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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42화 (14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2화

‘거절, 거절!’

나는 신경질적으로 [거절]을 다시 연타했다.

황태자의 눈에 띄기 싫어서 드레스 또한 수수한 것을 입고 온 상태였다.

그런데 어딜 가든 이목을 끄는 남주 놈들과 춤을 춘다면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그리고, 왜 내가 신청해야 돼?!’

노멀 모드에서는 여주에게 서로 ‘첫 춤의 영광’을 달라며 난리더니.

그러나 레널드 놈은 뷘터와 눈싸움 하기 바빠 춤의 ‘ᄎ’자도 꺼낼 기색이 아니었다.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고만 있자, 놈이 나를 흘긋 곁눈질했다.

“넌 또 뭘 봐?”

“…….”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놈을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공작과 데릭은 벌써 제 친우들을 찾아 떠난 후였다.

나는 레널드 또한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러나 생판 남처럼 바로 외면할 줄 알았던 놈이,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야, 야! 어디 가는데!”

“몰라도 돼.”

나는 시큰둥하게 대답하고는 사람들을 피해 인적 드문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황제가 와서 축사를 할 때까지 적당히 자리만 지키다 갈 생각이었다.

지나가는 시종에게서 와인 한 잔을 받아 든 나는, 조명이 어두운 기둥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때까지 뒤따라 온 레널드는 나랑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아닌 척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섰다.

외진 곳임에도 레널드 놈의 존재감으로 인해 사람들이 계속해서 이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왜 쫓아오는 건데?”

나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놈에게 물었다.

“너 쫓아온 거 아니라, 원래 여기가 내가 자주 찾는 곳이거든?”

유치한 답변에 나는 더 들어 줄 것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어깨를 붙드는 손길에 한 발짝도 뗄 수 없었다.

“아, 어디 가는데!”

“네가 자주 찾는 곳이라며. 그래서 내가 피해 주려고.”

나는 심드렁하게 ‘너와 단둘이 있기 싫다.’는 것을 돌려 말했다.

이 게임은 빌어먹게도, 퀘스트 권유가 매우 끈질겼으므로 같이 있다가 또 언제 시스템 창이 뜰지 모른다.

남주들과는 떨어지는 것이 상책이었다.

“언제는 안 가면 안 되냐고 저가 먼저 붙들었으면서…….”

레널드 놈은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조명 탓인지 그 얼굴이 무척이나 붉어 보였다.

“짜증 나는 계집애.”

그리고 팩 고개를 돌리더니 쿵쿵거리며 멀어지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가 언…….’

황당함에 버벅이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중, 머릿속에 장면 하나가 번뜩 스쳐 지나갔다.

- 꼭 가야 해? 그냥 나랑 같이 있으면…….

- 미, 미쳤냐?!

사냥 대회의 전야제 때였다.

그땐 황태자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하나둘 떠나가는 방패막이들을 기겁하며 붙들었었는데…….

레널드가 그걸 아직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이 좀 놀라웠다.

나는 인파에 섞여 잘 보이지 않는 핑크 머리 대신, 머리 위에 훌쩍 떠 있는 연분홍색 게이지 바를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의 호감도도 확인할 때가 되었다.

‘또 오면 한번 춤추자고 해 볼까.’

그렇게 생각하며 천천히 시선을 거두던 때였다.

문득 관자놀이에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나는, 또 한 번 군청색 동공과 눈이 마주쳤다.

‘아, 아니. 일부러 숨은 건데 대체 어떻게 찾아낸 거야?!’

그 또한 나를 따라 자리를 옮긴 건지, 썩 멀지 않은 거리였다.

제 딴에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 주변에 적당히 섞여 있는 듯했다.

그러나 선명한 보라색 게이지 바와 나를 바라보는 아련한 시선 때문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불현듯 뷘터가 몸을 바로 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왠지 모르게 곧 내 쪽으로 다가올 것 같았다.

‘이곳이 명당이 아니었어.’

나는 다시 자리를 이동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지?”

그러나 검은색 슈트 차림의 누군가로 인해 곧장 가로막혔다.

데릭이었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불타는 이 밤, 그대와 함께 춤을!

[데릭]에게 [춤 신청]을 하시겠습니까?

(보상 : 데릭의 호감도 5%, 명성 50)

[수락 / 거절]

‘하. 제발 자비 좀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떠오르는 퀘스트 창에 나는 치오르는 한숨을 삼키며 답했다.

“……그냥 서 있어요.”

그와 동시에 데릭 놈이 왜 내 앞에 있는지 어리둥절해졌다.

놈은 냉혈 귀족이라는 설정과는 달리,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넘쳤다.

놀란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음악이 느리고 로맨틱한 템포로 바뀌었다.

“……춤을 추겠느냐.”

그리고 데릭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다 뒤늦게 물었다.

“……저랑요?”

“그래.”

데릭이 내게 한 손을 내밀었다.

나와 닿는 것조차, 아니, ‘오라버니’라고 불리는 것조차 극도로 혐오하던 놈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

“왜…….”

반사적으로 ‘왜요?’ 하고 물으려던 나는 일순 움찔거리는 데릭의 입매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 사실 나도 몰라.

무덤덤하게 답변을 하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나도 그의 행동을 모르고, 그 또한 자신의 행동을 모른다.

‘그래. 어차피 계속 뜰 퀘스트, 한 번쯤은…….’

계속 거절할 바에야, 그냥 한 놈이라도 해서 끝내는 게 나았다.

보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고, 호감도를 위해 비굴하게 춤을 구걸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마음을 정하고,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이윽고 [수락]을 누르려던 바로 그 찰나.

“미안하게 됐군.”

휘익- 거세게 허리가 끌어당겨졌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나는, 속절없이 누군가의 품으로 끌려 들어갔다.

“공녀와 춤을 춰야 할 이는 나라서 말이야.”

샹들리에 빛에 반사된 황금빛 머리칼이 눈앞에서 찬란하게 흩날렸다.

그와 동시에 또 다른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칼리스토]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잠시 그것에 시선을 빼앗겼을 무렵.

옆쪽에서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가 쏟아졌다.

“황태자 전하, 이게 무슨 짓입니까.”

나는 퍼뜩 고개를 돌렸다.

차게 식은 데릭의 시선이 내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에 꽂혀 있었다.

그제야 퍼뜩 정신이 든 나는 허겁지겁 황태자의 팔을 떼어 내려고 했다.

“이게 무슨…… 읏.”

그러나 굵직한 팔 줄기는 내 허리를 더욱 꽉 옥죌 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황태자가 우왕좌왕하는 나를 흘깃 내려다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일이 있어 좀 늦게 도착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더라니…….”

“…….”

“이런 곳에 잘도 숨어 있었군. 한참 찾았어, 공녀.”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습니다.”

데릭은 당장이라도 달려와 황태자의 손을 떼어 내고 싶은 사람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삽시간에 주변의 온도가 서늘해졌다.

“그 손, 놓으십시오.”

“싫은데?”

황태자는 소공작의 경고에도 아랑곳 않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자네는 남매이니 춤쯤이야 언제든 출 수 있지 않나. 오늘은 나에게 양보해.”

“송구합니다만, 오늘은 힘들 것 같습니다.”

데릭은 명령과도 같은 황태자에게 전혀 밀리지 않고 대꾸했다.

“제가 최근 일이 바빠 동생과 유희를 즐길 새가 없어서 말입니다. 그리고, 에카르트에 이리 무례하게 구시지 않는 게 좋을 텐데요, 전하.”

저번 사냥 대회와는 사뭇 달랐다. 데릭은 무표정한 얼굴로 뇌까렸다.

“곧 황제 폐하의 주도하에 승계를 확정 짓는 대귀족 회의가 열리지 않습니까.”

아드득-.

불현듯 위쪽에서 살벌하게 이를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황태자와 맞붙어 있는 나만 들을 수 있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무례라니, 섭섭하군.”

칼리스토는 이를 악물고 웃으며 말 했다.

“공녀는 내 파트너야, 소공작.”

“여인을 막무가내로 끌고 가려는 행위를 파트너 요청이라 칭하는 것은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만.”

“보좌관을 통해 정중히 요청했고, 공녀가 수락했다.”

“…….”

불안한 심정으로 그 둘의 대화를 정신없이 쫓아가던 중, 불현듯 정적이 찾아왔다.

황태자의 말에 곧장 대꾸를 하려던 데릭의 입이 서서히 다물렸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이냐?”

나는 뒤늦게 황태자가 무슨 헛소리를 지껄였는지 깨달았다.

깜빡이기 시작하는 주황색 게이지 바에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제, 제가 언제 수락을……!”

“거절하면, 큰 소리로 솔레일을 소탕한 제국의 영웅에게 춤을 신청한다고 외칠 거야.”

그때, 황태자가 나만 들릴 만큼 작은 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황태자를 올려다보았지만, 놈은 그저 비열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런 상 미친놈!’

나는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이 미친놈은 한다면 진짜 하는 놈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오라버니.”

나는 결국 눈물을 머금고 데릭을 불렀다.

“전하께 춤 신청을 받은 것을 영…… 영광으로 여기고 싶어요.”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가까스로 문장을 만들어 내었다.

그렇지만 파트너를 인정하는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데릭이 전에 없이 단단하게 턱을 굳히더니, 이내 휙 몸을 돌렸다.

빠르게 깜빡이는 주황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멀어졌다.

앙금이 남아 있던 속이 시원하면서도, 나는 그에게 좀 미안해졌다.

‘……괜찮겠지?’

아무리 엑스 친 놈이라지만,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가 싶어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그때였다.

“큭, 소공작이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보는군. 덕분에 한 방 잘 먹였어, 공녀.”

얄미운 목소리에 고개를 휙 돌리자, 황태자가 재밌다는 얼굴로 낄낄거리고 있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내 눈이 세모꼴로 치켜 올라가는 것은 당연했다.

“제가 언제 전하 파트너 한다 했습니까?”

황태자가 힘겹게 웃음을 그치고 태연하게 대꾸했다.

“왜, 맞잖아?”

“저 갈래요. 혼자서 춤 양껏 추시든지요.”

나는 짜증스럽게 휙 몸을 돌렸다.

“공녀.”

황태자가 드물게 당황한 얼굴로 나를 붙들었다.

“……화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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