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1화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황태자의 생일 당일이 되었다.
혹여라도 꾀병을 부릴까 봐 공작가 전원에게 초청장을 보낸 황태자 때문에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
나는 매번 연회 때마다 그렇듯, 새벽부터 하녀들의 손에 깨워져 때 빼고 광을 내고 있었다.
귀찮고 피곤했지만, 빙의된 후 매번 반복하다 보니 이제 이것도 버틸 만했다.
“아가씨, 드레스 입으셔야 해요.”
모든 것을 내맡긴 채 눈을 감고 반쯤 졸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떴다.
눈앞에서 살랑거리는 검푸른색 드레스를 보자 순식간에 잠기운이 가셨다.
“이건…….”
황태자가 선물로 주었던 드레스였다.
마사지를 받기 위해 어둡게 해 둔 조명에도 천 자락 위에서 은은하게 빛이 났다.
“세상에…… 이번에 새로 구입하신 건가요?”
“너무 아름다워요. 이 촉감 좀 봐!”
“아가씨랑 정말 잘 어울리실 것 같아요.”
못 보던 새 드레스의 등장에 하녀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나는 잠시 그것을 응시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다른 드레스를 가져와.”
“왜요, 아가씨? 전하께서 직접…….”
“에밀리.”
이유를 되물으며 입을 놀리려던 에밀리가 내 차가운 경고에 ‘헙’하고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다시 한번 황태자가 선물해 준 드레스를 바라보았다.
화려한 것을 싫어하지만, 이런 내 눈으로도 드레스는 무척 아름다웠다.
떠맡기다시피 준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놈이 안목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입으면 분명, 페넬로페의 고아한 자태를 더욱 돋보여 줄 것이다.
‘하지만 저 드레스를 입으면 분명 칼리스토와 또 엮이는 것을 피할 수 없겠지.’
그러나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었던 이전과는 달리, 엔딩이 코앞이었다.
더는 예기치 않은 일로 다른 남주와 엮이는 것도, 알 수 없는 울렁거림에 얽매여서도 안 된다.
“연회에 얼굴만 비치고 금방 돌아올 거야. 그러니 눈에 띄지 않을 만한 드레스를 가지고 오렴.”
하녀들은 내 명령에 더는 토를 달지 않고 드레스를 물렸다.
얼마 후 그녀들이 가져온 것은 진보랏빛의 정숙한 드레스였다.
원래 있던 것이 아닌, 빙의한 후 내 취향에 맞게 사들인 것이었다.
평범하게 머리를 한데 올려 묶고,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액세서리도 최소한으로 착용한 후 방을 나섰다.
중앙 계단을 내려서자, 현관 근처에 익숙한 인물들이 서 있었다.
공작과 분홍색, 주황색이 차례대로 보였다.
“페넬로페.”
공작이 먼저 아는 체를 했다. 덩달아 인사를 하려던 나는, 문득 의아해졌다.
“왜 여기 계세요, 다들?”
“황궁으로 함께 가야지.”
“따로…… 타고 가는 거 아니었어요?”
공작이 내 물음에 불편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쩍 시선을 돌렸다.
“크흠, 이놈들이 먼저 같이 가자고 청했다.”
“우리가 언제……!”
불현듯 레널드가 소리치려다가, 눈을 부릅뜨는 공작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물었다.
“고마운 줄 알아라.”
눈을 끔뻑이며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때쯤, 레널드 놈이 삐딱하게 뇌까렸다.
“너 이번에도 파트너 신청 하나도 못 받았지?”
“뭐…….”
놈의 빈정거림에 순간 욱해서 ‘아니거든?!’ 하고 대꾸하려던 나는 가까스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대답했으면 막무가내로 파트너를 하자고 밀어붙였던 미친놈이 있다는 것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민망하지 말라고 오라버니들이 에스코트해 준다는데, 뭐? 따로 타는 거 아니었냐고? 배가 불렀지, 아주?”
“허. 그러는 너야말로 파트너 신청했다가 까여서 내 에스코트 핑계 대는 건 아니고?”
“이게, 죽고 싶냐?”
“스읍, 레널드, 페넬로페.”
어린애들처럼 티격태격하는 나와 레널드에게 공작이 엄한 목소리로 말렸다.
“그만해라. 시간이 다 됐으니 바로 이동하자꾸나.”
레널드 놈은 끝까지 나를 노려보다 팩 고개를 돌렸다.
‘유치한 놈.’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하는 수 없이 그들의 뒤를 따랐다.
저택 앞에는 일전에 사냥 대회에 갈 때 탔던 커다란 공작가의 전용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공작이 먼저 올라타자, 다음으로 레널드 놈이 쏙 들어갔다.
치맛자락을 추스르며 뒤따라 마차에 오르려던 순간이었다.
“잡아.”
문득 눈앞에 불쑥 손이 내밀어졌다.
고개를 돌리니 데릭이 고요히 잠긴 푸른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새삼 놀랐지만, 나는 이내 순순히 그 손을 잡았다.
“……감사해요, 오라버니.”
‘소공작’이 아닌 ‘오라버니’라 부른 게 참으로 오랜만이어서 그럴까.
맞닿은 데릭의 손이 미약하게 움찔거렸다.
그 순간,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데릭]의 호감도를 확 인하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곧바로 떠오른 [호감도 확인하기] 시스템 창에 정신이 좀 멍해졌다.
‘그러고 보니…… 호감도가 가려진 후에 한 번도 확인한 적이 없었지.’
나는 망설이다 [200만 골드]를 선택했다.
굳이 볼 필요는 없었으나, 순전히 마이너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SYSTEM〉 [200만 골드]를 차감하여 [데릭]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자금 : 44,000,000 골드)
[호감도 45%]
데릭의 호감도가 나타났다.
다행히도 마지막으로 봤던 때에 비해 하락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생각보다 꽤 많이 상승한 편이었다.
그러나 맥스에 가까운 호감도를 이미 보고 난 후여서 그런지, 50%도 넘지 못한 그의 호감도가 퍽 감흥 없었다.
“……마차에 오르지 않고 뭐 하는 거지?”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나를 일깨웠다.
손을 잡은 채로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기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죄송해요.”
나는 바로 몸을 돌려 마차의 발판을 밟았다.
막 마차 안으로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오늘은 제법 숙녀답게 입었구나.”
희미하게 그의 목소리가 귀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자리에 앉으려다 멈칫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말을 한 적 없는 사람처럼 묵묵히 내 옆에 따라 앉았다.
‘……그런데 자리가 또 왜 이래.’
뒤늦게 사냥 대회와 별다를 바 없는 자리 배치라는 것을 깨달았다.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마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을 때였다.
무겁게 내려앉은 정적을 공작이 깨트렸다.
“황제 폐하께서도 자리하신다니, 다들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특히, 페넬로페.”
이번에도 문젯거리는 나였다.
‘왜 또 나만 가지고 그래!’
억울해서 튀어나오려던 입은 이어지는 공작의 설교에 쏙 들어갔다.
“또 어떤 놈팡이들이 춤추자고 치근덕거린다고 바로 아랫도리를 걷어차지는 말고. 차라리 큰 소리로 나나 네 오라버니들을 부르거라.”
“…….”
“누누이 말하지만, 정 때리고 싶으면 사람 없는 곳으로 끌고 가서 때리든지. 알겠느냐?”
“아버지, 그런 말씀 마시라고 누차 얘기 드렸지 않습니까.”
“크흠.”
데릭이 인상을 쓰며 공작을 제지하자, 공작이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암, 그래야지. 재작년 황제 폐하의 탄신일 때 하일로스 자작가의 대를 끊어 놓을 뻔했던 걸 생각하면…… 어우!”
레널드 놈이 주절거리다가 끔찍하다는 듯 몸서리를 쳤다.
나는 흘깃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치맛자락 사이로 뾰족한 크리스털 구두 끝이 드러났다 사라졌다.
‘오호, 제법인걸. 구두 굽이 좀 쓸모가 있나 보네.’
나는 새로 얻은 공격 스킬에 딱딱, 발끝을 부딪치며 구두와 레널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놈이 퍼드득 어깨를 떨며 버럭 소리쳤다.
“야. 너 갑자기 왜 그런 음침한 눈으로 구두는 보고 그래!”
“내가 언제?”
나는 새침하게 쏴붙인 후 공작을 향해 히죽 웃어 보였다.
“알겠어요, 아버지.”
“어휴, 저 미친…….”
레널드 놈이 뭐라 구시렁거리는 소리와 옆쪽에서 데릭 놈의 서늘한 눈초리가 뺨에 와 닿았다.
그러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딱딱’ 구두 끝을 두어 번 더 경쾌하게 부딪쳤다.
얼마 후 마차는 황궁에 도달했다.
나는 마차에서 완전히 내려설 때까지 내심 긴장했다.
황태자가 어디선가 튀어나와서 ‘내 파트너가 왔느냐.’며 헛소리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일부러 놈의 눈에 띄지 않도록 드레스를 바꿔 입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연회장으로 향하는 계단을 모두 오를 때까지 황금 머리는 보이지 않았다.
놈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중.
“얘야.”
문득 공작이 나를 불렀다.
시선을 돌리자, 내 앞에 내밀어진 주름진 손이 보였다.
“애비가 에스코트할 수 있게 허락해 주겠느냐?”
“…….”
“늙은이랑 같이 입장할 바에야, 차라리 혼자 들어가겠다고 또 거절할 게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인 그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공작의 방치에 페넬로페가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것은 잘 알았다.
사춘기를 겪는 어린 영애가 제 또래 파트너 없이 아버지의 손을 잡고 들어가는 것을 창피하게 여길 수는 있었다.
‘그래도 그렇게 적나라하게 말하진 말았어야지, 이 망할 페넬로페야!’
당황해서 하염없이 흔들리는 시선으로 공작의 손을 내려다볼 때였다.
“싫으면 됐다.”
선뜻 손을 잡지 않자 공작이 민망한지 바로 손을 거두려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 손을 붙잡았다.
“그럴 리…….”
“…….”
“그럴 리 없잖아요, 아버지.”
나는 공작을 바라보며 힘겹게 미소 지었다.
단번에 환해지는 공작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멀미라도 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들어가자꾸나.”
“에카르트 공작 가문의 일원 드십니다-!”
시종의 외침과 함께 연회장의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렸다.
장내에는 이미 많은 귀족들이 포진해 있는 상태였다.
공작의 손을 잡고 필사적으로 어지러운 속을 내리누르며 안으로 들어서던 나는 누군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매번 토끼 가면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보지 못했던 예쁜 은빛 머리가, 아스라하게 빛났다.
눈이 마주쳤음에도 뷘터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얼마 전에 그와 안 좋게 끝난 탓에 조금 부담스러워진 나는, 먼저 눈을 피했다.
그때였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불타는 이 밤, 그대와 함께 춤을!
[뷘터]에게 [춤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보상 : 뷘터의 호감도 5%, 명성 50)
[수락 / 거절]
불현듯 눈앞이 하얘지더니,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뭐야!’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거절]을 연타했다.
막 시스템 창이 사라졌을 때였다.
“저 늙은 놈이 뭘 쳐다 봐?”
옆에서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개를 돌리자, 레널드 놈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뷘터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불타는 이 밤, 그대와 함께 춤을!
[레널드]에게 [춤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보상 : 레널드의 호감도 5%, 명성 50)
[수락 / 거절]
또 한 번 퀘스트 창이 떴다.
‘이 게임 진짜 미친 거 아니냐.’
나는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