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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45화 (14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5화

나는 황태자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숨이 멎었다.

나는 내게 못 박혀 있는 적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호흡을 토해 내듯 가까스로 입을 벌렸다.

“지금…… 뭐라고…….”

“무성한 소문만 제공할 게 아니라, 진짜로 만나 보자고.”

똑똑히 들리는 칼리스토의 음성에 문득 눈앞이 아득해졌다.

그저 이상하게 울렁거리는 것에 그치던 가슴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숨을 죽이면 사라지던 평소와는 달리, 목 끝까지 치오른 이 이상한 감정들이 계속 나를 괴롭혔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어쩔 줄 몰라 망연히 그를 바라보고 서 있는 나를 보며 칼리스토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는 그대도 어느 정도 나와 같다고 생각했는데.”

“…….”

“누가 보면, 미로 정원에서의 일은 나 혼자 꿈을 꾼 것이라고 착각하겠어.”

황태자가 살기 위해 아무 말이나 지껄였던 내 수치스러운 과거를 언급했다.

반사적으로 인상을 쓰는 나를 보고 놈이 비식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아직도 그때 일 때문에 화가 나 있나?”

“무슨…… 일이요?”

“내가 그대의 목에 칼을 들이밀었던 일.”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것을 여전히 신경 쓰고 있는 그도 놀라웠지만, 어느새 그것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치가 떨리게 싫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걸까.

놀랍게도, 이제는 더 이상 그림자도 보기 싫을 정도로 칼리스토가 혐오스럽지는 않았다.

요즘은 그를 마주할 때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기분 때문에 도리어…….

“그대에게 칼을 주고 똑같이 내 목을 썰라고 하면.”

“…….”

“그러면 분이 좀 풀리겠어?”

그러나 말이 없는 내가 여전히 그 일을 신경 쓰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건지, 황태자가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때 일은 그냥 사고…….”

“자, 받아.”

하지만 엄청난 행동파 미친놈은 벌써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낸 후였다.

황룡이 선명하게 음각되어 있는 화려한 검집.

그가 내게 내민 것은 단도였다.

“이, 이게 무슨…….”

“명색이 내 탄신 연회인지라 검은 들고 오지 못했다.”

“…….”

“대신 이걸로라도 살짝 그어 봐, 그럼.”

놈이 손가락으로 제 목덜미를 툭툭 건드렸다.

하필이면 귓불에서 새어 나온 핏자국이 묻어 있는 쪽이었다.

나는 벙찐 채로 그와 단도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벌컥 소리쳤다.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됐어요!”

“왜? 마침 그대가 준 아티팩트도 있겠다. 바로 치료하면 되겠군.”

“누굴 역모죄로 참수형 당하게 할 일 있답니까? 위험하니까 얼른 집어 넣으세요!”

오만상을 찌푸린 채 몸서리를 치자 황태자는 칼을 집어넣는 대신 유쾌한 얼굴로 웃었다.

“그럼 이제 나와 교제하는 데 걸리는 것 없는 거지?”

나는 상 미친놈 같은 그를 막막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눈에 띄는 무언가에 시선을 들어 올렸다.

달빛이 부스러지고 있는 황금빛 머리 위에서 깜빡이고 있는.

‘……사이렌.’

나는 황태자의 눈동자 색과 비슷한 새빨간 호감도 게이지 바를 사이렌처럼 위험한 징조로 여겼다.

그래서 그간 따로 칼리스토의 호감도를 확인하지 않았다.

그는 엑스 중의 왕 엑스였고, 내 탈출과는 가장 거리가 먼 남주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잘 모르겠다.

어쩌면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적으로 외면해 온 것일지도.

왜냐면, 왜냐하면…….

“……전하.”

나는 앞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여전히 나를 향해 단도를 내밀고 있는 손 위를 살며시 맞잡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새빨간 동공이 조금 커다래지는 것을 마주한 순간.

〈SYSTEM〉 [칼리스토]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200만 골드 / 명성 200]

우리 사이를 가르고, 허공에 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2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칼리스토]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자금 : 42,000,000 골드)

그리고 칼리스토의 머리 위에 써 있는 흰 글씨가 곧장 변했다.

[호감도 76%]

떠오른 호감도를 보자,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몰아쳤다.

안도감과 동시에 알 수 없는 무거운 감정들이 가슴속에 몰아닥쳤다.

그것은 실망과 비슷했다.

“……녀, 공녀.”

그의 머리 위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때, 문득 칼리스토가 나를 일깨웠다.

대뜸 손을 잡은 채 말이 없는 내가 영 이상했던지, 의아한 눈빛이었다.

나는 퍼뜩 그의 손등을 덮고 있던 손을 치웠다.

“갑자기 표정이 왜 그래?”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호감도 76%’에서 이미 모두 끝난 일이었다.

그런데도 혹시나 하는 마음을, 벌어지는 입을 멈출 수 없었다.

“……전하.”

“말해.”

“저를…… 사랑하세요?”

황태자의 눈이 전에 없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마치 생소한 단어를 들은 사람처럼 그가 되물었다.

“……사랑?”

“네. 저를…… 사랑하셔서 교제를 청하시는 거예요?”

“공녀.”

칼리스토는 퍽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바람 빠진 소리를 흘렸다.

“우리 같은 처지에 그런 건 너무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단어지 않나?”

“…….”

“답지 않게 왜 그래? 사냥 대회의 전야제에서 공녀가 한 말이잖아.”

“무슨…….”

“그대의 처지에 걸맞은 현실적인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그 순간, 누가 뒤통수를 때린 것처럼 머리가 멍해졌다.

실망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그 감정이 더 큰 무언가가 되어 속을 뒤집어 놓았다.

황태자는 이런 내 상태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턱을 쓰다듬으며 여상하게 말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일리 있는 말이더군. 하지만 그대의 생각은 틀렸어.”

“…….”

“우린 현실적으로 서로에게 가장 필요하고 걸맞은 위치에 있어. 자리가 위태로운 황태자와 공작가에서 내놓은 미운 오리 새끼의 결합이잖아.”

“…….”

“그리고 그걸 떠나…… 그대와 있으면 편하고 기분이 유쾌해져. 우리 제법 잘 맞는 편이지 않나, 공녀?”

“…….”

“지금은 그대가 아무리 미친개처럼 날뛴다고 해도, 성인식을 치른 후에 가문에서 정해 주는 대로 혼인을 하는 것은 다른 영애들과 다를 바 없겠지.”

황태자는 단도를 품에 집어넣고 나를 직시했다.

“그러니 그냥 지금 나한테 와.”

“…….”

“나는 우리가 꽤 괜찮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보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평소처럼 씩 웃었다.

방금 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인데, 그 얼굴이 생경하게만 느껴졌다.

“이 빌어먹을 제국에서 서로 즐겁게 지낼 만한 안식처쯤은 되어 줄 수 있겠지.”

나는 뒤늦게 그의 말을 이해했다.

좀 전에 내게 청한 ‘교제’가 감정의 교류가 아니라, 복합적인 이유에서 탄생한 선택이라는 것을.

이것을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으로 바라보고 있는 나와 달리, 그는 냉정할 정도로 자신의 현실을 직시하고 있는 것이다.

‘하긴. 76%밖에 안 되는데 사랑은 얼어 죽을…….’

물론 76%나 되니 그가 내게 호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야 힘겹게 인정했다. 울렁거리는 이 낯선 감각들이 무엇인지.

나는 치밀한 계산 없이 대할 수 있었던 황태자에게 호감을 가졌다.

그도, 나도.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위가 위태로운 지금의 황태자에게 사랑 따위의 낭만적인 감정은 사치였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4%와 24%’

비교 대상조차 될 수 없다.

내게 가장 우선적인 것은 살아남는 것과 탈출이고, 그 고지가 이제 고작 2주 남은 상태였다.

노멀 모드의 여주와는 달리, 나는 실낱같이 피어난 호감을 붙들고 연애놀음이나 할 처지가 전혀 못 되었다.

혼몽했던 머리가 차가워지고, 점점 이성이 돌아왔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발끝을 타고 힘이 쭉 빠지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저는…….”

조금만 긴장을 늦췄다간 꼴사납게 비틀거릴 것 같았다.

나는 무너지는 몸을 추스르며 황태자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전하와 별로 그런 사이가 되고 싶지…….”

“황제 폐하 드십니다-!”

그때, 유리문 너머로 시종의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그와 동시에 황태자의 품에서 진동 음이 울려 퍼졌다.

“제기랄, 참을성이라곤 개나 준 세드릭 포터가 또 난리군.”

신경질적으로 반짝이는 수정구를 꺼내 든 그가, 어정쩡하게 서 있는 내게 빠르게 읊조렸다.

“얼마 후면 그대의 성인식이지? 지금 답하지 말고 그때까지 좀 더 고민해 봐. 그리고 성인식 날에 답변해 줘, 공녀.”

“아니요. 더 고민할 사항은 아닌 듯합…….”

“쉿.”

곧바로 거절의 말을 내뱉으려던 내 입을 황태자가 제 손바닥으로 틀어 막았다.

그리고 시뻘건 눈을 부리부리하게 빛내며 협박처럼 말했다.

“생일날에 차이면 너무 비참한 일이잖아. 안 그래?”

“우웁……!”

“선물은 고마워, 공녀. 그대는 시간 좀 두고 천천히 나오도록 해. 아직까지 이쪽에 관심 두고 있는 쥐새끼들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푸흡! 제 답변은 듣고 가세…… 전하!”

내 입을 틀어막던 손을 뗀 황태자가 채 붙잡기도 전에 커튼을 펄럭이며 전광석화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고요해진 테라스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졌다.

“하…….”

빠르게 멀어지는 황태자의 뒷모습을 응시하다가, 이내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커튼을 쳤다.

그의 말처럼, 시간을 좀 두는 게 좋았다. 그런데 홀로 남겨지니 불현듯 깊은 피로감이 들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만 나가 볼 때가 되었지만 나는 연회장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시 아무렇지 않은 척 가면을 뒤집어쓰고, 남주 놈들의 눈치를 보며 시시콜콜 말 거는 이들을 상대하고…….

엉망진창이 된 이 기분으로는 도저히 그 짓을 잘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냥 갈까?”

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충동이 들었다.

‘내가 왜 억지로 여기 남아 있어야 해?’

나는 죽지 않을 만큼의 호감도와 몰빵 남주만 신경 쓰면 됐다.

게임 속 배경인 귀족의 의무까지 번거롭게 지킬 이유가 없었다.

슬쩍 아래를 내려다보니, 1층이라 하기엔 약간 높지만 뛰어내리기는 충분했다.

‘가자.’

나는 더 생각할 것 없이 치마를 걷어붙이고 난간을 타고 올랐다.

아래로 뛰어내리기 직전, 공작의 얼굴이 머릿속에 스쳤다.

하지만 원래도 변덕이 죽 끓는 페넬로페에겐 알 바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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