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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52화 (15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2화

나를 응시하는 푸른빛의 양순한 눈.

그것을 마주하자, 불현듯 솔레일 지하에서 망설임 없이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던 모습이 떠올랐다.

뒷목을 타고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머리끝이 쭈뼛 서는 기이한 느낌에 아무 말도 않고 서 있을 즈음.

“……공녀님?”

조심스럽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안녕.”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며, 슬쩍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적한 숲길엔 여주와 나, 단둘뿐이었다.

‘제기랄.’

본래는 저택에서 마주치는 족족 무시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쟤가 실은 레일라 일족이라고 생각하니, 무서워서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이, 인사를…….”

나지막한 내 목소리에 말간 동공이 얕게 흔들렸다.

“인사를 받아 주신 거예요?”

노멀 모드의 여주는 하잘것없는 것에도 쉽게 감동받고 눈물을 글썽거리곤 했다.

나는 대조될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하다 이내 입술을 떼었다.

“이클리스를 만나고 돌아오는 거니?”

“아…… 네, 네.”

“아직 시험이 다 끝나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내 말에 여주가 난처함으로 눈매를 찡그렸다. 그녀는 잠시 주저하다 답했다.

“점심을 틈타서, 이클리스를 보고 오겠다고 공작님께 부탁드렸어요. 저 때문에 갇힌 거니까…….”

나는 만나지 못하게 막았던 것을 생각하면 좀 빡쳤지만, 애써 참았다.

‘그럼 이클리스는 저택 지하가 아닌 영창에 갇힌 게 맞네?’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기에.

“하녀도 없이 혼자?”

나는 곧장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이본이 볼을 붉히며 답했다.

“하녀장님이…… 데려다주셨어요. 그런데 워낙 바쁘신 분이기도 하고, 제가 혼자 산책하고 싶어서…….”

이건 좀 기분 나빴다.

‘아직 시험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하녀장?’

그녀는 원래부터 ‘가짜 공녀’를 싫어했고, 학대에 앞장선 이였다.

그간 저택에서 활개를 치고 다니던 나 때문에 기를 못 썼으니, 마침내 등장한 ‘진짜 공녀’가 어찌나 반가웠을까.

비죽 새어 나오는 비틀린 실소를 참으며, 나는 이본의 얼굴에 시선을 던졌다.

“아프겠네.”

“……네?”

“그 상처.”

정확히는 이마 위, 거즈로 가려진 상처에.

찰나의 순간, 여자가 미세하게 몸을 움찔거렸다.

나는 그것 외엔 그녀에게 딱히 용건이 없었다.

“그럼 수고해.”

때문에 잠시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다 곧바로 미련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아니, 그러려던 찰나였다.

“저기……!”

갑자기 와락 손목이 잡혔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뭐야?”

“죄, 죄송해요.”

커다란 눈 안에 주먹만 한 물방울들을 그렁그렁하게 매단 채 여주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남주들이 왜 그렇게 사족을 못 썼는지 알 만큼, 연약하고 애처로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나는 그저 기가 막혔다.

“하. 뭐가 죄송해?”

“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많이…… 놀라셨죠, 공녀님.”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그치지도 않은 잘못을 빌었다.

“여기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클리스가 한 번만 같이 가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

“제가 본의 아니게 공녀님께 상처를 드린 것 같아 죄책감이 많이 들었어요. 정말, 정말 죄송…….”

“이봐.”

나는 점점 격양되는 이본의 사과를 중간에 냉정하게 끊었다.

“이본이라고 했나?”

그녀가 울먹이다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평민일 때 불리던 이름도 이본이었니?”

“……네, 네.”

‘기억을 잃었는데 어떻게 평민 이름도 이본이야?’

불쑥 위화감이 들었지만, 나는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무슨 목적으로 여기 온 건지 나와는 상관없어.”

“네……?”

푸른 동공에 놀라움이 서렸다.

나는 혹시나 이 말도 곡해할까 봐, 또박또박 발음하며 덧붙였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 정확히는 나를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란 소리야. 알겠지?”

“그, 그게…….”

“알아들었으면, 이만 놔줘.”

못 알아들었어도 상관없었다.

여자에게 잡힌 손목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내 두려움에 기인한 것인지, 아니면 레일라의 기묘한 힘인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오한이 들었지만, 나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그녀에게 잡힌 손목을 떼어 내며 말했다.

“그리고 나도 평민 출신이라 네 처지를 좀 아는데, 다른 곳에서 이렇게 귀족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대면 뺨을 맞는단다.”

“…….”

“그럼 즐겁게 산책마저 해. 안녕.”

나는 서둘러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러다 내 모습이 좀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이 미친 게임에 막 빙의됐을 때, 이 집 아들놈들에게 죽을까 봐 마주칠 때마다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던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량한 자존심에 내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둔 남주들과는 달리, 여주는 나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저, 저는 아무런 목적 같은 거 없어요……!”

꽈악-. 치맛자락이 팽팽해졌다.

별말도 하지 않았는데, 여주는 억울함이 그득 담긴 울음 섞인 소리로 호소했다.

“어, 어렸을 적에 기억을 잃었어요. 최근에 어렴풋이 기억을 되찾고, 그리고 이클리스 덕분에 용기 내서 와 본 거예요. 제가 착각한 거라면, 친딸이 아니라면 벌을 받을 거예요. 정말로요. 정말로 저는…….”

“하…….”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리고 뒤돌아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나한테 변명할 필요 없어.”

“고, 공녀님…….”

“상관없다고 했잖아.”

여주가 다가온 나를 보고 당황한 기색을 비치며 주춤 뒷걸음질 쳤다.

“어, 어……!”

그러다 돌부리에 걸렸는지, 맥없이 휘청거렸다.

어쩜, 여주는 넘어지는 것마저 우아하고 예뻤다.

나는 손을 뻗어 그런 그녀의 팔을 강하게 잡고 내 쪽으로 휙 끌어당겼다.

한겨울에 핀 들꽃처럼 가녀리게 스러지던 몸이 가까스로 균형을 다잡았다.

“헉.”

손바닥에 닿은 피부가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죽은 시체처럼.

“조심해.”

“가, 감사해요.”

이본이 작게 감사 인사를 중얼거렸다.

나는 그녀를 당장 뿌리치고 밀쳐내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아내며, 빠르게 읊조렸다.

“잘 들어, 이본.”

“무, 무슨…….”

“네가 진짜 잃어버린 이 집 막내딸이건, 아니면 다른 속내가 있어서 들어왔건 내 알 바 아니야.”

“고, 공녀님.”

“함께 있는 동안은 넌 너대로, 난 나대로 그렇게 지내자고.”

“하지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냐며 토끼처럼 휘둥그레진 여주의 눈이 다시 흐려졌다.

“하지만 제가 정말 공작님의 잃어버린 딸이 맞는다면…… 가족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가족?”

나는 생경한 소리를 들은 것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기민하게 그녀의 착각을 부정했다.

“난 네 가족 아니야.”

“…….”

“그러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해. 언젠간, 아니, 곧 끝날 한시적인 관계일 뿐이라고.”

난 그것으로 오늘의 위험한 해프닝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듣자 듣자 하니 못 봐주겠네.”

우리 사이에 방해꾼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기 전까진.

나와 이본의 고개가 동시에 휙 돌아갔다.

무성한 나무 사이에서 이본과 똑 닮은 사랑스러운 분홍 머리가 삐딱하게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이네.’

나는 점점 환장스럽게 돌아가는 상황에, 해탈한 채 실소를 흘렸다.

놈의 머리 위 연분홍빛 게이지 바가 빠르게 깜빡거렸다.

아마도, 호감도가 떨어지는 중인 것 같았다.

“너 진짜…… 그게 할 소리냐?”

우리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온 레널드가 사납게 물었다.

나는 놈의 머리 위에서 힘겹게 시선을 떼고, 한숨 쉬듯 물었다.

“내가 뭘?”

“내가 뭘……?”

놈의 얼굴이 험악하게 꿈틀거렸다. 이상하게도, 이젠 그것이 별로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제 처음 온 애한테 조심하라는 둥, 가족이 아니라는 둥, 한시적인 관계라는 둥, 그딴 소릴 꼭 해야겠냐?”

“틀린 말은 아니지.”

“뭐?”

“아직 시험이 다 끝난 게 아니니까.”

“지금 그걸 말하자는 게 아니잖아!”

놈이 답답한지 버럭 소리쳤다.

귀가 따가워서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럼 넌 뭘 말하는 건데?”

“품위 없는 네 태도를 지적하는 거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으드득, 이를 가는 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려 퍼졌다.

“……흐윽!”

여주가 옆에서 연약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태연한 내 대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레널드 놈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나를 몰아붙였다.

“아직 진짜인지, 가짜인지 판가름 나지도 않은 애를 벌써부터 그렇게 쥐 잡듯이 잡으면서, 뭐? 노예보다 못한 버러지 취급?”

나는 놈의 시선이 어디에 가 있는지 반사적으로 알아차렸다.

내가 미처 놓지 못한, 여주의 팔.

“다른 사람을 진짜 버러지 취급하는 게 누군데?”

놈의 지껄임이 귓속을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눈앞에 그날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 넌 항상 날, 노예보다 못한 버러지처럼 비참하게 만들어.

축제의 마지막 날, 다락방.

놈은 호감도 폭락에 덜덜 떨면서도 악착같이 내뱉었던 내 절규를, 그 처절하게 외친 피 같은 말들을 이 상황에 빗대고 있었다.

고작 서로를 신경 쓰지 말자는, 그 별것 아닌 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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