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4화
나는 황태자의 게슴츠레한 눈초리에 흠칫했다.
돌발 퀘스트 때문에, 왜 이런 칙칙한 드레스를 입었는지 깜빡 잊고 있었다.
“액세서리도 착용하지 않았군.”
대답이 없자, 나를 살피는 새빨간 눈에 의구심이 짙어졌다.
나는 마지못해 변명했다.
“……너무 예뻐서 아껴 쓰려고 그랬어요.”
“허.”
칼리스토가 노골적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들어도 너무 아무 말인지라 좀 민망해졌다.
시선을 피하는 나를 보며 그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내가 그대를 모를 줄 아나?”
“……뭘요?”
“내 눈에도 남들 눈에도 띄기 싫으니까 그랬겠지.”
“…….”
정확하게 나를 파악한 탓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걸 아는 놈이 그런 걸 줘?!’
동시에 억울함이 치솟았다.
집사가 공작과 데릭 놈에게 가서 내가 황태자 놈에게 드레스를 받은 것을 쪼르르 일러바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다이아몬드 광산은 넙죽 받았으면서, 다이아몬드 액세서리와 드레스는 또 받기 싫다?”
불퉁한 얼굴을 하고 있자, 황태자가 쯧쯧 혀를 찼다.
“성격 참 이상해.”
“전하께서 저한테 성격 지적을…….”
놈의 말에 혼미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고 말했다.
“신경 써 주신 것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포상 같은 거 필요 없습니다.”
마지막에 급작스럽게 헤어져서 이 말을 너무 늦게 전하게 됐다.
황태자는 내 말에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체를 숨긴 뷘터도 마음에 걸렸고, 괜히 그날 일이 알려져 봤자 득 될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그를 마주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일은…… 그냥 없었던 일로 해 주세요.”
“뭘? 그대와 내가 두 번이나 입을 맞춘 것?”
“아니요!”
나는 놈의 막말에 기겁을 하고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왜 두 번이에요? 한 번이죠!”
진저리를 치며 따져 묻는 내 말에 놈이 묘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계속해.”
“솔. 레. 일. 관련해서 말이에요.”
혹여라도 놈이 곡해하여 받아들일까 봐 한 자 한 자 힘줘서 말했다.
“……그때 일은 그냥 사고였어요.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전하.”
비밀이니 더는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황태자는 가타부타 대답 대신 생뚱맞은 소리를 내뱉었다.
“얼마 전 회의에서 공작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아버지……. 랑요?”
“외출은 물론, 그대의 특질에 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눈치더군.”
“그, 그건…….”
나는 당황해서 버벅였다.
황태자는 내가 마법을 쓸 줄 아는 것을 공작에게조차 비밀로 하는 것을 꼬집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포상을 거절하는 이유가?”
나는 이미 상황 파악을 끝낸 칼리스토의 통찰력에 내심 놀랐다.
“……네.”
물론 그 이유만은 아니었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였다.
“제가 공녀인 것은 맞지만 친딸인 것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황태자가 떨떠름한 얼굴로 수긍했다.
“사실 그대가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요?”
“드레스 또한 입고 오지 않을 거라 예상했지.”
기가 막힌 노릇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왜 보내셨어요?”
“그냥.”
“……네?”
“보고 싶어서.”
내가 들은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숨을 멈추고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테라스 밖으로 고개를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것들을 보자마자 그대가 떠올랐다.”
“…….”
“악귀의 손에 들어갈 바엔 가치에 맞는 주인을 찾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
“그뿐이야.”
나는 생경한 눈으로 말없이 황태자를 응시했다.
오늘따라 그가 유난히도 낯설게 느껴졌다.
시원한 바람결이 살랑살랑 테라스 안까지 밀려들었다.
잔머리가 볼을 간지럽히는 느낌에,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이상한 단어를 물었다.
“악귀요……?”
“황비 말이야.”
황태자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답했다.
황제의 하나뿐인 처에게 그런 상스러운 단어를 쓰는 게 더는 놀랍지도 않았다.
‘……황비한테 빼앗기기 싫어서 나한테 준 거구나.’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의 뒷말만 듣고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수런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런데…….”
황태자가 불현듯 내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난 이렇게 퍼다 날랐는데, 그대는 뭐 생일 선물 같은 거 없나?”
그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황태자가 눈을 부릅떴다.
“진짜 없어?”
“……춤춰 드렸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제국의 신민이 되어서 감히 하나뿐인 황태자의 탄신일에 아무것도 바치지 않나?”
“공작가의 이름으로 보낸 것은 있겠지요.”
심드렁한 대꾸에 황태자가 헛바람을 터뜨렸다.
“하! 에카르트에선 예절 교육을 시키지 않는 건가? 황족에 대한 예우가 아주 형편없군.”
예절 교육을 다시 받아야겠다는 둥, 황궁의 지하 감옥을 구경시켜 주어야겠다는 둥.
애처럼 끊임없이 불평을 구시렁거리는 놈 때문에 나는 두 손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다 놈이 ‘감히 황태자의 앞에서 귀를 틀어막느냐.’고 난리를 치기 전에 서둘러 속주머니를 뒤적였다.
“여기요, 여기요!”
받고 썩 꺼지라는 식으로 재빨리 꺼낸 것을 떠넘기자, 그제야 폭격기 같던 입이 다물렸다.
“진작 줄 것이지.”
잽싸게 낚아챈 황태자가 샐쭉 웃었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곧장 포장지를 ‘쫙쫙’ 뜯기 시작했다.
‘혹시나 해서 사 왔는데 안 가져왔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나는 해탈한 채 놈이 하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뭘 이렇게 번거롭게 포장까지 하고 그래?”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다시 돌려주셔도 됩니다.”
“누가 마음에 안 든대?”
다시 달라고 손을 내밀자, 황태자가 잽싸게 선물을 휙 위로 쳐들었다.
그의 손에 순식간에 포장지가 뜯기고 작은 벨벳 상자가 드러났다.
“오호. 액세서리 상자군.”
황태자는 눈을 빛내며 지체 없이 상자를 열었다.
“이건…….”
그는 멈칫하고 상자 안을 들여다보다가 이내 내용물을 꺼내 들었다.
환한 달빛 아래, 그의 눈동자 색과 똑 닮은 타원형의 루비가 피와 같은 붉은 빛을 머금은 채 반짝였다.
금침에 엄지손톱만 한 원석만 덩그러니 붙어 있는 모양새가 다소 투박하고 초라해 보였다.
“커프슨가?”
“그냥 커프스는 아니에요.”
“그럼?”
“마법이 새겨진 건데…….”
사실 이게 내 창의력의 한계였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고민했지만, 이미 모든 것을 다 가진 권력자에게는 도통 뭘 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성인 남자의 생일 선물을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뷘터에게 줄 때와 마찬가지로 대충 고른 건데, 막상 당사자 앞에 드러나자 왠지 모르게 창피했다.
‘이래서 돌아갈 때 몰래 남겨 두고 가려고 한 건데…….’
차마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어깨너머 벽을 응시하며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읊조렸다.
“힐링 마법은 가공하지 않은 원석에 새겨야 가장 효과가 좋대요.”
“……힐링 마법?”
“네. 혹시라도 다치시면 커프스를 상처 가까이 가져다 대세요. 루비가 완전히 부서지기 전까진 마법이 발동한다고 합니다.”
귀족들이 평소 착용하는 화려하고 섬세한 세공품들은 마력이 떨어졌다.
더구나 이건 사용 횟수가 무제한에 가까워 투박한 생김새에 비해 값이 엄청나게 비쌌다.
“앞으로 혹시라도 옥체 상하셨을 때, 저한테 힐링 마법 못 쓰냐고 닦달하지 마시고 그거 쓰시라고…….”
외양보다 실용성을 생각한 선택이었다는 것을 설명하려 한 건데, 꼭 변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다. 시선 또한 아래로 차츰 떨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우두둑-.
불현듯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무슨…….”
무심결에 고개를 든 나는 칼리스토의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놈이 옷에 매달고 다니라고 준 커프스로 귓불을 뚫고 있었다.
“이러면 되나?”
그가 귀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두꺼운 금침으로 무식하게 맨살을 꿰뚫은 탓인지, 검붉은 핏방울들이 귀 끝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저, 전하!”
나는 그야말로 대경실색했다.
칼리스토는 그런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놈의 기행에 입을 뻐끔거리며 한참을 버벅이던 나는, 이내 비명처럼 소리 질렀다.
“대체 이게……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왜? 이렇게 끼고 있다가 필요하면 빼서 쓰면 되지.”
“커프스를 누가 귓불에다가 끼웁니까!”
“이 나라의 황태자가.”
놈이 턱을 쳐들고 오만하게 뇌까렸다.
그러다 제 말이 웃긴지 미친놈처럼 낄낄거렸다.
아연한 얼굴로 그런 황태자를 바라보던 중, 귓불과 맞닿은 루비에서 붉은빛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상처를 감지한 아티팩트가 마법을 발동시킨 것이다.
“그렇게 미친놈 보듯 볼 것 없어. 그대가 준 선물 덕에 다 나았으니까.”
“정말이지…… 전하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난 여전히 핏자국이 흥건하게 남아 있는 놈의 귓가를 바라보며 야트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가 밉살맞게 응수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제가 뭘요?”
“그대처럼 이상한 여자는 처음 본다고 말 안 했나?”
“저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보다 전하께서야 말로 의원을 좀 만나 보시는 게…….”
“그러니 이상한 사람들끼리 한번 잘해 보자고.”
황태자가 불쑥 말을 끊고 몸을 바로 했다.
그는 귀에 단 루비처럼 탐스러운 새빨간 눈으로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나랑 정식으로 교제하지,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