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1화
“당장 이클리스를 만나러 가야겠어.”
금고가 채워졌다는 소식에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슴에 미약한 희망이 움텄다.
당장 그놈의 호감도를 확인한 후에 ‘사랑한다’는 고백을 들어야 했다.
혀에 꿀을 바르고 다시 구슬리든, 억지로 강요를 해서든…….
다급히 책상을 벗어나려고 하던 그 순간이었다.
“아가씨, 잠시만.”
집사가 난감한 얼굴로 황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소개해 드릴 자들이 있습니다.”
“뭐? 누굴?”
나는 뜬금없는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집사가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들어오게들.”
그러자 아직 열려 있는 방 안으로 갑옷 차림새의 처음 보는 장정 두 명이 들어왔다.
“아가씨의 호위를 새로이 맡을 자들입니다. 필립 경, 에드 경.”
“안녕하십니까, 공녀님.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공녀님.”
“필립 경과 에드 경은 공작님의 직속 호위 부대 소속으로 검술에 매우 뛰어난 이들…….”
“집사.”
나는 남자들의 깍듯한 인사를 깡그리 무시한 채 서늘한 목소리로 집사를 불렀다.
“지금, 내 방에서 뭐 하는 짓이지?”
“공작님께서…….”
노집사는 난처한 얼굴로 잠시 주저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당분간, 가문 내의 일원이 아닌 외부인과 아가씨의 접촉을 금하신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클리스 또한 포함입니다.”
“……뭐?”
불현듯 눈앞이 캄캄해졌다.
간신히 가라앉혔던 시뻘건 불길들이 다 목구멍까지 솟아올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되물었다.
“내가, 왜?”
“그의 심문을 마칠 때까지 아가씨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안전?”
“……예.”
“감금과 감시가 아니라?”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한쪽 입꼬리가 절로 비틀어졌다.
진짜 악녀처럼 웃는 나를 보며 집사는 영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런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아가씨.”
“그럼 왜 내가 내 호위 기사도 만날 수 없고, 그마저도 처음 보는 면상들로 갈아 치워야 하는지 납득시켜 봐.”
“소공작님께서…… 직접 기사들을 이끌고 프리뵈우스로 향하셨습니다.”
나는 어렵사리 답하는 집사의 말에 눈을 부릅떴다.
프리뵈우스는 이클리스의 스승이 거주하는 수도 외곽의 마을 이름이었다.
“왜?”
“오늘 오신 이본…… 아니, 손님이 며칠 전 나타난 마물로 인해 크게 다치셨다고 합니다.”
“그건…….”
마물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올랐지만 나는 간신히 그것을 삼켰다.
여주가 정말로 악의 무리의 중축이건, 모든 게 내 착각이건 그건 지금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냉정을 유지하려고 애쓰며 집사를 종용했다.
“그리고 그쪽에 있는 노예들이 다친 손님을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노예들이 하필이면 모두 델만인이었습니다.”
“그건 이미 집사도 알고 있는 소식이 아니었던가?”
이클리스에게 적합한 스승을 구했을 당시에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노예들이 노동하는 농장은 마을에서도 꽤 떨어진 인적 드문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클리스가 우연히 안면 있는 고국인을 만나고 갑자기 농장을 덮친 마물을 처치하느라 저택에 늦게 들어왔던 날.
나는 은밀한 뒷수습과 함께 노예들에게 전할 약초를 집사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그것은 집사와 나만의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그럼 그때 만난 거였네.’
자연스럽게 이클리스와 여주의 첫 만남이 도출되었다.
‘……빌어먹을.’
나는 욕설을 삼키며 피가 배어날 만큼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왜 마물이 나타났다는 말을 더 신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뼈저린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일이었다.
나는 그 당시에 96%에 육박한 호감도 수치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그런데, 하드 모드는 원래 뷘터가 아닌 다른 남주들도 여주를 데리고 올 수 있는 건가?’
나는 문득 뒤이어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나는 게임의 전개에 대해 점점 위화감이 들기 시작했다.
심각한 얼굴로 상념에 잠겨 있을 즈음.
“자네들은 그만 나가 있게.”
집사가 내 방 안에 허락 없이 들였던 침입자들을 내보냈다.
그들이 나가자 그는 심각한 얼굴로 뇌까렸다.
“델만인들이 모여 도주를 작당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아가씨.”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얼마 전 이클리스에게 들었던 말이었기에.
“그리하여 소공작님께서 긴급 체포를 위해…….”
“잠깐.”
손을 들어 집사를 막아섰다.
“그 계집애가 그딴 소리를 하던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심문 도중 이클리스의 입을 통해 나온 이야기들입니다, 아가씨.”
“뭐, 뭐라고?”
“아가씨께서 이클리스를 통해 건네 주신 약초가…… 그들의 도주 밑천이 되었다고 합니다.”
“…….”
“그는 갑자기 나타난 마물이 같은 고국인을 해쳤다는 말에 깊은 안타까움을 느끼고 아낌없이 도움을 주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런데.”
“한데 아가씨의 배려가 왜곡되는 것을 알고 그 후 홀로 오랫동안 고민하며 그들을 만류해 왔다더군요. 그러던 도중 손님을 만나 공작가에 입은 은혜를 갚기로 결심을 하게 되고…….”
“하.”
차가운 헛웃음에 집사의 입이 닫혔다.
“미친 새끼.”
나는 놈의 교묘함에 소름이 끼쳐 얕게 몸을 떨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을 따라 도망을 가자던 놈이, 이제는 거리낌없이 그들을 팔아먹었다.
나는 그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내가 가기 싫다고 해서야.’
이클리스는 처음부터 그런 놈이었다.
속을 숨긴 채 충성스러운 개를 흉내 내던.
그러나 호감도가 급격히 오르면서 놈의 성정에 변화가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모두 착각이었다.
그에게는 증오스러운 제국인에 대한 알량한 사랑보다, 알지도 못했던 동향인들에 대한 걱정보다 자신의 안위가 먼저였다.
내 앞에서는 동향인들을 걱정하는 선량한 사람 행세를 하던 놈이 속으로는 얼마나 재고 따졌을지 훤히 보이는 듯했다.
공작저에 남아 있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동향인들을 도와 제국을 탈출하는 편이 나을지.
그리고 놈은 선택했다.
동향인들을 제물로 삼고 이본을 끌고 와, 아득바득 이곳에 붙어 있기로.
그리고 내가 해 줄 수 없던 신분 상승의 기회까지 직접 거머쥐었다.
패전국의 노예들과 한패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교묘히 나를 엮어서.
치오르는 격렬한 감정을 내리누르며 물었다.
“……아버지는 뭐라셔.”
“진의 확인을 위해 소공작님을 직접 보내셨습니다.”
“시험은.”
“아직 진행 중입니다.”
“그럼 첫째 오라버니가 돌아오고 심문이 모두 끝날 때까지, 아버지도, 이클리스도 볼 수 없는 거겠네?”
“…….”
집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축객령을 내렸다.
“알았으니 나가 봐.”
“그럼, 필요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부르십시오.”
집사는 내 눈치를 보며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인 후 방을 나갔다.
이본이 공작의 시험을 통과하면 온데간데없이 사라질, 한정적인 눈치와 예의였다.
“개새끼.”
나는 불현듯 참을 수 없을 만큼 짜증이 치솟아 손을 들어 책상 위를 쓸어버리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이런 것으로 이성을 잃을 수 없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았다.
너무나도.
‘이대론 안 되겠어.’
나는 비척비척 일어나 침대로 걸어갔다.
‘차선책이 필요해.’
힘없이 침대 위에 드러누워 머리를 굴리는 와중.
문득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지독히도 비참하게 느껴졌다.
죽음이 찾아오기 직전처럼, 숨이 막혔다.
* * *
하루를 쫄쫄 굶은 채, 뜬 눈으로 지새운 나는 다음 날 이른 아침 방을 나섰다.
그대로 있다간 속에서 타오르는 천불이 그대로 온몸을 살라 먹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디 가시는 겁니까?”
그러나 문을 열기 무섭게 방해꾼들에게 가로막혔다.
“비켜.”
“안전을 위해 가시려는 곳을 밝히셔야 합니다.”
“내 집에서 내가 마음대로 움직이지도 못해?”
신경질적으로 대꾸하던 나는, 너무 예민해졌음을 인정하고 힘겹게 목적지를 밝혔다.
“……후원으로 산책 갈 거야.”
“그럼 저희가 따르겠습니다.”
“따라오지 마.”
“하지만, 공작님께서…….”
“여기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였다간 네놈들이 나를 모욕하고 학대했다고 비명을 지를 거야.”
“고, 공녀님!”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뇌까리자 놈들의 얼굴이 하얘졌다.
내가 일부러 키운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공작이 그것에 무척이나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한 말이었다.
“내 호위를 하라 했지 집 안까지 졸졸 쫓아다니며 나를 감시하라고 명하시진 않았을 거 아니니.”
“하, 하오나……!”
“유난 떨지 마. 금방 돌아올 거니까.”
내가 유령처럼 방문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그들은 넋 놓고 볼 수밖에 없었다.
복도를 걷는 내내 마주치는 사용인들마다 나를 묘한 눈으로 흘깃대는 것이 느껴졌다.
후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나는 지쳤다.
그러다 문득, 혹시 만약에.
아주 만약에 결국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러면, 이 지긋지긋한 일을 죽을 때까지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떠올랐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 * *
확실히 밖으로 나오니 방 안에만 처박혀 있을 때보다 기분이 나아졌다.
나는 찬찬히 걸음을 옮기며 간밤에 했던 생각과 계획들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런데…… 지하라면 저택의 지하인가?’
그러다 불쑥 이클리스가 어디에 갇혀 있는지 궁금해졌다.
저택의 지하는 보통 중죄를 지은 죄인을 포박하여 고문하는 용도로 쓰인다고 들었다.
하지만 연무장 근처에 그런 곳이 하나 더 있었다.
잘못을 저지른 기사들을 연금해 두는 곳인데, 한국으로 따지자면 ‘영창’과도 같았다.
‘이클리스도 어쨌든 명목상이나마 가문 소속 견습 기사이니 그쪽에 있겠지.’
결정을 내린 나는 연무장으로 가는 숲길 쪽으로 향했다.
거길 간다 해서 그를 바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가만있다가는 내가 미쳐 죽을 것 같아서 그냥 한번 구경이나 가 보는 것이었다.
한적한 숲길을 따라 얼마쯤 걸었을까.
깊은 상념에 잠긴 나는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이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어…….”
그쪽에서 나를 발견하고 미약한 신음을 내뱉을 때까지.
“아, 안녕하세요, 공녀님…….”
어색한 기색이었지만, 여전히 무해하고 상냥한 얼굴로 인사하며 여자가 나를 ‘공녀님’이라 불렀다.
‘공녀님? X발…….’
노멀 모드 초반에 페넬로페를 부르던 것과 똑같은 호칭에 나는 험악한 욕설을 삼켰다.
여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