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49화
* * *
다음 날 이른 아침이었다.
나는 전날, 집사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일찍 일어나 식당으로 향했다.
잠이 덜 깬 상태임에도 머릿속이 분주했다.
아침을 먹고 공작을 배웅한 뒤, 수업 가기 직전의 이클리스를 만나려면 꽤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급하게 계획을 다 세우기도 전에 식당에 도착했다.
“보수 공사 이후론 처음 오시죠, 아가씨.”
나를 데리러 온 집사가 인사차 물었다.
그의 말이 맞았다. 원래도 방에만 틀어박혀 밥을 먹었던 나였지만, 보수 공사 때문에 식당 근처에는 얼씬도 한 적이 없었다.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이윽고 집사가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 펼쳐진 공간은, 대체 뭘 보수하려고 이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완전히 딴판이 되어 있었다.
‘오…….’
놀라울 정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이곳저곳 배치되어 있는 큼지막한 꽃들과 금칠의 향연.
얼핏 보면 어지럽고 정신없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생각보다 조화로웠다.
디자인에 제법 신경을 쓴 것 같았다.
별천지 같은 내부를 쭉 훑어보던 중, 문득 눈에 띄는 꽃이 보였다.
식당 내부를 가장 많이 장식하고 있는 꽃이었다.
‘저건…….’
탐스러운 살굿빛의 장미 넝쿨.
- 디 엘런윅 로즈다.
일전에 보수 공사로 인해 온실에서 오찬을 들었을 때였다.
레널드의 시비를 피하기 위해 대충 둘러댔던 화목에 공작이 관심을 가지며 대답해 주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처음으로 공작이 내게 별다른 목적이나 이유 없이 말을 걸었던 것 같다.
‘그냥 저 꽃이 좋았나 보지.’
나는 또 거북하리만치 울렁거리기 시작하는 속을 필사적으로 내리누르며, 애써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과한 의미 부여는 후폭풍을 가져오기 마련이다.
다행히 내부가 완전히 뒤바뀐 덕분인지, 이전에 음식을 앞에 두고 쫄쫄 굶어야 했던 악몽이 떠오르진 않았다.
오크 나무로 만들어진 이전의 것과는 달리, 호화스러운 대리석 식탁에는 이미 모두가 착석해 있었다.
가장 상석에 앉아 있는 공작이 인사했다.
“왔구나.”
“좋은 아침이에요. 아버지, 오라버니들.”
“좋은 아침은 얼어 죽을. 일찍 일찍 안 다니냐?”
겨우 몇 분 늦은 걸로 분홍 머리가 시비를 걸었다.
“스읍, 레널드.”
“틀린 소리도 아니잖아요. 쳇! 아버진 맨날 저한테만 뭐라 그래.”
공작이 눈을 부라리자, 공포의 주둥이가 닫혔다.
데릭은 평소와 같이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몇 번 겪었다고 이젠 제법 익숙해져서, 인사를 무시당해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들자꾸나.”
이른 아침 시간대라는 것을 빼곤,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식사 자리였다.
호화롭고 고요한 식당 안에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간간이 울려 퍼졌다.
“……이제 며칠 후면 네 생일이로구나, 페넬로페.”
조찬이 한창 무르익었을 무렵, 불쑥 공작이 말을 걸었다.
체할 것 같은 주제였지만 애써 싱긋 웃으며 답했다.
“네, 벌써 그렇게 됐네요.”
“성인식 준비는 잘돼 가고 있느냐?”
“제가 뭐 할 게 있나요. 집사와 하녀장이 고생이죠.”
정말로 나는 아무것도 하는 게 없었다.
그나마 하는 거라곤 최상의 피부와 몸매를 만들기 위해 매일 목욕 시간마다 하녀들에게 마사지를 받느라 시달리는 것뿐.
그것도 적응되니 무시하고 자는 경지에 이르렀다.
“성인식을 맞이해서, 뭐 가지고 싶은 건 없느냐?”
그때, 불쑥 공작이 물었다.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음…… 딱히 없어요.”
이미 성인식을 대비하여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거창하게 맞춘 후였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공작이 들어 줄 수 없는 것이었다.
“야, 튕기지 말고 사 준다고 할 때 말해.”
무슨 하나의 관례처럼, 레널드 놈이 기다렸다는 듯 빈정거렸다.
“내 성인식 때 아버지한테 마법 요트 받은 거 보고 부러워 죽으려고 했잖아?”
“아, 그거.”
매일 목욕 시간을 하녀들과 함께 하는 것이 무작정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주워들을 우스운 얘기들이 꽤 많았기에.
“너 그거 자랑한답시고 알테스 강에 끌고 나가 놓고 제대로 못 몰아서 전복됐었다며?”
비죽 웃으며 얼마 전 들은 것을 낱낱이 까발리자,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누, 누, 누가 그래?! 그건 사고였다고!”
“크흠, 한심한 놈.”
“허? 왜 웃어요, 아버지! 아, 아니라고요!”
레널드가 공작을 향해 허겁지겁 외쳤다. 하지만 딱히 의미는 없었다.
나는 놈이 아니라고 구시렁거리며 난리를 치는 틈을 타 공작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냥.”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이른 아침, 인사하러 와 주실 수 있으세요?”
“인사?”
“네.”
다소 뜬금없는 말에 의아하게 쳐다보는 공작을 향해, 나는 느리게 말 문을 열었다.
“……철없던 어린 딸과의 작별 인사요.”
“그게 무슨 소리냐, 페넬로페. 작별 인사라니.”
“저도 이제 어엿한 성인이 되는 거잖아요. 부끄러운 과거는 잊고 성인식 이후부턴 성숙한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어요.”
나는 그 성숙함을 흉내 냈던 딸과의 마지막 인사라는 말을 숨기고 태연히 말을 마쳤다.
“네가 언제 이렇게…….”
퍽 낯선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공작의 푸른 눈이, 서서히 따스함으로 물들었다.
“그래.”
“…….”
“내 꼭 아침에 인사를 하러 가마.”
공작은 거듭 약속했다.
이번 거짓말은, 꽤 쓰고 힘겨웠다.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간질거리는 감정에서 가까스로 고개를 돌려 외면할 때였다.
끼익-.
느닷없이 식당 문이 열리더니, 집사가 성급한 몸짓으로 들어섰다.
그는 한달음에 공작이 앉아 있는 상석까지 도달했다.
“공작님, 잠시 현관으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늙은 집사의 낯빛이 그 어느 때보다 좋지 않았다.
공작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크흠. 모처럼 가족끼리 다 함께 식사 중이지 않은가, 집사. 급한 일이 아니면 나중에 다시 얘기함세.”
“그게…….”
난처한 얼굴로 망설이던 집사가 이내, 허리를 숙여 공작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식사를 방해받은 것에 불쾌함을 내비치던 공작의 얼굴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갔다.
마침내 말을 마친 집사가 상체를 세웠다.
그 순간, 끼이익-!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당-!
그 바람에 의자가 뒤로 거칠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다급하게 식당을 빠져나갔다.
집사가 서둘러 그 뒤를 따라갔다.
나는 물론이고, 데릭과 레널드도 영문을 모른 채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끼이익-.
그때, 데릭마저 의자를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가 봐야겠구나.”
그 한 마디를 내뱉은 후 그는 미련 없이 식당을 나갔다.
“아씨, 밥 먹다가 뭐야…….”
레널드가 신경질적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편지 무시했다고 황태자 놈이 또 찾아온 건 아니겠지?’
불현듯 끔찍한 가정이 떠올랐다.
그 미친놈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법한 이야기였다.
만약 그렇다면 한 번 당한 전적이 있는 공작이 저렇게 헐레벌떡 뛰어나갈 만도 했다.
‘미친놈! 아프다니까 대체 왜 그래!’
오만상을 찌푸리며 진저리를 치자, 레널드가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흘겼다.
“야, 뭐 하냐? 우리도 가 보자고. 일어나.”
“어, 어. 응…….”
레널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같이 나가기를 종용했다.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가서 또 황태자 놈의 면상을 보고 수습할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나는 식당을 나서는 레널드의 뒤를 미적거리며 따라갔다.
긴 복도를 지나고, 마침내 중앙 계단이 보일 무렵이었다.
문제가 생겼다는 집사의 말답게 저택의 현관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사이로 한 인영이 우뚝 서 있었다. 장신의 남자였다.
활짝 열린 커다란 문 사이로, 이른 아침 공기를 담은 서늘한 바깥 냄새가 났다.
‘설마가 사람 잡는 거 아니야?’
나는 여전히 미간을 잔뜩 구긴 채 걸음을 빨리했다.
응접실을 지나 공작과 집사, 데릭과 레널드가 우뚝 서 있는 곳에 막 이르렀을 때.
예상했던 황금빛 머리칼 대신 보이는 누군가의 모습에, 나는 더없이 눈을 크게 떴다.
“……이클리스?”
저택의 현관 앞에 우뚝 서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내 몰빵 남주였다.
내 부름에 그가 슬쩍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언제나 무미건조했던 잿빛 눈동자에 일순 파문이 일었다.
“네가 이 시간에, 여기 왜…….”
문득 이유 없이 가슴이 철렁했다.
엄마가 죽기 하루 전에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기이함.
그것이 벼락처럼 전신을 훑고 지나갈 무렵.
“저…….”
이클리스의 등 뒤에서 자그마한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아버지.”
“…….”
“오라버니…… 들.”
레널드와 똑 닮은 사랑스러운 분홍색 머리칼.
에카르트의 핏줄임을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푸른색 동공.
“저…… 이본이에요.”
성인식을 5일 앞둔 어느 날, 이른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