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47화 (14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7화

나는 그에게서 처음 듣는 과격한 언행에,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벙해 있는 것도 잠시.

“이번엔 또 어떤 새끼예요? 소공작? 두 번째 놈? 아니면 에카르트…….”

“이클리스!”

이어지는 폭언에 나는 황급히 그를 막아섰다.

“그런 거 아니야.”

“…….”

“나는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새장 속에 갇힌 새를 보니 조금 지쳐서 그랬다. 그뿐이다.

그런데 이런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이클리스의 눈매가 흐려졌다.

“……저도 보고 듣는 것이 있어요, 주인님.”

“그게 무슨…….”

“저를 경매장에서 데리고 온 이유가, 주인님의 처지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다고요.”

다행히 이번 말은 별로 놀랍지 않았다.

이클리스가 공작저에서의 내 위치를 꿰뚫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놀라움 대신 이번에는 걱정이 찾아왔다.

그 ‘가짜 공녀’의 처지가 지난번처럼 또다시 그의 호감도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발생할까 봐.

그래서 그가 이토록이나 처량 맞아 보이는 내 모습에 분노한 건가 싶어서.

“내 처지 때문에…… 혹시 누가 또 널 괴롭혀?”

“그런 게…….”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클리스가 별안간 주먹을 아득 쥐었다.

그는 한차례 크게 호흡을 한 뒤 찬찬히 답했다.

“……그때 이후로 그런 일은 없었어요.”

“…….”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앞에서 왜 그렇게 홀로 서 계시는 건지 여쭤보는 거예요.”

‘그 말이……?’

‘누가 괴롭혔냐’와 ‘왜 혼자 서 있는 것이냐’.

전혀 같은 질문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나는 이내 수긍했다.

불쑥 방금 전의 내 모습이 그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새 앞에서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신음 같은 헛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으니, 퍽 처량 맞아 보일 수도 있겠다.

‘오히려 동정심을 산 건가?’

혹여 이클리스가 말한 ‘그 새끼’들 중 한 명이 그를 괴롭히는 걸까, 노심초사하던 마음이 사라졌다.

나는 한결 편안해진 목소리로 답했다.

“새가 이뻐서 잠시 구경하다가, 피곤해서 그랬어.”

그 모습을 들킨 것이 좀 창피했지만, 완전히 납득 못할 만한 변명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클리스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그러다 한참 후, 뜬금없는 것을 물었다.

“주인님은 지금, 행복하세요?”

“……뭐?”

“공작저에 오기 전보다…… 더 행복하세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가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너는 공작저로 오고 나서 더 불행해졌니?”

“……아니요. 그럴 리가…….”

이클리스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주인님.”

“그럼 그런 건 왜 물어?”

“그냥, 알고 싶어요. 주인님은 어떠셨는지.”

내게 시선을 못 박은 채 그가 대답을 종용했다.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글쎄…….”

나는 말끝을 흐렸다.

‘행복한가?’

모르겠다. 이곳에 들어온 후의 기분을 떠올리자면 행복보다는 불행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불행하기만 하느냐. 또 그건 아니었다.

탈출구가 있는 이상, 이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불행과 좌절에 언제까지고 잠식되어 있는 성격이 못 되었다.

보라.

방금 전에 깊은 피로를 느꼈음에도, 나는 어느새 가면을 뒤집어쓰고 미소 짓고 있었다.

“딱히 생각해 본 적 없어서 모르겠는데. 넌 어때 보여?”

평소의 나답게,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이클리스의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주인님은…… 가끔 아무렇지 않으신 것 같다가도, 누구보다 불행한 것 같아요.”

“……그래?”

“그리고 때론…… 어딘가로 사라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여요.”

나는 이어지는 그의 말에 소름이 끼쳤다.

‘혹시…… 내가 사라질 걸, 눈치챘나?’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감이 좋은 그는 은연중에 무언가를 감지한 걸지도 모른다.

가슴이 덜컹거렸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잘못 본 거야, 이클리스. 내가 널 두고 어디로 사라지겠니.”

“…….”

“난 괜찮아. 그냥 조금 피곤한 것뿐이야.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나는 별일 없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탈출하기 전까지, 그에겐 그 어떤 불안도 심어 주면 안 된다.

“차라리 저랑 같이 이곳을 나가요, 주인님.”

그러나 들려 온 말은 조금 전 그가 이유 없이 화를 내던 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이었다.

“뭐…… 뭐라고?”

“저랑 도망가요.”

“이클리스. 너…….”

“타국으로 망명할 예정인 노예들이 있어요.”

“…….”

“항구 쪽에서 노역하는 델만인들을 통해 며칠 후에 밀항할 계획이에요. 그러니 그 일행 틈에 껴서…….”

“…….”

“제국 밖으로 같이 가요, 주인님.”

나는 너무 당황해서 말을 잃었다.

그저 저보다 사정이 안 좋은 고국인들에게 도움이나 주는 줄 알았지, 이런 엄청난 일을 계획하고 있는 줄은 몰랐다.

그가 늦게 귀가한다는 보고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쪽을 싸하게 만들었던 불안감이 현실로 나타났다.

“……너도 그러려고 했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입을 뻐끔거리던 중, 문득 처참한 배신감이 목구멍까지 치올랐다.

“날 속이고, 너도 타국으로 가려고 했어?”

“아, 아니에요, 주인님.”

다그치듯 묻는 내 목소리에 그가 동그래진 눈으로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러려던 게 아니에요.”

“그러면 나한테 왜 그런 말을 해, 이클리스.”

“주인님이 그러고 싶어 하시는 거라고 제가 마음대로 착각했어요, 죄송해요.”

그의 말에 눈앞이 아연해졌다.

나를 보고 멋대로 그런 추측을 해 왔다는 게 황당하게 느껴졌다.

그러는 와중에도 저절로 머리가 팽팽하게 돌아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이클리스와 단둘이 도망가서 남은 호감도를 올리고 탈출한다.’

하드 모드에 진짜로 이런 루트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면, 도주에는 수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제 2주 남짓. 그의 호감도는 96%에 육박했다.

지금까지처럼 저택에서 편안히 그를 불러 마주하는 것과 따라붙는 수많은 병사들을 피해 항구까지 필사적으로 이동하는 것.

후자를 택하면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실히 올릴 수는 있겠지만, 다른 남주들의 호감도를 장담할 수 없었다.

특히 이제야 내게 마음을 조금 연 것 같은 레널드와 에카르트가가 역모에 휘말릴 것을 우려하던 데릭.

둘의 호감도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핏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찬란한 황금빛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이클리스.”

결론을 내린 나는, 그때까지도 빤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이클리스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말은 어디 가서 함부로 입 밖에 내뱉으면 안 돼. 설령 내 앞에서라도.”

“……주인님.”

“난 네 주인이기 전에 제국의 귀족이자, 이 나라의 하나뿐인 공녀야.”

이클리스의 입이 자그맣게 달싹였다. 끝내 아무 말도 내뱉지 못했지만.

그의 눈이 차차 실망으로 물드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별수 없었다.

고작 4% 남은 상태에서, 나는 과한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네 편의를 봐줄 수 있는 것도 내가 이 자리에 있기 때문이야. 그 이상은 안 돼. 선을 넘지 마.”

다소 냉정한 내 말에 이클리스가 꽉 막힌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낱 하인조차 주인님을 괄시하고 무시하는 곳의 이름뿐인 자리요?”

“이클리스.”

“어떤 귀족이 호위 하나 없이 연회장에서 혼자 돌아와요.”

그의 턱이 두드러질 만큼 단단해졌다.

그는 정말로, 내 처지가 안쓰러워서 도망을 권한 듯했다.

나는 그가 이토록 나를 안쓰럽게 여긴다는 사실이 좀 신기하면서도, 그것이 모두 호감도에 기인한다는 것이 섬뜩하게 느껴졌다.

내가 탈출하면, 어차피 노멀 모드 여주의 차지가 될 남주인데…….

‘……그런데 하드 모드가 끝나고 노멀 모드가 시작되면, 페넬로페를 향한 남주들의 기억이나 호감도는 어떻게 되는 거지? 전부 설정값으로 리셋되는 건가?’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한 번도 하드 모드의 엔딩을 깨지 못했기에 그 이후가 어떻게 되는지, ‘히든 엔딩’의 내용이 뭔지 전혀 몰랐다.

물론 엔딩을 보고 내가 현생으로 돌아간 후에 일어날 일들은 내 알 바 아니었지만…….

이클리스의 정수리 위, 선명한 검붉은색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차라리 저라도 데리고 다니세요.”

불쑥 이클리스의 말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생각을 끊었다.

나는 퍼뜩 현실로 돌아왔다.

“제가 노예라서, 황궁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서 그래요?”

“그건…… 오늘은 가족들과 다 함께 마차를 타서 별수 없었어.”

“가족이요?”

내 변명에 이클리스의 눈매가 미세하게 움틀거렸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주인님의 가족…….”

“그만.”

나는 자꾸만 도를 넘는 이클리스를 단호하게 막아섰다.

“진정하렴.”

나는 또다시 반박하려는 그에게 한 쪽 손을 뻗었다.

손바닥에 따뜻한 온기가 닿았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흥분한지는 모르겠지만 마차에서도 황궁에서도, 아무 일도 없었어.”

뺨을 살살 쓰다듬으며 잔뜩 흥분한 이클리스를 달랬다.

애교를 부리는 강아지처럼, 이클리스가 금방 몸에서 힘을 빼고 내 손바닥에 얼굴을 기댔다.

“……손이 차요.”

“밖에 오래 있었으니까.”

“돌아올 땐 마차조차 타고 오지 않으신 거죠.”

“그건…….”

손이 찬 이유를 간파당한 탓에 잠깐 당황하던 나는, 바로 목소리를 다잡았다.

“별거 아니야. 내가 산책하겠다고 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러면 저를 사 오시지 마셨어야죠, 주인님.”

“…….”

“제가 신경 쓰게 만들지 마셨어야죠.”

“……이클리스.”

“……저를 주인님의 하나뿐인 기사로 삼지 마셨어야죠.”

내 손에 진득하게 뺨을 비비던 이클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윽고 보드라운 피부가 아닌, 촉촉하고 몰캉한 감촉이 닿았다.

촉-.

“이미 늦었어요.”

내 손바닥에 입을 맞추면서도, 이클리스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