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8화
손바닥을 간질이는 감각에 나는 잠시 숨 쉬는 법을 잊었다.
내가 먼저 이클리스에게 접촉한 적은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그가 이토록이나 노골적으로 내게 애정 표현을 한 적이 있던가.
‘한 번도.’
자주 와 달라며 칭얼댄 적은 많았지만, 단 한 번도 내게 먼저 손을 뻗은 적은 없었다.
놀란 눈으로 그를 응시하던 나는, 천천히 한숨 같은 호흡을 내쉬었다.
갑작스러웠으나, 놀랄 일도 아니었다.
‘96%면 충분하긴 하지.’
노멀 모드에서도 신분 제약 때문에 만남과 스킨십이 퍽 늦었던 것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볼 근처가 따가웠다.
고개를 드니 여전히 내게 못 박혀 있는 맹목적인 시선에, 손가락 끝이 약간 찌릿했다.
오싹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 기묘한 느낌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이제 내 탓을 하는 거니? 발칙하구나.”
“…….”
“네게 중요한 건 내 불행이나 기분에 관한 것이 아니야.”
여전히 내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 있던 이클리스는 한참 후에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그럼요?”
“지금 해야 하는 일에만 집중하렴.”
“제가 해야 하는 일이요?”
“그래. 네 말대로 넌 내 하나뿐인 기사잖아. 누구보다 강해져서 나를 지켜 줘야지.”
“…….”
“내겐 너뿐이야, 이클리스.”
그 순간, 회갈빛 동공에 번뜩 이채가 서렸다 사라지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가 느리게 팔을 들어 제 뺨에 가져다 댄 내 손을 덮었다.
서늘한 손등 위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나는 기세를 몰아 그에게 명령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르게 절박한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내 옆에 있어.”
내가 탈출할 때까지.
망명 같은 생각 하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그래 줄 거지?”
“…….”
“응?”
내 재촉에 이클리스는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저는…… 주인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
“…….”
“그렇지만…… 주인님이 더는 주인님을 괴롭히는 인간들 때문에 슬퍼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나는 괜찮아.”
“진짜 괜찮아지실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여러 번 맹세하듯 속삭이는 목소리에 수런거리던 마음이 차차 가라앉았다.
‘그래. 남주가 날 두고 떠날 리 없지.’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깜빡이는 검붉은 색의 호감도 게이지를 바라보며 찬찬히 선택했다.
〈SYSTEM〉 [14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자금 : 28,000,000골드)
훅 줄어드는 ‘남은 보유자금’에 식겁했다. 하지만 그것은 찰나였다.
[호감도 98%]
“……이클리스.”
2%.
‘드디어.’
불현듯 목이 꽉 메었다. 나는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내게…… 더 할 말은 없니?”
그러자, 꽈악-.
그의 볼에 가져다 댄 손가락을 압박하는 강한 힘이 느껴졌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잠시 주저하다가, 이윽고 확신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그렇게 만들어 드릴게요, 주인님.”
내가 바라는 답변은 아니었다.
나는 스멀스멀 타고 오르는 실망과 초조함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아직 100%가 채워지지 않아서 그래.’
이제 성인식까지 1주 조금 넘게 남은 시간.
그 안에 조금만 더 노력하면, 남은 2%와 사랑한다는 고백을 쟁취할 수 있지 않을까.
다시 [호감도 확인하기]로 바뀐 머리 위 글씨를 멍하니 응시하며 그런 생각에 빠질 즈음.
“제가…… 그렇게 해 드릴게요.”
* * *
이클리스는 혼잣말처럼 재차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다음 날, 공작은 의외로 아파서 연회장에서 먼저 나갔다는 내 변명을 순순히 납득했다.
이미 페넬로페가 워낙 빈번하게 저지르던 일이어서 그런 듯했다.
- 그래도 앞으로 간다고 말은 하고 가거라. 쯧, 이제 성인식이 코앞인 녀석이 언제까지 그렇게 어린아이처럼 굴게야.
하지만 못마땅함이 가득 담긴 잔소리는 피할 수 없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이클리스를 최대한 자주 찾았다.
하지만 2% 남은 호감도는 도통 올리기가 어려웠다.
막바지에 이르러서일까.
때론 선물을 안겨 주고, 때론 혀에 꿀을 바르고 듣기 좋은 말을 속삭여도.
호감도를 확인할 겸 부드럽게 몸을 만지고 쓰다듬어도, 그는 조금 짙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게다가 매일 있는 수업이 만남을 방해했다.
호감도를 위해 붙여 준 검술 스승인데, 점점 거슬렸다.
- 오늘은 수업 땡땡이치고 같이 놀러 갈까?
하루는 작정하고 달큼한 목소리로 구슬렸다.
그러나 곧바로 난감해지는 표정과 깜빡이는 호감도 게이지 바에 얼른 농담이라며 말을 바꾸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무척이나 관조적인 태도였던 이클리스는, 어느새 검술을 그토록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게임 스토리의 원 궤도였다.
그렇게 기를 쓰고 그를 찾아가, 간신히 [호감도 99%]를 얻어냈을 땐 성인식이 고작 6일 남은 시점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100%’로 오르지 않자, 나는 점점 초조함을 숨기기 어려웠다.
‘하…… 100%는 그렇다 쳐도, 대체 사랑한다는 말은 어떻게 유도하지?’
나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를 붙들고 깊은 고뇌에 빠졌다.
노멀 모드에서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고백 루트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100%를 꽉 채우지 않아도, 하얀 게이지 바가 진한 핑크색으로 변하여 고백 각이 섰음을 알렸다.
“맞다.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지.”
나는 호감도를 채우기 급급해 깜빡 잊고 있던 설정 하나를 떠올렸다.
‘호감도 게이지 바의 색깔.’
그랬다. 고백 루트가 진행되면 노멀 모드에서의 호감도 게이지 바도 일시적으로 색이 변하긴 했다.
내가 지금 몸소 겪고 있는 하드 모드처럼 제각각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중요한 걸까?’
나는 지금까지 게이지 바의 색을 딱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목숨과 직결되는 호감도가 훨씬 더 중요했기 때문에.
하지만 이클리스 루트의 엔딩을 앞둔 지금.
그의 머리 위에 동동 떠다니는 ‘검붉은 색’이 새삼 걱정이 됐다.
‘설마…… 검붉은 색이 뭐, 제국에 대한 복수심으로 죽음을 뜻하고 이런 건 아니겠지?’
나는 연신 ‘에비, 에비!’하고 고개를 내저으며 끔찍한 생각을 털어냈다.
그렇다면 99%에 육박한 호감도가 설명되지 않았다.
‘1%…… 대체 어떻게 올려야 하는 거야. 그 미친놈처럼 입술이라도 막 들이밀어야 하는 거냐고.’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고 있던 때였다.
똑똑-.
“아가씨, 펜넬입니다.”
집사의 방문이 나를 일깨웠다.
저녁 식사 시간이 꽤 지난, 다소 늦은 방문에 좀 놀랐다.
“……들어와.”
떨떠름하게 허락하자, 이내 문이 열리고 집사가 안으로 들어섰다.
공손히 인사한 그는 곧장 방문 사유를 밝혔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내일 아침에 가볍게 조찬을 같이하자고 전하셨습니다.”
“……조찬?”
“예. 귀족 회의 때문에 최근 퇴궁이 늦어져서, 아무래도 석찬은 힘들 것 같다고 하십니다.”
나는 갑작스러운 소식에 의아한 얼굴을 하다가, 덧붙여지는 말에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당연히 내가 맞춰야지. 일찍 일어나 준비하겠다고 전해 드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해.”
“아, 그리고…….”
할 말을 전한 이후에도 집사는 나가지 않고 주저했다.
“……황궁에서 또 편지가 왔습니다, 아가씨.”
무심하게 책 페이지를 넘기려던 손이 일순 멈칫했다.
“연회 초대장인가?”
“아닙니다. 이번에는 황태자 궁에서 일하는 시종을 통해 직접 전달을…….”
“불태워.”
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몸이 좋지 않아서 요양 중이라고 적당히 둘러대.”
“……예, 알겠습니다.”
집사는 머뭇거리며 답했다.
대답까지의 짧은 간격이 문득 숨 막히게 느껴졌다.
탁-. 나는 결국 읽으려던 책을 거칠게 덮고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그런 건 앞으로 물을 것 없이 집사가 좀 알아서 해 줘.”
집사는 내 불편한 심기를 알아차린 듯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 후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