 검을 배우기 시작했음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 너는 내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야.

‘중요한 사람.’

그것이 무슨 뜻인가.

그녀에게는 자신이 꼭 필요하다는 소리였다.

패전국 노예.

제 신분을 알면 침을 뱉는 다른 제국인들과 달리, 그녀는 매번 더없이 간절하게 자신을 붙들었다.

- 너는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이클리스.

귓가에 울려 퍼지던 페넬로페의 말이 실제와는 조금 달라졌다.

그러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난 주인님께 소중한 사람이야.’

회갈색 동공이 혼몽하게 풀렸다. 검 끝이 흔들렸다.

‘어차피 제국에서 탈출해 봤자, 돌아갈 곳도 없지 않은가.’

주인의 말이 맞았다.

이제 고국은 완전히 멸망해서 지도상에서 깔끔하게 사라졌다.

얼마 전에 만난 델만인들은 원통해 했으나, 의외로 대부분이 현실에 수긍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척박한 델만의 땅과는 달리, 이곳은 자원이 풍부하고 문명도 훨씬 발달되어 있었다.

게다가 노예들의 처우가 엄청나게 나쁜 것도 아니었다.

평민들보단 적은 수준이지만, 일정한 삯을 내어 준다.

몇몇 이들은 가뭄 때문에 굶어 죽어 가던 델만에 비하면 이곳은 천국 같다고 지껄이기도 했다.

이클리스는 그런 그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 비하면 자신의 생활은 입밖에 꺼낼 수조차 없을 만큼 윤택했기에.

‘……주인님은 내가 해 달라는 것,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줬지.’

처우, 굶주림, 배움. 하다못해 노예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자유 시간까지도.

미친 생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점점 이 들끓는 감정을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언제부터였을까.

계속해서 경계하던 그녀의 알 수 없는 속셈이 이제는 기껍게 느껴졌다.

자신을 이용해도 괜찮았다. 그것은 다른 말로, 그만큼 자신을 곁에 두기를 원한다는 소리였으니까.

긍지도 없이 제국인의 앞에 무릎 꿇은 채 개처럼 빌어도 좋았다.

답례를 줄 돈이 없어 꽃줄기를 꺾어 화관을 만들어 바치며, 제발 받아 달라고 비참하게 울어도 좋았다.

‘……곁에만 있을 수 있으면, 뭐든.’

목검 위, 허공에 어른거리는 진달래 빛 머리칼을 바라보며 풀려 있던 그의 눈이 형형하게 번뜩이던 찰나였다.

“안녕.”

나지막한 목소리가 등 뒤에 울려 퍼졌다.

휘익-.

이클리스는 몸을 돌리며 반사적으로 검을 겨누려다, 가까스로 그것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전과는 달랐다.

그 여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머리가 아닌 몸이 먼저 알아차렸다. 마치 본능처럼.

환영이 아닌, 실체로 나타난 진달래 빛 머리칼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주인님.”

이클리스는 헐떡이며 거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 * *

나는 이클리스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또 목검에 처맞을 뻔한 경험을 하기 싫어서 훌쩍 떨어진 곳에 서서 부른 것이다.

그런데 그가 느닷없이 바닥에 목검을 집어 던지며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어깨를 들썩이는 그와 목검을 번갈아 보던 나는 이내 어색하게 웃으며 그쪽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늘은 검술 수업에 가지 않았더구나.”

내가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게 좀 놀라운지, 이클리스의 눈이 약간 커졌다.

“가문의 종기사들은 외부 합숙 훈련을 갔다던데, 혼자 남아 있으면 외롭지 않겠니.”

싱긋 웃으며 찾아온 이유를 덧붙이자, 그가 ‘아.’ 하고 짧게 침음을 냈다.

“스승님이 일이 있으셔서…… 며칠간은 오후 늦게 가기로 했어요, 주인님.”

“그러니?”

사실 그가 가든 안 가든 그런 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들고 온 커다란 꾸러미를 그에게 내밀었다.

“자.”

부피가 커서 그렇지 생각만큼 무겁지 않았다.

지난번 옷가지들은 하인들을 통해 전해서 내심 마음에 걸렸는데, 이번엔 직접 줄 수 있어 다행이었다.

“이게…… 뭐예요?”

“연고와 약초들을 좀 챙겼어.”

그가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너무 생색내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친 사람들을 치료할 약이 없어서 산을 뒤져야 했다고 하지 않았니.”

“…….”

“효과가 좋은 것들로만 챙겼으니, 가지고 가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 줘.”

그에게 약을 살 돈을 줄 수는 없었다.

패전국 노예들이 모여서 어떤 작당을 꾸밀지도 모르기 때문에.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전부였다.

“주인님.”

기뻐할 줄 알았는데 이클리스의 표정이 영 이상했다.

그는 마치 다 시들고 뭉개진 화관을 내밀 때처럼 미묘하게 흐트러진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에 알 수 없는 격정이 휘몰아쳤다.

“……자존심 상해서, 받기 싫어?”

나는 덜컥 겁이 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클리스는 빠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럼 뭐 해. 어서 받지 않고.”

내 종용에 그는 이내 천천히 팔을 들었다.

내가 내민 자루를 향해 내뻗는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감동받은 건가?’

워낙에 표정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어서, 나는 부러 자루를 넘기는 척하며 손가락을 스치듯 잡았다 놓았다.

곧바로 눈앞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1200만 골드 / 명성 200]

‘미친, 1200만?!’

아무리 곧 벼락부자가 될 나였지만,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호감도 확인 가격에 속이 벌벌 떨렸다.

나는 이를 꽉 깨물고 힘겹게 [1200만 골드]를 선택했다.

〈SYSTEM〉 [12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 46,000,000 골드)

[호감도 96%]

그러나 곧바로 그의 머리 위에 뜨는 수치를 보니 아깝다는 생각은 저 멀리 사라졌다.

‘4%……!’

희열이 찾아왔다.

이제 정말 곧이었다. 곧.

나는 이제 환희로 떨리는 속을 티 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생각했다.

‘그런데…… 엔딩이 얼마 안 남아서 그런지 예전만큼 확 오르지는 않네.’

이전에는 무언가를 건네면 5%는 기본으로 올랐는데, 확실히 최근 들면서 그런 것이 없어졌다.

현저히 줄어든 상승 폭에 나는 조금 아쉬운 입맛을 다셨다.

그때였다.

“……정말로 감사해요, 주인님.”

이클리스가 얌전히 눈을 내리깔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호감도 확인하기]로 바뀐 글씨와 검붉은색 게이지 바가 보였다.

여전히 불길한 색이었지만, 고지가 눈앞이어서일까.

예전만큼 그것이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엔딩은 100% 외에 하나의 조건이 더 있었다.

“혹시…….”

나는 그의 머리 위에서 시선을 떼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를 마주 보았다.

“그거 말고 나한테 할 말은 더 없니?”

“예? 무슨…….”

“아, 아니야. 아무것도.”

슬쩍 떠보던 나는 단번에 어리둥절해지는 그의 기색에 곧장 고개를 저었다.

‘아직 100%를 채운 건 아니니까.’

초조해지는 속을 애써 내리누르며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날씨가 참 좋구나. 오늘은 어디 같이 놀러나 갈까?”

“놀러…… 요?”

“매일 훈련만 하면 지겹잖니.”

땡땡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모범생처럼 휘둥그레지는 눈동자에 저절로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지긋지긋한 생활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기쁨에 심취하여, 숨소리조차 사라진 이클리스를 제대로 돌아보지도 못한 순간이었다.

“페넬로페 아가씨!”

멀찍이서 누군가 나를 불렀다.

몸을 돌리자 연무장의 입구 쪽에서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집사?”

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집사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급한 일이라도 있는지 그는 한달음에 나와 이클리스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아가씨, 저택으로 돌아오셔야 할 듯합니다.”

그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무슨 일인데?”

“잠시 귀를 좀…….”

이클리스가 신경 쓰이는지 그에게 흘긋 시선을 던진 집사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집사 쪽으로 완전히 몸을 돌리며 그에게 귀를 대주었다.

“황태자 전하의 보좌관이 저택에 방문하셨습니다.”

“……뭐?”

갑작스러운 소식에 나는 당황했다.

그러나 곧 황태자가 아랫사람을 보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솔레일 관련해서 뭔가 남았나 보네.’

게임이지만, 국가의 안보가 달린 황족의 명령인지라 지체할 수 없었다.

“얼른 가 보지.”

나는 곧바로 집사를 따라나섰다.

아니, 그러려던 찰나였다.

꽈악- 불현듯 치맛자락이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다.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리자,

“……저를 찾아와 주신 거잖아요, 주인님.”

엉망으로 일그러진 이클리스의 얼굴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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