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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50화 (15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0화

렉이라도 걸린 것처럼, 사고가 정지했다.

나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클리스의 뒤에서 튀어나온 자그마한 체구의 여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여자의 한쪽 이마에 거즈가 붙어 있었다.

지난번 솔레일 섬 지하에서 내가 쓴 마법에 의해 다친 흰색 로브 여자처럼.

‘……거짓말이지?’

레일라 잔당의 우두머리가 여주인지 아닌지, 그것은 내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이 아직 성인식 전이라는 것뿐.

아직 성인식이 아니었다.

아직 성인식까지 5일이나 남은 상태였다.

‘……왜?’

나는 이본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이클리스를 돌아보았다.

놈은 처음부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기라도 하듯.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내 곁에 남아 나를 위해 주겠다고 말했던 몰빵 남주였다.

공작가 인간들에게서 더는 내가 슬퍼하지 않도록 해 주겠다고.

내가 행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그런데 왜?’

왜? 대체 왜?

왜? 왜? 왜?

왜지?

물음 하나만이 머릿속을 점령했다.

내가 점점 거칠어지는 숨을 간신히 고르는 사이, 현관 앞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한 마디도 꺼내지 않는 공작가 일가에, 여주의 사랑스러운 얼굴이 점점 울상으로 변해 갈 무렵.

“……레널드, 페넬로페.”

공작이 정적을 깨트리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은 그만 방으로 돌아가 있거라.”

“아버지!”

나보다 먼저 레널드가 반응했다.

그러나 ‘스읍’ 하고 주의를 주는 공작의 기세에 입을 다물었다.

명령에도 움직이지 않는 나를 그가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이른 아침, 폭탄이 떨어진 것처럼 정신이 없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인 듯했다.

내가 돌아가지 않았음에도 공작은 이본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너는…….”

그 순간을 나는 똑똑히 보았다.

언제나 냉철하다는 에카르트 수장의 얼굴이, 지독한 그리움과 슬픔으로 일그러지는 것을.

“나를 잠시 따라오거라.”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양 공작은 이성을 다잡고 말했다.

“지금까지 외형을 속이고 찾아온 자들은 무수히 많았다. 네가 진짜 내 딸이 맞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시험을 거쳐야 하지.”

“……시험이요?”

여주의 푸른 눈이 흔들렸다. 그 모습이 누구보다 가련하고 청순했다.

당연하게도 게임에서 여주는 그 ‘몇 가지 시험’을 모두 통과했다.

죽은 공작 부인의 물품을 알아맞히거나, 저택의 구조와 점과 같은 신체 특징이었다.

모두 당사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것들이라, 지금까지 공녀 자리를 노리고 접근한 그 누구도 통과하지 못했다.

“하지만 만일 거짓임이 들통나면 귀족 능멸 죄로 사형에 처할 수도 있다.”

공작이 엄중히 경고했다.

“어떻게 할 테냐. 이래도 날 따라오겠느냐.”

“아직 기억을 다 온전히 찾은 것은 아니지만…….”

여주는, 성인식 당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해 볼게요.”

게임과 똑같이 답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결연한 얼굴로 끄덕이는 이본에게서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 공작이 이내 데릭에게 명했다.

“그리고 데릭.”

“예.”

“이놈을 지하에 가둬 놓거라. 어떻게 된 일인지 심문을 해야겠다.”

데릭은 곧장 이클리스에게 다가갔다.

“잠깐만요!”

이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나는 다급히 공작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나보다 이본이 한발 앞섰다.

“이, 이클리스는 왜요? 저, 저를 도와준 사람이에요. 제가 시험을 치를 테니,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애처롭게 공작을 보고 호소했다.

그러나 공작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건 네 소관이 아니다. 저놈은 우리 가문에 입적된 견습 기사니까.”

“그, 그렇지만…….”

“분명 허락 없는 외출이 불가할 터인데, 이 애를 어찌 데리고 온 건지 낱낱이 알아봐.”

공작의 명령에 데릭과 내 얼굴이 동시에 난처함으로 물들었다.

“끌고 가지 마세요.”

이본의 입이 다물리자, 나는 그제야 앞으로 나섰다.

“정확히는 제 호위 기사이니 제 소관이죠.”

“페넬로페.”

공작과 데릭이 문득 내 외침에 고개를 돌리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아직도 이 자리에 있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한 눈치였다.

“할 얘기가 있어요.”

머릿속이 핑핑 돌았다. 하지만 당장 나는 물어야 했다.

“페넬로페!”

나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한달음에 이클리스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여주가 그런 나를 묘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런 것 따위 개의치 않은 채 불쑥 팔을 뻗었다.

그리고 멱살을 쥐듯 놈의 옷자락을 와락 틀어쥐었다.

“……너.”

그 순간이었다.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겠습니까?

[1800만 골드 / 명성 400]

나는 곧장 [1800만 골드]를 연타했다. 그러나.

〈SYSTEM〉 보유자금 부족!

(남은 보유자금 : 12,000,000골드)

곧장 바뀌는 흰 글씨.

나는 가까스로 이성을 유지한 채 [명성 400]을 다시 선택했다.

〈SYSTEM〉 명성 부족!

(명성 total : 360)

알고 있었다. 나는 놈의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해 이미 남은 돈도 명성도, 망설이지 않고 다 사용했다.

금방 100%를 찍을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게다가 집사에게 마법 가공된 에메랄드의 판매가 개시됐다는 소식을 전달받았기에 상관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멍청한 판단이 이렇게 돌아올 줄 알았더라면…….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자,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악을 쓰고 싶은 폭력적인 감정이 치밀어 올랐다.

아득-. 이클리스의 옷깃을 쥔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리던 그 순간.

“페넬로페! 그만 물러서거라.”

공작이 내게 두 번째로 주의를 줬다.

정신을 차리자, 제 멱살을 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잿빛 눈동자가 보였다.

놀랐는지 조금 커다래진 상태였다.

“……주인님.”

“너…… 왜?”

나는 병신처럼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왜 진짜 공녀를 데리고 온 거냐고. 왜 나를 배신했냐고 물을 수는 없어서.

“왜?”

나는 그래서 그 말만을 반복했다.

이클리스의 동공에 비친 내 얼굴이 처참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그런 나를 무감각하게 내려다보다가,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록 저는 패전국의 노예이지만, 에카르트 가문에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가문에서 공녀님을 애타게 찾는 것을 알고 있어, 차마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하, 하…….”

마치 제가 혁혁한 공이라도 세운 사람처럼 말하는 이클리스의 대답에, 기가 찬 실소가 새어 나왔다.

속에서 부글부글 천불이 들끓었다. 나는 눈이 뒤집히는 경험이 어떤 건지 절실히 체감했다.

“……지랄 마, 이 미친 새끼야.”

이를 악문 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가 입은 은혜는 에카르트 가문이 아닌, 나로부터 나온 거겠지! 널 그 빌어먹을 경매장에서 사 온 게 나니까-!”

멍청한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알면서도,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을 수 없었다.

손이 휙 위로 쳐들렸다. 놈의 뺨을 거세게 올려붙이기 직전.

“페넬로페!”

공작이 벼락같이 호통쳤다.

“집사! 페넬로페를 그만 데리고 올라가.”

“아니요! 전 아직 할 말 남았어요.”

“페넬로페 에카르트.”

이번에는 데릭이 얼음장처럼 서늘하게 나를 불렀다.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알아본다지 않느냐.”

“그러니까 저도 제 호위 기사에게 어찌 된 일인지 영문을……!”

“어린애도 아니고, 매번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언제까지 네가 악을 쓰는 꼴을 봐줘야 하지?”

놈의 눈빛에 지긋지긋함이 떠올랐다.

꼭 ‘진짜 공녀’가 나타나 질투로 악을 쓰는 ‘가짜 공녀’를 바라보는 듯했다.

놈뿐만이 아니었다.

공작, 레널드, 집사.

그리고 소란스러움에 구경을 나온 다수의 사용인들까지.

나는 그들을 두려움에 질린 눈빛으로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검붉은 색, 주황색, 연분홍색.

남주 놈들의 염병할 호감도 게이지 바가 하나같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가씨, 그만 가시지요.”

집사가 무거운 음성으로 나를 불렀다.

이클리스를 내려치기 위해 높이 올라간 손이 서서히 내려갔다.

이 와중에도 나는 놈들의 호감도 폭락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멱살을 쥐고 있던 손아귀의 힘이 스르륵 풀렸다.

나는 여전히 이를 악문 채 천천히 내 몰빵 남주에게서 등을 돌렸다.

하는 수 없이 집사의 뒤를 따라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던 찰나.

살벌해진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구르던 누군가와 스치듯이 눈이 마주쳤다.

여자의 얼굴이 미안함과 죄책감으로 잔뜩 일그러졌다.

언제나 상냥하고 착한 노멀 모드의 여주.

그리고 그런 그녀의 등장을 경계해 괴롭히는 하드 모드의 가짜 공녀.

어쩐지 게임과 똑같이 진행되고 있는 이 상황에, 불현듯 섬뜩함이 턱 끝을 잠식했다.

집사의 감시하에 방으로 되돌아온 나는 곧장 책상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소식을 들은 건지, 대기하고 있던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나를 쫓아왔다.

“……아, 아가씨”

“나가.”

“하지만…….”

주근깨가 잔뜩 박힌 갈색 눈이 내 눈치를 보느라 도록도록 굴러가는 게 보였다.

어쩌면 약삭빠른 그녀는 내게 줄을 댄 것을 후회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떻게서든 돌아온 ‘진짜 공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내 전담 하녀를 관둔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걸지도.

“내 말 안 들려? 생각할 게 있으니까 나가라고!”

미적거릴 뿐 나가지 않는 에밀리에게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네, 네! 밖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필요하면 불러 주세요, 아가씨. 아, 알겠죠?”

그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답한 후 서둘러 방을 빠져 나갔다.

탁-.

이윽고 방 안은 개미 새끼 지나가는 소리 하나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하…….”

나는 지끈지끈 아파 오는 머리에, 깊은 한숨을 내쉬며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아직도 하루의 시작인 아침에 불과한데, 나는 며칠간 밤을 지새운 것처럼 고단하고 지쳤다.

하지만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사치였다.

“생각해. 이대로 죽을 순 없잖아.”

나는 약해지려는 정신을 붙들고 두 손에서 얼굴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리고 허공을 노려보며 머리를 굴렸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으나, 몰빵 남주는 나를 배신하고 여주를 데려왔다.

나는 이대로 탈출하지 못한 채로 노멀 모드에 휩쓸려, 악녀가 되어 비참하게 죽기 싫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낙담해 있을 수는 없었다.

다행히도 게임대로 여주가 성인식에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아직 5일 남았어.”

이 말인즉슨, 내가 탈출할 기회 또한 아직 남아 있단 소리다.

‘99%야. 100% 찍고 사랑한다는 고백만 들으면 돼.’

여주가 나타났든 뭐가 됐든, 그것만 이루면 되는 일이다.

“그 새끼를 만나야겠어.”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초조하게 심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공작 몰래 이클리스에게 붙여 준 스승과 관련해서 할 변명과 놈의 호감도를 확인하기 위한 돈을 어디서 구할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렇게 얼마쯤 피 말리는 시간이 흘렀을까.

똑똑-.

“아가씨, 펜넬입니다.”

마침내 소식을 전해다 줄 이가 방문했다.

“들어와.”

나는 성급히 명령했다. 집사는 곧장 들어와 소식을 전했다.

“아가씨, 지난밤 경매에서 첫 번째로 내놓은 에메랄드 목걸이가 주인을 만났습니다. 방금 전 흰 토끼 상단을 통해 수익금이 저택으로 전달되었습니다.”

“돈이 입금됐다고?”

“예.”

‘됐어.’

비록 이클리스에 관련된 소식은 아니었지만, X같은 상황 중에 그나마 희소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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