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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40화 (14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0화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버벅였다.

“내가, 내가 언제?”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진중한 얼굴로 속삭였다.

“공녀님, 잠시만 귀 좀…….”

나는 그의 말에 퍼뜩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를 응시하는 집사와 에밀리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다, 다들 물러서 있어.”

나는 그들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그리고 그들이 소파 근처에서 다섯 걸음 물러난 것을 확인한 후 세드릭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전하께서 공녀님이 ‘내가 언제?’와 같은 부정하는 말을 할 시, 목숨을 구해 준 영웅에 대한 보답으로 받아 달라는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작위를 받는 것보단 좋지 않냐고 하시면서요.”

“뭐?!”

“그럼에도 받지 않으신다면, 그때 바쳤던 ‘무언가’의 연장선을 염두에 두는 것이라 생각하겠다고 전달하라 하셨습니다.”

“허, 허!”

나는 기가 막혀서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그때 바쳤던 무언가’를 듣는 순간, 거짓말처럼 장면 하나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밤바다.

찬란히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에 휩싸인 황태자는 불현듯 내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아차 할 새 없이 입술 위에…….

‘……아악! 이런 미친놈!’

얼굴에 터질 것처럼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 망할 기억들을 털어내려 노력했다.

이런 내 반응을 잘못 받아들인 건지, 세드릭은 무척 진지해진 얼굴로 계속해서 속삭였다.

“공녀님, 노파심에 여쭤보는 겁니다만 혹시…… 전하께 협박을 받고 계신 겁니까?”

“…….”

“그렇다면 헛기침을 두 번 해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도움을…….”

무어라 주절대던 그가 문득 말을 멈추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어디 아프십니까? 갑자기 왜 입술을 만지작거리시는지…….”

나는 그의 말에 화들짝 놀라 손을 뗐다.

그러고 있는지 인지도 못 하던 상태여서 나도 모르게 톡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아, 알 것 없잖아.”

“아…….”

세드릭은 그런 내 반응에 뭔가를 깨달은 듯한 묘한 얼굴로 탄식했다.

나는 왠지 불쾌해져서 눈살을 찌푸리며 숙였던 상체를 들었다.

“주신 선물들은 감사히 받도록 하지. 하지만 파트너 얘기는 금시초문이니, 전하께 확실하게 말을 전해 주길 바라.”

“예? 어떤 말을…….”

“아직 연회의 참석 여부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이야.”

나는 얄밉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혹시 모르잖아? 그날 내가 갑자기 열병이라도 들어서 앓아누울지.”

“아, 네, 네.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세드릭이 혼미한 표정으로 얼버무렸다.

사람 일이란 모르는 것이니,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 않은가.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나를 석연치 않은 눈으로 응시하다가, 이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차 감사히 마셨습니다, 공녀님. 그, 그럼 저는 전해 드렸으니 이만 일어나 볼까 합니다.”

“그래. 바쁜 사람을 더 붙잡을 수 없지.”

나는 도도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얼른 썩 꺼지라는 말을 돌려 했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전하를 받아 주셔서 정말로 감사합니다, 공녀님.”

세드릭이 묵례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응? 뭔가 이상한데?’

조심히 가라고 답변하려던 나는 문득 괴이쩍은 소리를 들은 것 같아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얼마 후 폭풍을 몰고 들이닥친 황태자의 보좌관이 무사히 저택을 떠났다.

생각보다 별일은 아니라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에밀리, 이것들 정리해서 방 안으로 갖다 놔 줘.”

“…….”

“……에밀리?”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나는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다섯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낯선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집사와 에밀리가 보였다.

집사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어렵사리 물었다.

“아가씨, 혹시…… 정말로 소문처럼 그간, 황태자 전하와 냉전기이셨던 겁니까?”

“그게 무슨…….”

무슨 소리냐 되물으려던 찰나, 불현듯 사냥 대회 이후 한동안 떠들썩했던 나와 황태자의 소문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스러운 세기의 커플! 슬픈 이별인가, 단순한 냉전기인가!’

‘공녀에게 걷어차인 황태자의 집요한 구애!’

나는 허겁지겁 고개를 저으며 버럭 소리쳤다.

“아, 아니야!”

“…….”

“정말 그런 거 아니라니까?!”

억울함이 가득 담긴 내 목소리가 응접실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 * *

“탄신 연회에 참석할지 안 할지 아직 정한 것도 아니니까, 입들 조심해.”

나는 여러 차례 에밀리와 집사의 입단속을 시킨 후 방으로 돌아왔다.

그나마 공작은 황궁에, 아들놈들은 외부 훈련을 나가서 다행이었다.

황태자의 보좌관이 다녀갔다는 말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놈에게서 어마어마한 사치품들을 받은 것은 그 자리에 있던 이들만 아는 사실이기에.

얼마 후 지시를 맡겼던 집사가 돌아왔다.

방 안으로 들어서는 그는 혼자였다.

“……이클리스는?”

“검술 수업에 간 듯합니다, 아가씨.”

“수업에?”

나는 의아해졌다.

‘분명 며칠간 늦게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미미하게 눈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집사가 덧붙였다.

“마사에 가서 확인해 보니 마부와 마차 또한 없었습니다.”

“그럼…… 정말로 수업을 받으러 갔나 보네.”

그를 태우는 마차는 훈련을 받는 수도 변경 마을로만 움직였다.

갑자기 나갔다는 이클리스가 좀 꺼림칙했지만, 나는 수긍했다.

검술을 배우고자 하는 의사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까.

‘데이트는 내일 해야겠어.’

4% 남은 호감도가 눈에 밟혔지만, 애써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섣부르게 굴었다간 될 일도 안 되기 마련이니까.

그와 함께할 만한 데이트 장소들을 떠올리던 중, 문득 생각이 다른 곳으로 튀었다.

고민하던 나는 불쑥 내뱉었다.

“외출 준비 좀 해 줘, 집사.”

오랜만의 외출 소리에 집사가 놀란 눈으로 물었다.

“호위가 없으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응. 금방 다녀올 거야.”

“어디를 가시려는지…….”

“글쎄.”

톡톡톡- 나는 무심결에 책상을 두드리며 고민했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진 자에게 과연 무엇이 필요할지, 그리고 그게 의미가 있을지 사실 나도 잘 모른다.

“……무기상에 가 볼까.”

그저, 불쑥 드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할 뿐.

* * *

외출은 예상대로 짧게 끝났다.

“야! 오늘 그놈 보좌관 왔다며?! 왜 온 거냐?”

훈련에서 돌아온 건지, 저택으로 들어서자마자 레널드가 득달같이 달려와 물었다.

“별일 아니야. 지난번 사냥 대회 때 재판 관련해서 물어볼 게 있었대.”

“뭐? 내가 분명 헛소문들 다 잠재워 놨는데, 그 자식이 또 뭘 물으러 왔는데?”

“레널드, 나 피곤해. 나중에 얘기해.”

“야! 뭘 물어봤냐고! 이것만 대답하고 가!”

나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대충 답한 후 극성맞은 놈을 피해 방으로 도망치듯 올라갔다.

다음 날.

집사를 통해 이클리스가 예정 시간보다 훨씬 늦은 새벽녘에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다.

불안함이 다시 돋을락 말락 했다.

나는 전처럼 당장 그를 불러들여 추궁하려다 이내 관두었다.

‘……뭐, 내 손으로 약초까지 주었으니까.’

물론 자유 시간은 1시간뿐이었지만 동향인들을 도우라고 내 입으로 허락한 상태였다.

바로 그다음 날 왜 이렇게 늦었냐고 추궁하면 그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또 그랬다간, 집사의 눈에 무슨 의부증에 걸린 사람처럼 비칠 게 뻔했다.

“깨어나는 대로 나 좀 보러 오라고 전해 줘.”

나는 그렇게만 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날도 이클리스를 만날 수 없었다.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마차를 타고 훈련에 갔다고 합니다.”

난처한 얼굴로 전달하는 집사의 모습에 나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혹시…… 날 피하는 건가?’

하지만 딱히 그럴 이유가 없었다.

보좌관의 방문으로 삐졌을 수는 있지만, 어쨌든 그는 그것을 내게 대놓고 티 낼 만한 위치가 못 되었기 때문이다.

종종 칭얼거릴 때도 있었으나, 이클리스는 현실과 주제 파악이 누구보다 빠른 인물이었다.

당장 그를 붙들고 호감도가 그대로인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러나 검술을 배우겠다고 그토록 열성적인 애를 붙들고, 나와 데이트하기로 했지 않느냐며 대거리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성인식이 얼마나 남았지?’

나는 속으로 성인식을 세어 보았다.

‘이제 2주.’

4%를 올리기에 충분하다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고, 아슬아슬하다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는 기간이었다.

하지만 이런 내 초조함과는 달리,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이클리스를 만날 수 없었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 마침내 그의 숙소로 직접 찾아가려고 마음먹었을 무렵.

황궁에서 황태자의 탄신 연회에 공작 일가 전체는 무조건 참석하라는 명령이 담긴 초대장이 날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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