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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55화 (15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5화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좀처럼 믿기지 않는지, 공작은 놀란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오랫동안 찾아왔던 친딸을 드디어 찾으신 거잖아요.”

“……페넬로페.”

그는 조금 전의 그 엄중했던 표정이 믿기지 않을 만큼, 망설임이 가득 담긴 어조로 물었다.

“그 아이를 저택에 머무르게 해도…… 괜찮겠느냐?”

“그럼요.”

“…….”

“제게 양해를 구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렇지만, 제 허락이 필요한 일이 아닌걸요.”

내 대꾸에 푸른 눈이 충격으로 굳어진 채, 하릴없이 흔들렸다.

이클리스 놈의 배신으로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 하더라도, 상대는 공작이었다.

‘진짜 딸이 돌아왔다는데 가짜가 날뛰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게다가 노멀 모드의 시작 전, 온전한 탈출만을 원하는 나는 공작의 물음에 전혀 타격을 입지 않았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이럴 걸 다 알고 있었으니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으니까.

공작은 내 의중을 살피듯 연신 심상한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네가 싫다면…….”

“…….”

“공작령으로 보내마.”

납죽 엎드리는 내 반응에 그가 대뜸 예상치 못한 소리를 했다.

눈을 내리깔고 있던 나는 퍼뜩 시선을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짓밟아 놓았는데도 찰나, 미약하게 고개를 드는 기대에 가슴이 수런거렸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공작은, 무척이나 복잡하고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

이럴 때만 눈치가 빠른 나는, 반사적으로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라는 것을.

“……밤새 고민해 보았다.”

“…….”

“그렇지만 한집에서 계속 소란이 이는 것보단, 그 애가 진짜 이본이라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 차라리 떨어져 있는 게 모두에게…….”

“아버지.”

나는 공작의 말을 중간에 끊어냈다.

그가 무얼 우려하면서 그런 말을 꺼냈는지, 알아차려서.

경직된 얼굴 근육을 억지로 움직인 채 가까스로 싱긋 웃어 보였다.

“공작령으로 가려면 제가 가야죠.”

“……페넬로페.”

“그 애가 정말로 아버지의 친딸로 밝혀진다고 하더라도, 저 소란 일으킬 생각 같은 거 없어요.”

그가 말한 ‘계속 이는 소란’은 온전히 나를 향한 것이었다.

“그 애를 해코지할지 모른다는 걱정도 마세요. 그럴 일 없으니까.”

내 말에 공작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

“그래서 새 호위를 붙여 두신 거잖아요. 집 안임에도 불구하고.”

“…….”

내 말에 공작의 입이 한 일자로 다물렸다.

페넬로페의 전적이 워낙 화려했기에, 그런 우려를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노멀 모드에서는 그녀가 가족과 남주들의 관심을 받는 것을 질투하고 시기하다 못해 여러 번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으니까.

그러니 어찌 보면 공작의 반응은 당연했다.

당연한데…… 이토록이나 속이 쓰린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

나는 필사적으로 미소 지은 채 되뇌었다.

“지금까지 제게 베풀어 주신 은혜만으로도 충분히 감사드리고 있어요. 아이도 아니고, 이제 철모르고 심술을 부릴 나이는 지났잖아요.”

내 말에 한참 동안 침묵하던 공작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그제는 왜…….”

아차 싶었는지, 그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끝내 들리지 않는 뒷말에, 그저께 이클리스가 이본을 데리고 왔을 땐 왜 그렇게 길길이 날뛰었냐는 질문이 담겨 있다는 것을 못 알아챌 리 없었다.

나는 입가에 드리워진 미소를 천천히 지웠다.

“그렇지만, 제가 가진 몇 안 되는 것들을 뺏어서 그 애에게 쥐여 주려 하지는 마세요.”

“무슨…….”

“이클리스는 제가 데리고 와서, 제가 삼은, 제 호위 기사잖아요, 아버지.”

“…….”

“심문이 끝났으면 이제 그만 제게 돌려주세요.”

내게 지금 당장 중요한 것은, 이본의 등장도 공작가 일가의 태세전환도 아닌, 그놈이었다.

이토록 상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았음에도, 그는 아직도 99%인 내 몰빵 남주였기에.

“이클리스를 제게 돌려주세요, 아버지.”

내 단호한 목소리에 공작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깊은 한숨과 함께 답했다.

“이본, 그 아이가…… 그놈을 제 곁에 두고 싶은 눈치더구나. 영 낯선 곳이라 아는 얼굴이 필요한 듯해서 그런 듯해.”

“그러실 건가요?”

“페넬로페, 얘야.”

득달같이 되묻는 나를, 공작이 부드럽게 만류했다.

“이 아비는…… 그놈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같은 출신 노예들과 내통을 해서요? 하지만 이클리스가 한 진술과 모두 일치했다면서요.”

“그런 게 아니야.”

좀처럼 납득되지 않는 이유였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공작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답을 듣길 종용하는 내 눈빛에 마지못해 설명했다.

“……데릭이 노예들을 처형하기 직전에, 그들에게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더구나.”

“어떤…… 소리요?”

“노예들이 도주 자금을 어떤 식으로 마련해야 하는지 고민하던 차에, 제가 준 약초를 팔라고 충고한 것이 바로 그놈이라고.”

나는 그 말에 눈을 부릅떴다.

‘그냥 밀고만 한 게…… 아니었어?’

파면 팔수록 나오는 놈의 밑 작업에 소름이 쫙 끼쳤다.

‘대체 언제부터…….’

공작도 그것이 영 걸리는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가까스로 숨긴 채 말했다.

“동향인들이 열악한 환경에서 노동하고 있다고…… 제게 하소연을 한 적이 있어요. 그저 생활에 보탬이 되라고 조언한 것이 아닌지…….”

“그 농장은 그래도 적게나마 삶이 나오는 사정이 괜찮은 곳이라고 들었는데 이상한 일이로구나.”

공작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섬뜩한 생각이 흘렀다. 이본을 데리고 온 것은 별개였다.

어쩌면 놈은 애당초, 처음부터 이것을 계획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렇다면 네 말이 맞겠구나. 도움을 주는 차원에서 그런 말을 한 거겠지.”

놈을 향한 내 옹호에 공작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말이 달리 들렸다.

‘설마 제 아무리 비참한 처지라지만, 면천을 위해 동향인들까지 팔아먹는 쓰레기일까.’라고.

“어쨌든 놈은 표면적으로 봤을 땐 불순분자들을 밀고하여 큰 공을 세웠다.”

상념에 잠길 새도 없이 공작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애타게 찾던 내 막내딸도 데리고 왔지. 에카르트에 큰 빚을 지웠어.”

“…….”

“하여 지난 새벽 데릭이 놈에게 보상으로 무얼 원하느냐 물었다.”

“……무얼 원한다던가요?”

나는 긴장한 채 공작의 입에서 떨 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저, 가문에서 내쫓지 말고 검술을 더 배울 수 있게 해 달라더군.”

하지만 들려온 그의 대답에 곧바로 어리둥절해졌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되물었다.

“면천이나…… 작위가 아니라요?”

“그래.”

‘그러면 그놈이 나까지 들먹여 가면서 동향인들을 팔아먹은 이유가 뭐야?’

게다가 공작의 말처럼, ‘진짜 공녀’까지 데리고 왔으니 그는 억만금이라도 요구할 수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같이 도망을 가자 했으면서, 이제는 그냥 공작가에 있게만 해 달라……?’

도통 놈의 속을 알 수가 없었다.

심란한 마음에 눈살을 찌푸리자, 마치 그런 내 심정에 동감하듯 공작이 읊조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도통 속을 알 수 없어.”

그는 마땅찮음이 가득 담긴 음성으로 다시 물었다.

“그런 놈을 꼭 곁에 둬야겠느냐?”

“그런 놈을…… 이본의 곁에 두려는 이유는요?”

“페넬로페.”

공작이 경고하듯 나를 불렀다.

그가 무슨 이유로 막는지는 알 듯 말 듯 했지만, 그런 건 지금 당장 내게 중요치 않았다.

나는 놈을 만나 봐야 했다. 만나서……….

“일단, 만나 보게는 해 주세요.”

“안 돼.”

“아버지, 제발…….”

칼같이 잘라 내는 공작의 태도에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바로 내일모레가 네 성인식이다.”

답답한 것은 매한가지인지,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고 엄포를 뒀다.

“안 그래도 다들 에카르트에 온갖 이목이 쏠려 있는 마당에, 그깟 노예 놈과 엮여 더러운 구설수라도 퍼지면 그걸 어찌 감당하려고 그러는 게야!”

안 그래도 꺼내려 했던 성인식 얘기를 공작 쪽에서 먼저 꺼내 주었다.

“그럼 답은 정해져 있네요.”

나는 그에게 애걸하려던 표정을 지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내가 오늘 그와 결판을 내려 했던 것은 두 개였다.

하나는 이클리스와의 접촉을 허락받는 것과 또 하나는.

“제 성인식을 취소해 주세요.”

“페넬로페!”

내 말에 공작이 벌컥 역정을 내었다.

“구설수에 오르내릴지 모르는 이 예민한 시기에, 굳이 성인식을 진행할 필요가 있을까요?”

이것은 앞서 생각했던 궁여지책이었다.

이클리스, 그 빌어먹을 놈을 붙잡고 아무리 엔딩을 보려 발버둥 쳐도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나는 차선책이 필요했다.

‘성인식을 아예 없던 것처럼 만들거나 혹은 미루기라도 하면…… 노멀 모드의 시작도 늦춰지지 않을까.’

비록 이것이 통할지 안 통할지 알 수 없는, 그저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인 짓일지 모른다 해도.

나는, 이곳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고작 노예 새끼 하나 때문에 성인식까지 취소해 먹으려는 게냐?!”

공작은 더운 콧김을 내쉬며 분을 쏟아냈다.

나는 그런 그를 멀거니 바라보다 내뱉었다.

“정확히는 그 노예 새끼 하나뿐만은 아니죠.”

“뭐야?!”

“진짜 공녀가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그 성인식 연회가 얼마나 우스워지겠어요, 아버지.”

“진짜 공녀라니! 그 무슨 망발……!”

버럭 화를 내려던 공작은 불현듯 내 얼굴을 마주하고 성질을 내리눌렀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그는 불쑥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힘겹게 입을 닫았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한 손으로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나 여전히 손바닥은 물기 하나 묻어나지 않고 건조하기만 했다.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적.

공작이 다소 지친 음성으로 말했다.

“……이본 얘기는 입단속을 시켜놨으니 염려 마라. 확실해질 때까지 공표할 생각 없다.”

“이미 저택에서 머무르고 있는데, 새어 나가는 소리를 어떻게 다 막을 수 있겠어요.”

“스읍,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만.”

“…….”

“네 성인식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아느냐? 이미 황궁에까지 초대장을 다 발송한 상태야. 취소는 절대 안 될 말이니, 그렇게 알도록 해.”

이미 결단을 내린 듯한 그 단호한 말에, 실망이 망울망울 차올랐다.

나는 물끄러미 공작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제게 이해를 요구하시면서, 들어 달라는 두 개 중 단 하나도 들어주시지 않는군요.”

“……페넬로페.”

“그만 일어날게요.”

나는 그가 붙들기 전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나 그건 기우였다.

허리 숙여 예의 바르게 인사한 후 집무실을 빠져나가는 동안, 공작은 나를 붙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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