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4화
“그 여자의 임시 하녀로 배치된 애가 저와 같은 고향 출신이에요. 베키라는 아이인데…….”
“…….”
“어릴 적에 화재 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1년간 저희 집에 얹혀산 적이 있어요.”
“……그런데?”
“원래 그렇게 친인척 하나 없는 고아는 귀족가의 하녀로 잘 받아 주지 않아요, 아가씨. 혹시 모를 사고에 휘말리면 신원을 보장해 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
“하지만 저희 부모님이 그 애를 딱히 여겨, 제가 공작저에 지원할 때 같이 지원하라며 보증서를 써 주셨어요. 그다지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에밀리는 멈칫하는 내게 좀 더 소리 죽여 속삭였다.
“보증서를 들먹거리면, 순순히 말을 들을 거예요.”
순간, 그녀의 갈색 눈동자에 음험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그, 그럼요!”
에밀리가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여자가 저택에 머무는 동안 공녀님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무슨 꿍꿍이를 저지르면 어떡해요?”
그녀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호소했다. 아무리 봐도 다른 속내 한 점 없는 진심 같아 보였다.
그 모습에 갑자기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우리도 미리 대비를 해야…….”
홀로 사색에 잠긴 에밀리는 한발 늦게 웃음기 가득한 내 얼굴을 알아차렸다.
“아가씨! 지금 그렇게 웃으실 때가 아니라고요!”
그녀가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흘겼다.
“미안, 미안.”
나는 그제야 가까스로 숨죽여 웃던 것을 멈추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건 너무 전형적인 악녀 같잖니, 에밀리.”
“저는 정말 진지하다고요! 오죽하면 제가 고향 친구까지 팔아먹으려 그랬겠어요…….”
그녀가 한숨을 쉬며 푸념했다. 진지하게 고민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내게 줄을 댄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인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녀의 말에 서늘하기만 하던 마음이 조금쯤 따뜻해졌다.
“알았어. 생각해 줘서 고맙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순순히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에밀리가 반짝 눈을 빛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럼, 제 말대로 하시는 거죠?”
“음…….”
나는 잠시 고민했다.
손 하나 까딱 않게 나서 주는 이가 있다는 건 편리했지만, 이본의 일상을 아는 것이 내게 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노멀 모드의 스토리는 모두 알고 있으니까…….
‘아니야.’
여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불현듯 방금 전의 과신을 부정했다.
노멀 모드와 하드 모드의 스토리는 전혀 달랐다.
더는 여주가 노멀 모드와 똑같을 거라고 믿을 수만은 없었다.
“……그 애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내가 알 필요는 없어. 너무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니까.”
생각을 마친 나는 이윽고 입을 열었다.
“그 베키라는 아이에게 수상한 일이 있을 때만 보고하도록 시키렴.”
“수상한 일이요?”
“그래. 예를 들면…….”
나는 반사적으로 솔레일에서 보았던 흰색 로브를 떠올렸다.
가면, 유물, 깨진 거울 조각.
“……예를 들면 크게 집착하는 물건이나 기이한 행동을 하는지.”
내 말에 에밀리가 결연한 얼굴로 답했다.
“네! 알겠어요. 맡겨만 주세요, 아가씨.”
물론 큰 기대는 없었다.
여주가 진짜 레일라 일족이 맞는다면, 일개 하녀에게 수상한 모습을 들킬 만큼 멍청하게 행동하지는 않으리라.
그렇지만 여러 번 굳게 다짐하는 에밀리가 귀여워서, 나는 다시 한번 짧게 웃었다.
내 기분이 조금 풀린 것을 눈치챈 걸까.
“아가씨, 그럼 이제…… 저녁 드실 거죠?”
에밀리가 불현듯 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순간, 나는 그대로 표정이 허물어질 뻔한 것을 가까스로 다잡았다.
‘그래도 이곳에는 밥을 굶으면 챙겨 줄 사람이 있긴 있구나.’
나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휘몰아치는 속을 꾹 내리누르며 꽉 막힌 목소리를 내었다.
“…… 에밀리.”
“네?”
“너 제법…… 내 수족 노릇을 잘해 내고 있구나.”
에밀리는 내 말에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아가씨. 전 아가씨의 전담 하녀잖아요.”
“그래…… 그럼, 저녁을 가져오렴.”
“네, 아가씨! 금방 갔다 올게요! 조금만 기다리셔요!”
밥을 먹겠다는 의사에 에밀리는 퍽 감격 어린 얼굴을 하고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내가 집으로 떠난 이후 혹시라도 ‘진짜’ 페넬로페가 돌아온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쫄쫄 굶는지 아닌지, 신경 써 주는 이가 있어서.
* * *
D-3.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막 마치고 난 후였다.
집사가 찾아왔다. 공작이 부른다는 전언을 가지고서.
“준비하고 나갈 테니 밖에서 대기해.”
어제 에밀리를 통해 이본이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는 것을 들었으니, 오늘쯤 부르리라 생각했다.
나는 곧바로 집사를 따라 공작의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와.”
들려오는 허락에, 가벼운 긴장감을 가진 채 안으로 들어섰다.
오늘 공작과 결판을 낼 것이 많았기 때문이다.
집사가 열어 준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공작이 두꺼운 시가를 입에 문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 서류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아버지.”
“왔느냐.”
인기척에 그가 고개를 들었다. 밤을 지새운 건지 무척이나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앉거라.”
소파에 자리를 권한 그는 이어서 자신 또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녀가 들어와 다과를 준비하고 나간 후에도, 공작은 말없이 시가를 하나 더 꺼내 태웠다.
오래 지속된 침묵으로 좀이 쑤실 때쯤.
마침내 공작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끄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페넬로페.”
엄중한 목소리에 나는 조금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하고 답했다.
“예, 아버지.”
“……나 몰래 네 오라비에게 그놈의 스승을 붙여 달라고 부탁했더구나.”
“…….”
“왜 내게 미리 말하지 않았지?”
사실상 내게는 이본이 시험을 통과한 것보다 이게 더 큰 문제였다.
예상한 일이지만, 막상 그것들이 닥치자 눈이 질끈 감겼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사실대로 말했다.
“……반대하실 것 같아서요.”
“후…….”
철없는 답변이었는지,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 속 인물이었지만, 오랜만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묵직한 아우라에 몸이 절로 움찔거리는 것은 별수 없었다.
“……지난 새벽, 프리뵈우스 항구에서 막 도주하려던 델만 출신 노예들을 네 오라비가 긴급 체포해서 황궁에 신병을 넘겼다. 그리고 오늘 아침 모두 즉결 처형당했지.”
“…….”
“이클리스, 그놈의 진술과 결국 모두 일치하게 됐다.”
처형이라는 소리에 잠시 가슴이 철렁했다.
하지만 집사의 말을 통해 이렇게 되리라 어렴풋이 짐작한 탓인지, 충격이 길게 이어지지는 않았다.
묵묵히 듣기만 하는 내 모습에 공작이 한층 더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그놈에게 건넨 약초를 팔아서 델만 출신의 노예들이 도주 자금을 만든 정황이 고스란히 남아 있더군.”
“…….”
“황궁에서 먼저 알아차리고 수사를 진행했더라면, 너는 물론 에카르트까지 엮여 들어갈 뻔한 것을 알고 있느냐.”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았던 손이 저절로 주먹을 쥐면서 치맛자락을 와락 움켜쥐었다.
호감도에 미쳐서 앞뒤 안 가리고 감행했던 그 모든 것들이 후회가 되었다.
‘그래도 멍청하게 금화를 내주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던가.’
배려랍시고 약초 외에 소액이라도 건넸다면 어떻게 됐을지, 눈앞이 다 컴컴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고개를 아래로 떨군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경솔하게 행동해서 죄송합니다. 제 불찰이에요.”
“…….”
“멋대로 행동한 것에 대해 벌을 내려 주신다면, 기꺼이…….”
“집사에게 모두 들었다.”
공작이 불쑥 내 말을 막아섰다.
“나쁜 마음을 먹고 그런 게 아니지 않느냐. 그놈에게 스승을 붙여 준 경위도, 노예들에게 약초를 내준 것도.”
“…….”
“다 네 마음이 여려선 게지.”
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생소한 눈으로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진짜 페넬로페와는 달리, 이본이 저택에 눌러앉게 된 것에 난리를 칠 처지도 못 되었다.
빌어먹게도, 패전국의 노예를 멋대로 저택 밖으로 빼돌린 전적이 있었고 자칫 가문을 위험에 빠트릴 뻔했기에.
모두 의도한 게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돼 버렸다.
이클리스, 그 미친놈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공작이 내게 역정을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어제오늘, 계속 네가 놀랄 일만 일어났지 않니. 걱정되어서 부른 것이야. 잘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라.”
무척이나 피로한 모습으로도 조심스럽게 내 의중을 살피고 있었다.
그는 이어서 야트막한 한숨과 함께 본론을 얘기했다.
“페넬로페.”
“…….”
“……이본, 그 아이가 당분간 저택에 머물도록 결정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왜인지 그 말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별수 없었다.
일말의 기대라도 한 사람처럼.
‘그럼 그렇지.’
나는 속으로 차갑게 조소했다.
앞의 기나긴 서론과 용서는 결국, 이것을 위한 밑밥이었던 것이다.
충격적인 소식에도 무표정한 나를 보며 공작이 흠칫 눈을 피했다.
나는 그런 그를 빤히 응시하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시험은 모두 통과한 건가요?”
“잃어버린 이후의 기억을 잃어서 전부는 아니지만…….”
공작이 주저하다가 덧붙였다.
“제 어미에 관한 질문들은 모두 맞추더구나.”
“…….”
“게다가 점의 위치가 똑같았다. 이본은 에블린, 아니…… 죽은 부인과 똑같이 오른쪽 손바닥 정중앙에 점을 하나 가지고 태어났지.”
“그렇군요.”
게임에서도 나온 내용이라 별 감흥도 들지 않았다.
나는 뒤늦게 너무 성의 없이 대꾸한 것을 깨닫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답했다.
“축하드려요, 아버지.”
“……뭐?”
그러자 일순, 공작의 얼굴이 멍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