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3화
난 왜.
그렇게 당해 놓고도 매번 무언가 달라졌을지 모른다고 믿었던 걸까.
그렇게 당해 놓고도, 병신처럼.
그렇게 당해 놓고.
“하…….”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허탈한 웃음을 흘리자, 레널드도 여주도 일순 움찔거렸다.
“너…….”
그러나 그도 잠시, 놈은 내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흉흉하게 얼굴을 굳혔다.
호감도 게이지 바가 또다시 빠르게 깜빡인다.
‘-1%일까 -2%일까.’
이전과는 달리 호감도가 아슬아슬한 상태는 아니기에, 한 30% 정도는 폭락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호감도가 얼마나 차감되었는지 따위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이본, 네가 대답해 봐.”
“무슨…….”
“내가 널 쥐 잡듯이 잡았니?”
그 순간 여주가 무어라 대답할지 순수하게 궁금해졌다.
‘과연, 여주의 성격은 게임처럼 선량한 게 맞는 걸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봐선, 여기서 내가 자신을 쥐 잡듯 잡고 윽박질렀다고 대답하더라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이본은 내 시선에 울상을 지으며 우물쭈물했다.
그를 보다 못한 레널드가 대신 입을 열고 나서려던 찰나였다.
“그렇게 물으면 얘가 퍽도…….”
“아, 아니에요, 공자님!”
이본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공녀님의 말이 맞아요! 제가, 제가 바보같이 돌부리에 걸려서 뒤로 넘어질 뻔한 바람에…… 공녀님이 저를 잡아 주신 거예요.”
“……뭐?”
레널드 놈의 얼굴이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얼어붙었다.
“그럼…….”
놈이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아직도 내게 잡힌 이본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갑작스러운 레널드의 등장으로 미처 놓을 새가 없던 것이지만, 이본의 대답을 들으려고 일부러 놓지 않고 있던 것이다.
나는 보란 듯이 이본의 팔을 위로 휙 쳐들어서 레널드 놈에게 들이밀었다.
그리고 그의 눈앞에서 깔끔하게 손가락을 벌렸다.
이본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너는 애석하게도, 그때와 달라진 게 조금도 없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 말에 레널드의 푸른 동공이 지진이라도 일 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페, 페넬로페.”
그가 막 나를 부름과 동시에 나는 휙 몸을 돌려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산책 겸 이클리스가 있을 만한 곳을 탐색해 보겠다는 생각은 접었다.
어차피 이본의 입을 통해 확신을 얻기도 했고, 굳이 그들을 지나쳐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시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얼마쯤 부지런히 걸었을까.
“페넬로페!”
타다닥-! 불현듯 뒤쪽에서 거친 뜀박질 소리가 들리고 곧 앞이 가로막혔다.
‘뭐야. 우는 제 동생이나 달래 줄 줄 알았는데.’
나는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비켜.”
“미…….”
그 순간, 레널드 놈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더니,
“미안.”
“…….”
“내가 오해를 한 것 같아.”
놈이 순순히 제 잘못을 시인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머리 위가 깜빡였다.
문득 황궁 재판장에서의 데릭이 떠올랐다.
쉽게도 올랐다가, 쉽게도 떨어지는 호감도.
그딴 건, 내게 아무런 감흥도 줄 수 없었다.
“알겠으니까 비켜.”
“그렇지만 집안 분위기도 뒤숭숭한데, 지금 네가 사고라도 치면…….”
사과 뒤에 바로 변명을 덧붙이는 놈을 멀거니 바라만 보자, 놈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저도 민망한지 눈 밑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할 말은 그게 끝이야?”
“오해해서 미안해.”
“그래?”
나는 놈의 사과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내 싱긋 웃었다.
“알았어.”
“그럼 이제 된 거지? 삐져서 들어가지 말고 산책마저…….”
“그런데 받기 싫어.”
나는 내 웃는 얼굴에 안도하는 놈의 말을 단숨에 잘랐다.
놈의 얼굴이 일순 멍해졌다.
“……뭐?”
“네 사과, 받기 싫다고.”
나는 놈을 위해 한 자 한 자 상냥하게 다시 읊어 주었다.
멍청한 페넬로페는 레널드와 이를 드러내고 싸운 후에도 매번 놈에게 먼저 인사해 왔다.
먼저 건 시비와 폭언에 대해 사과를 받은 적은, 물론 한 번도 없었다.
‘아. 그나마 내가 빙의한 후에 사과를 한 번 받긴 했지.’
무시당하기 일쑤인 ‘가짜 공녀’의 위치가 대체 어디서 기인한 건지는, 몇 번 꾼 꿈이나 에밀리의 입으로도 충분히 알 만했다.
“너…….”
내가 그런 말을 할 줄 몰랐는지 레널드는 한참을 버벅였다.
하지만 곧, 놈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면서 흉흉한 기운이 새어 나왔다.
“넌 사람이 사과를 하는데 꼭 그렇게 싸가지 없이 말해야 속이 시원하냐?”
“그러는 넌 사과를 해도 꼭 그렇게 기분 더럽게 해야 돼?”
“이게 점점…….”
“너도 내 사과를 매번 받아 준 건 아니잖아. 나라고 왜 당연하다는 듯 네 사과를 받아 줘야 하는데?”
“뭐?”
“나도 네 사과 따위 받기 싫을 때가 있을 수도 있지.”
나는 여상하게 놈을 바라보며 설교라도 하는 어투로 말했다.
“사람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한결 같겠어. 나한테 사과받기를 강요하지 마.”
“허! 너 지금, 내가 예전에 좀 그랬다고 복수라도 하는 거냐?”
“응.”
나는 기가 막혀 연신 헛바람을 내뱉는 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한번 당해 봐. 널 버러지 취급하면서 무시하는 사람과 아무렇지도 않은 척 말하는 게 얼마나 비참하고 개 같은 일인지.”
바꿔 말하면 이제부터 나 또한 똑같이 널 버러지 취급하겠다는 소리였다.
“야, 너…….”
그것을 알아들었는지 놈이 살기등등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위태롭게 깜빡이는 놈의 정수리를 확인하고, 주변을 흘끔 곁눈질했다.
나를 밀쳤을 때 머리에 박을지 모를 돌부리도 없었고, 튀어나온 날카로운 나뭇가지도 없었다.
물론 분에 찬 놈이 내 목이라도 조른다면 별수 없지만.
다행히도 아직 아무런 움직임을 취하지 않는 것을 보니, 호감도가 그 정도까지 하락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꽤 오랜 시간 나를 가만히 노려보던 레널드는, 그러든 말든 내가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하자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하…… 그래. 그 말도 내가 실수했다. 미안해.”
짜증 섞인 한숨과 함께, 놀랍게도 놈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애들도 아니고, 그만하자. 평민 앞에서 이래 봤자 에카르트의 위신이 어떻게 퍼져 나가겠냐.”
그리고 아직 이본이 있는 자리를 흘긋 눈짓하며 작게 읊조렸다.
나는 그게, 그저 우스웠다.
“에카르트의 위신?”
재밌다는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너 정말 몰라? 내가 왜 그간 전담 하녀한테까지 그딴 취급을 받았는지?”
“뭐?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오는…….”
“너 때문이잖아, 레널드.”
나는 일순 웃음을 멈추고 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뭐?”
“네가 방금 전처럼 평민 앞에서 그딴 식으로 굴어서잖아.”
“야, 페넬로페. 너 대체…….”
“네가, 기사들이랑 사용인들 앞에서 숨 쉬듯이 날 버러지 취급하고 무시해 왔으니까.”
이런 놈 또한 남주는 남주라서 그동안 필사적으로 자제해 왔다.
머리끝까지 짜증과 분이 차올라도, 놈이 어느 정도 성질을 누그러뜨리면 감안하고 넘어갔다.
난 이제껏 한 번도 학대에 대한 것들을 노골적으로 언급한 적 없었다.
그간 훔친 목걸이를 운운한 것도 한계에 몰렸을 때, 놈의 죄책감을 들쑤시기 위해서였지, 그 외 다른 문제들은 최대한 방관했다.
참지 못하고 긍지 높은 에카르트의 이중성까지 깎아내리면, 호감도 하락에 큰 영향을 끼칠 것을 알았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성인식 전에 나타난 여주,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로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 힘겹게 억제해 왔던 내 감정들을 고스란히 드러내게 만들었다.
“너. 너 때문에 그런 거라고, 레널드 에카르트.”
잇새로 튀어나온 것은 말이 아닌 혐오, 그 자체였다.
메마른 음성 저편에 들끓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레널드가 흠칫했다.
“그런데 무슨 놈의 위신?”
나는 그제야 놈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눈에서 힘을 뺐다.
“당분간 나 봐도 말 걸지 마.”
“페, 페넬로페.”
“제발. 내게 진짜로 미안하면 그렇게 해 줘. 부탁이야, 오라버니. 좋은 하루 보내.”
그린 듯이 미소 지은 나는, 조금도 혐오를 내비친 적 없다는 양 최대한 상냥하게 인사를 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놈을 남겨 둔 채 재빠르게 그 숨 막히는 곳을 벗어났다.
그를 스쳐 지나가는 그 순간, 입가에 짓고 있던 미소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무섭도록 굳은 표정이 나타났다.
흔들리는 시선이 마지막까지 내게 못 박혀 있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 * *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비척비척 침대로 걸어가 드러누웠다.
결국 점심도 거른 채 선잠에서 깨어났다, 다시 잠들기를 수차례 반복하던 중.
“……가씨, 페넬로페 아가씨.”
에밀리가 조심스럽게 나를 깨웠다.
눈을 뜨니 사위가 컴컴했다. 벌써 해가 저문 것이다.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야?”
“저녁 드셔야죠. 어제부터 아무것도 드시지 않으셨잖아요.”
에밀리가 안절부절못하는 목소리로 식사를 권했다.
“됐어. 입맛이 없구나. 더 잘래.”
나는 거절한 채 다시 힘없이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태평하게 밥이나 먹을 상황도 아니었거니와, 뭘 먹었다가는 그대로 체할 것 같았다.
“아가씨이…….”
또 한 번의 거부에 에밀리가 애타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기운이 없어 대답도 않자, 문득 침대 한쪽이 묵직해졌다.
에밀리가 침대 한편에 슬쩍 앉았기 때문이다.
‘뭐야?’
나는 그런 그녀 쪽으로 흘끔 고개를 돌리며 눈으로 의중을 물었다.
“아가씨.”
에밀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그 여자가…… 결국 저택에 머물게 되었대요.”
이본에 대한 소식을 전하는 그녀의 행동에 조금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어차피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나는 금세 흥미를 잃고 심드렁하게 되물었다.
“시험에 모두 통과했다니?”
“기억을 잃어서 전부는 아닌가 봐요. 그래서 당분간은 저택에 머물면서 지켜보기로 했대요.”
“그렇구나.”
“하지만 워낙 이런 일이 빈번했으니까…… 이번에도 가짜일 게 분명해요, 아가씨.”
‘가짜 공녀’에게 ‘가짜’를 논하는 그녀가 좀 우스웠다.
“됐어. 그런 상투적인 소리 안 해도 돼.”
나는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답했다. 그리고 한숨처럼 덧붙였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해.”
이제 에밀리도 보내 줘야 할 때였다.
‘하녀장의 명령을 받는 처지니까…….’
그리고 그 하녀장은 확실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벌써 이본의 시중을 들었다.
첫 만남이 썩 마음에 들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간 에밀리 덕분에 몹시 편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생각해도 난 착한 주인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간 나도 모르게 정을 내줬는지, 막상 그녀마저도 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입이 지독히도 썼다.
그래서 어제 그렇게 그녀를 내쫓듯이 방 밖으로 내보낸 걸지도 모른다.
내 전담 하녀를 관두고 싶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
‘하지만 별수 없지. 난 어차피 떠날 사람이니까.’
다행히 난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조용히 에밀리의 다음 말을 기다리던 때.
“제가…… 그 여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전달해 드릴게요.”
“……뭐?”
한참 동안 뜸을 들이던 그녀가, 불쑥 예상치 못한 말을 내뱉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