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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46화 (14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6화

황제의 축사가 한창인 연회장 근처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나는 연회장 밖에 대기하고 있는 시종을 불러 마차를 빌려 탔다.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화려한 수도 거리를 얼마쯤 지켜보았을까.

마차가 멈췄다.

하지만 도착지는 저택의 현관 앞이 아닌, 멀리 떨어져 있는 대문이었다.

“공녀님, 더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마부가 쪽창을 열고 조심스럽게 고했다.

슬쩍 반대편 창문으로 내다보니, 문지기들이 굳건히 대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황궁의 문양이 그려져 있긴 했으나 주인이 없는 저택에 외부 마차를 함부로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 이다.

“문지기들에게 공작저의 마차를 불러오라고 할까요?”

“됐어. 수고했네.”

나는 마부에게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금화 몇 개를 건넨 후, 마차 문을 열었다.

“고, 공녀님?”

별다른 알림 없이 저택에 접근한 외부인의 모습에 경계 태세를 갖추던 병사들이, 마차에서 내려서는 나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째서 이 시각에 홀로…….”

의외의 인물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상급자가 능숙하게 나를 이끌었다.

“집사님께 전보를 드린 후 당장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소란 피울 것 없어. 문이나 열어.”

“하지만…….”

“산책할 겸 걸어갈 거야.”

대문에서 저택까지는 마차를 타고 이동할 만큼 거리가 꽤 있었다.

그러나 내 명령에 문지기들은 별수 없이 대문을 열었다.

끼이이익- 거대한 철문이 서서히 입을 벌렸다.

“저, 저택 앞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젊은 병사 한 명이 용기 내어 말을 걸었다.

나는 뒤늦게 사용인들의 태도가 이전과는 달리 매우 조심스럽고 극진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분이 좀 묘했다.

“아니, 따라오지 마.”

고개를 내저은 나는,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바로 움직였다.

환하게 불을 켜 둔 대문에서 멀어지자, 잘 닦아 놓은 길은 금세 어둠에 물들었다.

해질녘에 출발해 연회장에서 얼마 있지 않다 바로 돌아온 것 같은데, 어느새 온전한 밤이었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산책을 하고 싶다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혼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다시 계획을 세우기 위해서였는데…….

막상 몸을 움직이는 동안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꿈길을 걷는 듯 몽롱한 감각이 들었다. 이상했다.

그렇게 얼마쯤 걸었을까.

느리지만 부지런히 발을 놀린 덕분인지, 저 멀리 익숙한 저택의 모습이 보였다.

‘빨리 방으로 돌아가서 누워야겠어.’

생각 정리는 개뿔, 빨리 씻고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걸음이 빨라졌다.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 앞까지 한달음에 도달했을 때였다.

“삐요요-.”

어디선가 고운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새?”

나는 멈칫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삐요, 삐요오-.”

그러자 여기에 있음을 알리듯 또 한 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홀린 듯이 그 소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건물의 왼쪽 모서리를 막 돌았을 때였다.

“삐요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얼핏 진분홍색 깃털이 비쳤다.

나는 그쪽으로 다가갔다.

“삐요, 삐요오-.”

가까워진 나를 보고 새장 속의 새가 반갑다는 듯 날개를 퍼덕였다.

데릭의 집무실이었다.

“너였구나.”

어둠 속에서도 새의 보석안은 오색 빛을 발하며 찬연하게 빛났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창틀에 기댔다.

가까워진 내 얼굴에 새가 횃대에서 내려와 뒤뚱뒤뚱 걸어왔다.

그리고 ‘콕콕’ 쇠창살을 부리로 쪼은 후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쓰다듬어 달라는 표시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가져다대다가 망설였다.

괜히 지레짐작해서 쓰다듬으려 들다가 물리면 어쩐단 말인가.

“삐요오-.”

그러나 새가 재촉하듯 연신 부리로 찧은 후 제 머리를 들이밀었다.

창살 사이로 비죽 튀어나온 진분홍색의 화려한 머리 깃이 좀 웃겼다.

나는 결국 작게 미소 지으며 검지로 새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은지 새가 아까와는 다른 소리를 내었다.

푸드덕- 날개가 다시 한번 퍼덕였다.

“……답답하지 않니?”

방금 전까지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내 머리칼과 꼭 닮은 진분홍빛의 새.

누구보다 화려한 외양을 지닌 값비싼 몸이지만, 사실은 새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가끔가다 지나가는 인간들이 던져 주는 관심이나마 기뻐하며 받아먹고 사는 게…….

“사실 나는 답답해. 매 순간 숨이 턱턱 막혀.”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 갇혀 있는 나랑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여기서 탈출만 하면 끝이니까,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삐요요-.”

마치 내 말에 대답을 해 주듯, 새가 곧장 울었다.

나는 그 모습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두 손을 들어 얼굴을 파묻었다.

“하, 하.”

입 새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까 전 황태자가 떠나고 홀로 테라스에 남겨졌을 땐 차마 내뱉지 못한 자조였다.

게임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주제에, 뭔가를 기대하고 실망한 내가 너무나도 멍청하고 한심하게 느껴져서.

나는 아무도 보지 못하게 두 손으로 숨긴 후에야, 천천히 얼굴을 허물어뜨렸다.

매번 게임일 뿐이라고, 탈출하면 끝이니 신경 안 쓴다고 나 자신을 속였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매 순간 두렵고, 무섭고, 억울했다.

‘그 집구석에서 살던 때보다 더한 지옥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곳에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었다.

의식주부터 시작해서 간단한 말 한 마디조차 치열하게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했다.

여긴 게임이니까, 평판이 최악인 악녀에 빙의했으니까.

이미 그것을 넘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그런데 왜 하필 탈출을 며칠 앞둔 이제 와 자각한 걸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호감을 가진 상대가, 왜 하필 노멀 모드의 여주가 등장하면 돌아설 게임 속 남주인 걸까.

나는 감정이 있는 사람이라, 이 모든 걸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가 없었다.

가면을 뒤집어쓰고, 악착같이 계산하고, 나 자신을 다그치는 게 점점 힘에 부쳤다.

“하…….”

스스로를 비웃던 소리가 점점 울음 섞인 신음으로 들리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 무렵.

문득 너무나도 피곤하고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삐요오-.”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내가 이상했는지, 새가 창살을 부리로 ‘콕콕’ 두어 번 두드렸다.

그 순간이었다.

“……주인님?”

불현듯 낯익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두 손에 묻고 있던 얼굴을 들었다.

“……이클리스.”

환청은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검붉은 색의 호감도 게이지 바가 반짝였다.

얼마 떨어진 곳에서 몰빵 남주가 나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었다.

의외의 만남에 놀란 듯, 잿빛 눈동자가 살짝 커져 있었다.

고개를 든 나를 보고 그가 걸음을 움직였다.

저벅저벅-.

일정한 속도로 내게 다가오는 그를 멀거니 응시하던 나는, 아차 싶어 손으로 볼을 더듬었다.

묻어나는 물기는 없었다. 다행이었다.

그와 동시에 이클리스가 내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검술 수업에서 이제 돌아오니?”

전혀 웃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나는 기를 쓰고 입가에 미소를 만들어 냈다.

이클리스는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늦었구나.”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대충 얼버무렸다.

실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은 모습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클리스는 느리게 입을 벌렸다.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그냥.”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새를 구경하고 있었어.”

내 말에 이클리스의 시선이 슬쩍 옆에 있는 새장으로 옮겨졌다.

잠시 새장 안의 진분홍빛 새에 머무르던 잿빛 눈동자가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외출…… 하고 오신 거예요?”

그는 내 차림새에 의아한 기색이었다.

나는 뒤늦게 연회용 드레스에 풀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응.”

“…….”

“오늘 황궁에서 연회가 있었거든.”

황태자와 관련된 연회라는 말은 부러 하지 않았다.

그 누구라도 자신의 고국을 멸망시킨 주범의 이야기를 듣는다면 기분이 더러워질 테니까.

그러나 곧바로 들려오는 반문에 그 배려는 무용지물이 되었다.

“황태자의 생일 연회요?”

“……알고 있었니?”

“스승님도 참여하셨거든요.”

“그러니?”

나는 내심 놀라 눈만 깜빡였다.

‘그러면 오늘 수업은 없는 거 아닌가?’

의문이 머릿속을 스치던 찰나, 이클리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

“왜 주인님 홀로 돌아오셨어요?”

난 속이 좀 뜨끔해졌다.

남들의 눈에도 한눈에 보이는 건가 보다.

내가 홀로 몰래 돌아온 것이.

하기야, 모를 리 없었다. 진짜 주인들이 돌아왔다면 저택이 이토록 고요할 리 없을 테니까.

하지만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클리스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

나는 그냥 말없이 애매하게 웃었다.

그런데 그 순간.

이클리스의 눈매가 움찔거렸다.

“왜…….”

“……응?”

“왜 그렇게 웃으세요.”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름없이 밀랍 인형처럼 무미건조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장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 새끼들이 또 주인님을 슬프게 만들었어요?”

“무슨…….”

“공작가 인간들이나 다른 귀족들이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일순 멍해졌다.

저벅- 이클리스가 내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어두운 그림자에 잠겨 있던 그의 얼굴이 환한 달빛에 드러났다.

“그 새끼들한테 무슨 짓을 당하고 오실 때마다, 항상 그런 표정을 지으셨잖아요.”

그의 얼굴이, 또다시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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