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3화
“…….”
나는 황태자의 물음에 그저 기가 막혔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께서…….”
“그 소문이 사실이었…….”
갑작스러운 황태자의 등장으로 인해 벌써부터 숙덕임이 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나는 속히 놈과 멀어지고 싶었다.
막 한 발짝 떼었을 때, 문득 치맛자락이 팽팽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황태자가 애처럼 치맛자락을 붙들고 서 있었다.
나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다가, 낮게 속삭였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춤은 좀 춰 주고 가, 공녀.”
“혼자 추시라고 말씀드렸는데요.”
“명색이 생일 연회인데, 황태자씩이나 돼서 파트너에게 춤을 거절당했다는 말이 돌면 내가 너무 불쌍하잖아.”
황태자가 과장스럽게 시무룩한 얼굴을 흉내 냈다.
그러면서도 내 치맛자락을 꼭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 손을 내려다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왜 이래?’
그의 행동은 무례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단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목이 쏠린 상태에서 황족의 손을 매몰차게 쳐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놈도 그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러는 것이리라.
나는 깊은 한숨을 삼키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저 말고 전하의 상대가 되어 줄 영애들이 넘쳐날 텐데요.”
“글쎄.”
그가 되물으며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그러자 숨죽인 채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몇몇 귀족들이 황태자의 시선이 닿는 족족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개중 어린 영애 무리는 사색이 되어 자리를 옮기기까지 하지 않는가.
연회장을 한 바퀴 돈 그의 시선이 다시 내게로 못 박혔다.
“그래 보여?”
황태자가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공녀는 저번부터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
나는 그저 눈만 깜빡일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황태자를 따라 둘러 본 장내 귀족들의 눈에 서려 있는 것은 선명한 두려움과 경계였다.
장차 황제가 될 고귀한 이에게 가져야 하는 감정들과는 맞지 않았다.
‘하긴. 지난 2황자의 탄신 연회에서 그 난리를 쳤으니 그럴 만도…….’
모든 이들이 보는 앞에서 암살자의 목을 거침없이 베어내던 그.
게다가 게임에서 황태자는 ‘피에 미친 살인귀’라는 소문이 파다하다는 설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문득 승계를 확정 지을 대귀족 회의가 열릴 거라는 데릭의 말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을 전쟁터에서 구르며 제국에 승전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무에게도 그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친부인 황제에게조차.
“……그냥 한번 어울려 주지 그래.”
그때, 황태자가 나를 상념에서 깨웠다.
“생일이잖아. 그 비싼 것들을 받고 입 싹 닫는 건 너무하지 않나?”
“…….”
“그 액세서리는 패전국 중 한 곳의 국보야, 공녀. 억만금을 줘도 못 사는 거라고.”
나는 놈의 이죽거림에 누가 달라 했냐고 반박하려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황태자는 평소와 같이 얄미운 면상 그대로였다.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붙든 채 놔주지 않는 그 모습이…….
좀 볼품없고 처량 맞아 보였다.
동시에 싫다면 곧장 바로 물러서는 다른 남주들에 비해 징글맞을 정도로 집요하게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떠 있는 퀘스트 창을 흘끔 곁눈질하며 결국 체념조로 말했다.
“……저 춤 못 춰요.”
생각해 보니 그랬다. 나는 귀족들의 춤을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리듬에 몸을 맡기기에는, 천방지축이었던 이 몸의 주인이라고 잘 출 것 같지 않았다.
‘역시 이 망할 퀘스트는 하지 않는 게…….’
다시 한번 결심을 다지던 그 순간이었다.
“그럼 이렇게 하면 되지.”
“꺅!”
황태자가 잡고 있던 치맛자락을 놓고 한 손으로 내 허리를 번쩍 쳐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작게 비명 지르며 허겁지겁 그의 어깨를 짚었다.
다행히 그는 곧 내 몸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대리석이 깔려 있는 바닥이 아니었다.
수수한 드레스와 걸맞게 대충 골라 신은 굽 낮은 구두 아래, 단단하면서도 물컹한 촉감이 닿았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
몸에 닿는 타인의 단단한 몸에 당황한 나머지 나는 마구 발버둥을 쳤다.
“윽.”
칼리스토의 입에서 나지막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나는 그제야 놀라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그거 아나?”
“뭐, 뭘…….”
“그대는 가끔 나랑 대화할 때 꼭 한 대 패고 싶다는 표정을 지을 때가 있어.”
답답할 만큼 허리를 꽉 감싼 황태자가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은 내 손을 떼어내어 맞잡았다.
“황족의 몸에 손을 대는 것은 중죄이니 허락할 수 없다. 대신 발이라도 실컷 밟아 두라고.”
“자, 잠시만……!”
곧장 몸을 움직이는 놈으로 인해 덩달아 내 몸 또한 끌려갔다.
나는 뒤늦게 그가 나를 통째로 들어 올려 제 발 위에 올려 두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박자에 맞춰 천천히 스텝을 옮겼다.
남의 발 위에 체중을 실은 채 움직이는 느낌은 참으로 기묘했다.
고작 몇 cm에 불과한데 떨어질까 겁이 났다.
나도 모르게 놈을 붙잡은 손에 꽉 힘을 준 채, 움직임을 따라 신중하게 균형을 다잡았다.
그 순간엔 우리 사이가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도, 스테이지가 아닌 어두운 가장자리에서 괴상한 모습으로 춤을 추는 중이라는 것도.
그리고 주변을 점점 사람들이 에워싸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이럼 됐지? 이런 구석까지 눈여겨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고.”
그럼 춤을 출 이유 또한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잠시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나는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런 내 모습이 퍽 웃겼는지, 문득 머리맡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실컷 밟아 두라니까, 공녀.”
놈이 정신없는 나를 보고 히죽 웃으며 지껄였다.
“……장난하세요?”
나는 그를 흘끔거리다가 움직임을 감지하고 곧장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마음 같아서는 발등이 으스러져라 구두 굽으로 짓뭉개고 싶었다.
그러나 발을 떼었다간 그대로 중심을 잃고 넘어질 것 같았다.
신경질적인 내 목소리에 황태자가 다시 한번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는 정말 춤을 못 추는군.”
“이…….”
못 추는 게 아니라, 이게 다 네놈 때문이지 않으냐고.
울컥해서 뭐라 반박하려고 번쩍 고개를 쳐들던 그 찰나였다.
나는 곧바로 마주한 얼굴에 일순 말을 잃었다.
코앞에 있는 황태자의 눈이, 아니, 황태자가 얼굴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무척이나 즐겁다는 듯이.
언제나 삐딱하거나, 그도 아니면 살벌한 기세를 풍기던 놈이 이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그 모습이 너무 생경하게 느껴져서, 나는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노랫소리도, 사람들의 웅성거림조차 들리지 않았다.
통제할 수 없을 만큼 기괴한 울렁거림이 가슴에서 점점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하려던 순간.
음악이 끝이 났다.
클라이맥스가 한참 지난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다행히도 오래 출 필요가 없었다.
웅장한 피날레와 함께 황태자가 나를 제 발등 위에서 천천히 내려주었다.
“어울려 줘서 고마워, 공녀.”
놈은 한 발자국 떨어진 후 다른 남자들처럼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석에 가까운 완벽한 자세였다.
전혀 놈답지 않은 모습에, 마주 인사할 생각도 못 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을 무렵이었다.
〈SYSTEM〉 [불타는 이 밤, 그대와 함께 춤을] 퀘스트 성공!
〈SYSTEM〉 보상을 받으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허공에 떠오른 하얀 네모 창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이 망할 게임은 거절해도 조건만 충족하면 자동으로 퀘스트 완료가 되곤 했다.
이왕 얻은 보상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SYSTEM〉 보상으로 [칼리스토]의 [호감도 +5%]와 [명성 +50]을 얻었습니다.
(명성 total : 560)
보상이 적힌 글씨를 보니, 오랜 백일몽에서 깨어나듯 서서히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더불어 묘하게 분주하고 심란한 듯한 분위기가 감지됐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나는 경악했다.
‘미친……!’
알아보는 이들이 없을 거라는 황태자의 말과는 달리, 주변에 꽤 많은 귀족들이 포진해 있었다.
게다가 스테이지에서 춤을 추던 몇몇 커플들은 주인공에 대한 예를 차린답시고 우리가 있는 가장자리 근처까지 이동한 상태가 아닌가.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공녀.”
황태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파트너의 발등 위에서 괴상한 몸짓으로 춤을 춘 것을 모두에게 들켰다는 사실이 못 견디게 창피했다.
‘망할! 이럴 땐 왜 자동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냐고!’
분별없는 게임 시스템을 욕하던 나는, 결국 남들의 눈을 피해 음침한 테라스까지 몰렸다.
테라스는 밀애를 나누는 연인들이 아닌 이상 잘 이용하지 않았다.
‘진짜 공녀’라는 타이틀을 달고 데뷔한 노멀 모드의 여주가 연회에 참여할 때마다 호감도를 위해 가장 잘 이용한 배경이기도 했다.
왜냐면 이 게임은 빌어먹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황급히 문을 닫으려던 나는 ‘턱-’ 하고 문틈에 끼어 가로막는 타인의 발에 의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었다.
“왜 도망을 가는 거지?”
유리문을 사이에 둔 채 황태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춤 다 줬잖아요. 이제 저 좀 그만 놔주시죠, 전하.”
콱, 콱-!
나는 문의 모서리가 놈의 발을 찍든 말든 문을 마구 흔들었다.
“윽. 실컷 밟으라 할 때는 가만있더니 이제 와 내 발을 짓이기려 드는군. 이거 황족 모독이야, 공녀.”
콱, 콱, 콱-!
나는 놈의 말에 대꾸 없이 문으로 세게 놈의 발을 찧었다.
“으윽! 이대로 있다간, 귀족들은 물론 근위병들도 구경 올 텐데? 그 전에 날 들여보내 주고 커튼을 치는 게 소문 방지에 더 도움되지 않겠나?”
황태자 놈이 신음을 내뱉으면서도 잘도 지껄였다.
분하지만 일리 있는 말이었다. 실은 놈이 힘으로 밀고 들어온다면, 막을 방도가 없었다.
진저리를 치던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유리문을 열었다.
황태자가 씩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지긋지긋하다는 눈으로 놈을 쏘아보았다.
“대체 왜 쫓아오시는 거예요? 해 달라는 대로 춤 다 춰 드렸잖아요.”
“이 황궁에서 감히 황태자가 못 갈 곳이 어디 있나? 엄연히 말하면 공녀가 내 공간을 이용하는 거야.”
“그럼 제가 가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어허, 농담도 못 하나?”
놈이 허겁지겁 내 앞을 가로막고 뒤로 손을 뻗어 커튼을 쳤다.
완벽한 차단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런데…….”
그런데 불현듯 놈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위아래로 나를 훑어보았다.
“내가 보낸 드레스는 왜 안 입고 온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