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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39화 (13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39화

나는 놀라 숨을 멈췄다.

밀랍 인형이나 다름없는 얼굴이라 생각해 오던 이클리스가, 이토록이나 선명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 보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은 얼핏 보면 무척 화가 난 것 같았다.

느릿하게 깜빡이는 검붉은색 호감도 게이지 바에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와 외출을 하자고 하셨잖아요.”

“……이클리스.”

“주인님은 왜 매번…….”

무어라 호소하던 이클리스가 불현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의 턱이 단단해졌다. 그러나 끝까지 손에 쥔 내 치맛자락을 놓지는 않았다.

놓기는커녕, 꽉 쥔 주먹에 푸른 핏줄이 잔뜩 솟아 있었다.

‘……어떻게 달래 줘야 하지?’

난감한 눈으로 그의 머리 위와 나를 붙들고 있는 손을 번갈아 바라보던 순간이었다.

“어허, 자네 지금 뭐 하는 겐가?”

문득 집사가 엄한 목소리로 호통치듯 소리쳤다.

“아가씨가 자네 친구라도 되는 줄 아는가?”

“…….”

“아랫사람이 되어서 모시는 주인님을 보필하진 못할망정 바쁜 발걸음을 막아서다니! 사람 참, 그렇게 안 봤는데 큰일 날이로군.”

“집사, 그만해.”

나는 황급히 집사를 부르며 제지했다.

그러나 집사는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무시무시한 얼굴로 이클리스를 노려보았다.

‘아니야. 그거 아니야!’

나는 처음 보는 노집사의 카리스마에 놀람과 동시에 불안에 가득 차 이클리스를 연신 흘끔거렸다.

그는 집사의 타박에도 꿋꿋이 버티는가 싶더니, 이내 스르륵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아래로 툭 고개를 떨구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나는 얼른 멀어지는 그의 손을 붙들었다.

“이클리스.”

접촉에 곧바로 뜨는 [호감도 확인하기] 창에 잠시 갈등이 일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황궁에서 사람이 왔어.”

이미 집사의 말을 엿듣고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한 상냥한 목소리를 내며 얼렀다.

그러나 한번 아래로 떨어진 고개가 다시 들리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의 손을 부여잡은 손에 힘을 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금방 다녀올 테니 너무 상심해 하지 말고 훈련하고 있으렴.”

“…….”

“갔다 와서 놀러 가면 되잖아. 응?”

끝까지 대답이 없던 그는, 내가 눈까지 접어 가며 미소 짓자 그제야 마지못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내게 잡힌 그의 손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서 쉽게 손을 놓을 수 없었다.

힘겹게 올려 둔 호감도가 혹여라도 떨어졌을까 봐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아가씨.”

채근하는 집사의 목소리에, 나는 그 충동을 참고 손을 놓았다.

이클리스는 그때까지도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당연히 잘 다녀오라는 배웅도, 인사도 듣지 못했다.

그러나 몸을 돌려 연무장을 빠져나가는 내내, 뒤통수에 끈덕진 시선이 따라붙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을 다행이라고 안도하는 내가 좀 독하게 느껴졌다.

저택으로 가는 숲길을 걸어가던 중이었다.

내 뒤에 물러서 걷던 집사에게서 연신 머뭇거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가씨.”

“할 말 있으면 해.”

그가 마침내 입술을 달싹이다 소리를 내었을 때, 나는 곧장 답했다.

“아가씨, 아랫사람을 아끼시는 마음은 좋지만…….”

“…….”

“너무 방자하게 기어오르도록 두지는 마십시오. 그는 여러 차례 선을 넘고 있습니다. 어리광을 모두 받아 주다가는 끝도 없을 겁니다, 아가씨.”

집사가 내뱉는 조심스러운 음성은, 나를 무시하며 제지하던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한 귀족가를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주인을 모시는 종으로서의 진심 어린 조언과 충언이 느껴졌다.

“생각해 줘서 고마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감사를 전했다.

그의 말은 모두 일리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앞으로 내 허락 없이 그 애 앞에서 먼저 나서지 마.”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춰 그를 돌아보았다.

“명령이야.”

내 차가운 시선에 집사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설령 그가 방자하게 기어오르더라도, 나는 그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96%.’

몰빵 남주 놈의 오만방자한 태도로 기분 나빠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상태였다.

* * *

저택에 도착해 곧장 응접실로 가니, 정말로 낯익은 이가 앉아 있었다.

황태자의 보좌관은 안으로 들어서는 나를 보고 벌떡 일어나 싹싹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오랜만이야.”

일전의 사냥 대회에서의 암살로 황태자가 혼수상태에 빠졌을 무렵, 매일같이 황태자 궁을 들락거린 탓에 안면이 있었다.

“일단 자리에 앉지.”

마주 보고 소파에 앉자, 얼마 안 가 에밀리가 다과를 내왔다.

“오늘 이렇게 공녀님을 찾아뵌 이유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들이켠 세드릭이 바로 포문을 열었다.

“잠깐. 집사, 에밀리.”

나는 한 손을 들어 잠시 그를 막아서고 말했다.

“두 사람은 그만 나가 봐.”

내가 몰래 나간 일을 공작저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런데 보좌관의 입에서 ‘솔레일’과 ‘레일라 신국’ 관련 사항들이 곧바로 튀어나오면 낭패였다.

그러나 세드릭은 내 명령에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아, 아니요! 그럴 필요까지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같이 계시면 더 좋지요.”

“……뭐? 무슨 일로 온 건데?”

나는 의아해진 채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세드릭이 볼을 긁적이며 애매하게 웃었다.

“그게…… 며칠 후 황태자 전하의 탄생일이 아닙니까?”

“탄생일?”

완전히 처음 듣는 사람처럼 되묻던 나는 아차 싶었다.

이곳은 직계 황족의 탄신일이 곧 공휴일이나 다름없는 세계였다.

“……그렇지.”

황태자의 생일이 언젠지 따위 전혀 몰랐지만, 고개를 주억거리며 아는 체를 했다.

다행히 세드릭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게 왜?”

“전하께서 공녀님께 탄신 연회 때 입으실 드레스를 선물로 보내셨습니다.”

“……뭐?”

나는 이번에야말로 생소한 단어를 듣는 사람처럼 되물었다.

“드…… 레스?”

“예! 한번 보시겠습니까?”

“아니, 괜…….”

됐다고 할 틈도 없이 세드릭은 잽싸게 데리고 온 하인에게 눈짓했다.

다시 보니 하인 두 명이 각기 다른 크기의 상자를 들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이 꽤 큼지막한 상자를 들고 걸어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세드릭은 신중한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보십시오, 공녀님.”

“어머나!”

나보고 보라 하였지만, 탄성은 에밀리 쪽에서 튀어 나왔다.

나가라고 했다고 입이 댓 발 튀어 나왔던 그녀는 어느새 눈을 반짝이며 테이블 쪽으로 엎어질 듯 상체를 숙인 상태였다.

“세상에, 너무 아름다워요! 드레스에서 빛이 나고 있어요. 마, 마법인가요?”

“에헴, 그런 인위적인 것은 식상하고 티가 나기 마련이지요. 이것은 나이트로 쿤 엘프의 날개들을 재단해서 만든 것입니다.”

“허억! 그, 검지 요정이라 불리는 엘프들 아닌가요? 세상에, 그렇게 작은 날개들로 드레스 하나를 만들다니!”

묘하게 자신감에 차 있는 보좌관의 설명에 에밀리는 손뼉을 치며 연달아 감탄을 토했다.

나는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해서 멀뚱멀뚱 상자 안만 내려다보았다.

반으로 곱게 접힌 드레스는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볼수록 희미하게 푸른빛이 일렁거리더니, 점점 검푸른 색이 천 자락 전체에 찬찬히 번져 나갔다.

그 모습이 마치, 고요히 파도치는 밤바다를 연상케 했다.

‘신기하긴 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새삼스러운 눈으로 드레스를 구경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알았는지, 세드릭이 하인을 시켜 드레스를 펼쳐들게 했다.

“세상에!”

에밀리가 또 한 번 기염을 토했다.

심플한 가슴 위쪽과는 달리, 아래로 갈수록 밤하늘에 수놓아진 별과 은하처럼 은색과 금색 반짝이들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막눈인 나 또한 놀랄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전혀 과함 없이 고급스러운 형상이었다.

“피이니산 블루 다이아몬드를 갈아 붙인 것입니다.”

“피이니산……!”

은색 반짝이들을 가리키며 설명하는 세드릭의 말에 이번에는 집사가 ‘허억!’ 하고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이 자수들은 모두 순금입니다. 사실 디자이너는 다이아몬드만으로 드레스를 완성시켰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공녀님이 황금을 무.척.이.나. 좋아하신다고 하여 특별히 황궁 소유 광산의 순금을 추가하였답니다.”

세드릭이 당당한 어투로 은색 반짝이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금색의 가느다란 자수를 가리켰다.

“뭐, 예쁘긴 하지만 그 정도까진…….”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부정했다.

누가 보면 꼭 황금에 미친 사람 같지 않은가.

‘물론 맞지만.’

심드렁해하는 선물의 당사자를 대신해서, 에밀리와 집사는 번갈아 가며 난리를 부렸다.

“세상에나, 세상에나!”

“황궁 소유의 광산……!”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세드릭은 남은 하인에게 손짓했다.

하인이 드레스를 담은 상자보다 조금 더 작은 상자를 가져왔다.

세드릭은 지체 없이 상자 뚜껑을 열었다.

“이, 이것은……!”

드러난 내용물에 집사가 눈을 부릅떴다.

“포피뉴 다이아몬드와 붉은 귀 거북 조개의 진주입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붉은빛이 도는 500원짜리 크기만 한 진주였다.

그리고 그것의 주변으로 오색빛깔로 번쩍번쩍 빛나는 다이아몬드 수십 개가 베틀에 놓인 실처럼 배열되어 있었다.

큼지막한 것은 목걸이고, 조금 더 작은 형태는 귀걸이였다.

눈이 멀 만큼 엄청난 빛을 뿜어내는 액세서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다.

딱 봐도 어마어마하게 값져 보이는 보석들에 기가 질려 에밀리도 집사도 모두 아연한 얼굴로 굳어 있었다.

“포피뉴 다이아몬드는 워낙 유명하니 잘 아시겠지요.”

세드릭은 이런 우리의 반응이 무척이나 만족스럽다는 듯 의기양양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물론 이 또한 무척이나 귀하고 힘들게 구한 것이지만, 붉은 귀 거북 조개의 진주는 황비님이 몇 년째 찾아다니신 겁니다. 워낙 전설 속의 존재나 다름없는 보석이니까요.”

“…….”

“황비님이 손에 넣으시기 직전에 가로채라고 어찌나 닦달을…… 아, 아닙니다. 하하하! 어쨌든 고생한 보람이 있습니다! 공녀님께 무척이나 잘 어울리시는 것 같군요.”

그의 모습에서 묘하게 황태자의 얼굴이 엿보이니, 참 이상한 노릇이었다.

영 떨떠름한 내 기색을 알아차린 걸까.

“공녀님, 혹시…… 마음에 드시지 않는 겁니까?”

세드릭이 한발 늦게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의아함을 한껏 담아 물었다.

“아니, 마음에 들고 안 들고를 떠나…….”

“…….”

“이것들을 내게 왜 주시는 거지? 오히려 탄신일을 맞이하신 전하께서 선물을 받아야지.”

“예, 예?”

영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내 말투에 세드릭은 무척이나 당황했다.

그는 한참을 주저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서 이번 탄신 연회에 전하의 파트너가 돼 주시기로 한 것…… 아니었습니까?”

“뭐, 뭐?!”

답변 대신 돌아오는 물음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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