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6화
* * *
방으로 막 올라오자, 방문 앞에 우뚝 서 있는 두 명의 장정들이 보였다.
‘호위가 아니라 무슨 교도관 같네.’
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묵례하는 그들을 싸늘하게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막 침구 정리를 끝낸 에밀리가 반갑게 맞이했다.
“아가씨, 오셨어요?”
열심히 일한 에밀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깔끔해진 침대 위에 곧장 벌러덩 드러누웠다.
내 기분이 썩 좋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점심은…… 뭐 드시고 싶으신 거 없으세요? 제가 주방장님한테 말해서…….”
“에밀리.”
“네, 네?”
“그 애는 온종일 뭐 하고 지낸다니?”
그나마 다행인 건 저택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은 여주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방금 전, 성인식 이전에 공표할 생각이 없다는 말로써 공작이 직접 확인해 줬다.
“그 애라면…… 베키에게 물어보고 올까요?”
내 말을 알아들은 에밀리가 목소리를 낮췄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세세하게는 말고. 지금 뭐 하고 있는지, 공작저에 와서 하루를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만 간단히 알아 가지고 와.”
“네, 아가씨. 금방 다녀올게요!”
에밀리는 재빠르게 방 밖으로 나갔다.
몇십 분 후.
“아가씨.”
에밀리는 제 말처럼 금방 돌아와서 소식을 전했다.
“……낮에는 기억을 되찾는 차원에서 하녀장님을 따라 저택을 구경 다니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홀로 산책을 다녀온대요.”
“하녀도 없이?”
“네.”
“산책은 연무장 근처의 숲 쪽으로 가겠지?”
“어떻게 아셨어요?”
에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이클리스를 만나러 가는 것이라는 건 너무 뻔한 일이지 않나.
“지금은 뭐 하고 있어?”
“그게…….”
에밀리는 내 물음에 대답을 조금 망설였다.
그러다 재촉하는 내 눈빛에 못 이겨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과 다과를 들고 있대요.”
나는 그녀가 왜 대답을 망설였는지 눈치챘다.
공작을 만나고 돌아온 직후 기분이 상당히 좋지 않아 보이는 내가 상처 받을 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나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물론 점심은 따로 하실 예정이라고…….”
“그건 됐고. 하나만 더 부탁할 게 있단다. 에밀리.”
나는 애써 위로를 건네려는 에밀리를 빠르게 막아섰다.
“어…… 어떤 것이요?”
“귀를 좀 대 주렴.”
내 속삭임을 들은 에밀리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되물었다.
“그, 그건 왜요?”
“왜긴. 쓸 일이 있으니까 그렇지.”
“하지만, 그걸로는 힘들 것 같은데…… 바로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걱정 말고 시키는 대로 해.”
“알겠어요, 아가씨. 비, 비밀 탈출이죠?”
에밀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 눈치였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가져올게요!”
우려와는 달리 다시 빠르게 방을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묘하게 흥분에 차 있는 듯했다.
‘이제 밖에 있는 놈들 몰래 나가는 일만 남았는데…….’
호위 놈들 몰래 나갈 방법이라면 또 다시 벽을 타는 것밖에 없었다.
벌써 놈 때문에 시행하는 두 번째 탈주였다.
‘망할, 그 새끼 때문에 이게 무슨 개고생이야.’
나는 우울한 눈으로 통창을 바라보았다.
* * *
성인식까지 고작 3일 남은 날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땅거미가 지고 저택의 모든 이들이 저녁 식사를 하기 시작할 때쯤, 에밀리 또한 음식이 담긴 트레이를 끌고 내 방을 찾아왔다.
“아가씨, 그 여자도 지금 식사를 시작했어요.”
“수고했어. 그만 나가 있어.”
“벌써 준비 다 끝마치신 거예요?”
화장대 앞에 서서 길쭉한 소매를 접어 올리고 있는 나를, 그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너무 티 나지 않을까요, 아가씨?”
거울에 커다란 남자 하인 옷을 주워 입은 내 모습이 비쳤다.
에밀리가 제일 작은 크기로 가져왔지만, 그럼에도 품이 많이 남았다.
하지만 크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리 하인들이 입는 옷을 주워 입었다고 한들 나는 누가 봐도, 기차 타고 가면서 봐도 공녀였기 때문이다.
“잘 보렴.”
도움을 받는 처지에서 비밀 공유를 제한할 수는 없었다.
나는 별수 없이 에밀리 앞에서 데릭에게 받은 팔찌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곧장 그것을 손목에 찼다.
자잘하게 달린 자주색 보석들에서 번쩍 빛이 도는 것과 동시에.
“세, 세상에!”
방금까지 거울에 비치던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짧은 고수 머리를 가진 예쁘장한 소년이 나타났다.
“어머나! 마, 마법인 거예요, 아가씨?”
에밀리가 바뀐 내 모습에 기절초풍하며 물었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이따 이 모습으로 돌아올 거니까 얼굴 외워 둬.”
“아가씨인지 전혀 모르겠어요! 대체 그런 물품은 어디서 나신 거예요?”
나는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다.
낮에 여주와 다과를 처든 데발 놈이 줬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까.
“이제 나 그만 내려갈 거니까, 너도 나가 보렴, 에밀리.”
내 원래의 것과는 좀 다른,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에 ‘세상에, 세상에’를 연발하던 에밀리가 오만상을 짓는 내 표정을 보고 입을 ‘헙’ 다물었다.
그녀는 잠시 내 눈치를 보다가, 창틀 쪽으로 이동하는 나를 졸졸 뒤따라왔다.
“……아가씨, 그런데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한 것 같아요. 차라리 저랑 같이 문으로 나가시는 게 어떠세요?”
“밖에 놈들에게는 뭐라고 하게? 사실 공녀의 방에 숨어 살던 정부라고?”
“아, 아가씨!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픽, 웃으며 핀잔을 주듯 말하자 에밀리의 얼굴이 잠시 붉게 달아올랐다.
“그렇지만…… 이렇게 높은걸요.”
창틀 앞에는 내가 낮 시간 내내 묶어 놓은 이불보가 한 꾸러미 쌓여 있었다.
지난 축제 때의 실패를 되새겨 이번에는 있는 천, 없는 천 다 끌어모아서 부피가 꽤 컸다.
또다시 이불을 붙잡고 탈출을 감행할 생각에 막막한 것은 당사자인 내가 가장 심했다.
하지만 문 밖에 떡 버티고 선 호위 놈들 몰래 빠져나가려면 이 수밖에 없었다.
“하…….”
까마득한 아래를 내려다보며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던 그때였다.
〈SYSTEM〉 [순간 이동] 돌발 퀘스트 발생!
하드 모드의 제한 기간까지 앞으로, D-3!
아직도 호감도를 다 못 채웠다면, 당신을 기다리는 공략 대상을 직접 찾아가 보세요!
1. [데릭]
2. [칼리스토]
3. [뷘터]
4. [레널드]
5. [이클리스]
불현듯 눈앞이 환해지더니, 흰 네모창이 떠올랐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와작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미친 게임아, 이런 건 이불보 묶기 전에 나왔어야지!’
한나절 내내 끙끙거리며 이불을 끌어다 묶었던 그 힘겨운 노력들이 무용지물 됐다.
두 주먹을 꽉 쥔 채 허공을 노려보며 부들부들 떨던 나는, 이내 깊은 심호흡과 함께 입을 열었다.
“……에밀리.”
“네?”
“이제 그만 나가서 너도 네 할 일을 하렴.”
“하지만 어떻게 아가씨 혼자 이 험한 곳을 내려가는 걸 두고 볼 수가…….”
“어서. 네가 제대로 일을 수행해야 내가 제때 들키지 않고 돌아오지 않겠니.”
에밀리는 혹 누가 내 방에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망을 봐야 했다.
슬슬 짜증이 담기기 시작하는 내 목소리에, 에밀리는 금세 주눅 든 목소리로 답했다.
“……알겠어요, 아가씨. 정말 조심하셔야 돼요.”
“알았어.”
“정말요. 진짜 조심……!”
“빨리 안 나가?”
기어이 눈을 부라리는 내 모습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 부랴부랴 방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여전히 허공에 떠 있는 흰 네모 창을 바라보았다.
비록 지금 퀘스트가 나타난 것이 짜증은 났지만, 굳이 벽을 탈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다.
선택을 하기 위해 손을 뻗던 나는, 잠시 시스템 창 위에서 멈칫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재빨리 헛생각을 털어냈다.
〈SYSTEM〉 [이클리스]를 선택하였습니다. 지금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예. / 아니오.]
[예]를 누르자 곧바로 눈앞이 하얗게 점멸했다.
계획했던 일이 술술 풀리고 있음에도, 마음이 착잡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여긴…….’
건물은 입구를 제외하고 불 켜진 곳 없이 어두컴컴하기만 했다.
나는을씨년스러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깨달았다.
이곳이 바로, 기사들을 연금해 놓는 ‘영창’ 같은 건물이라는 것을.
확실히 감옥은 감옥인지, 이곳은 견습 기사들이 사용하는 건물보다 더 음침하고 구석진 곳에 박혀 있었다.
나는 곧장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미 감옥으로 들어가기 위한 변명은 생각해 둔 상태였다.
저녁을 먹으러 갔는지, 건물 입구를 지키고 있는 기사는 단둘뿐이었다.
그쪽으로 다가가며 생각해 둔 변명을 속으로 한 번 더 되뇌던 찰나였다.
저벅저벅-. 입구에서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튀어나왔다.
등불 바로 아래 드러났음에도 새카만 머리칼에 나는 눈을 부릅떴다.
‘미친, 데발 놈……!’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기사 두 명이 막 나온 데릭에게 깍듯이 묵례했다.
“들어가십시오, 단장님!”
“고생해라.”
근처에 다다랐던 나는 놈이 짧게 인사를 마치고 바로 걸음을 옮기자, 얼른 고개를 숙였다.
들킬까 봐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벌렁거렸다.
‘괜찮아. 팔찌 낀 후에 변신한 모습은 저놈도 못 봤어.’
나는 팔찌를 가리기 위해 빠르게 접은 소매를 내렸다.
어차피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을 것이다.
지나가는 하인 1로 여기라고 속으로 빌고 있을 즈음, 예상대로 놈이 내 앞을 대수롭지 않게 스쳐 지나갔다.
‘휴…….’
안도의 한숨을 쉬며 숙였던 고개를 막 들던 순간이었다.
불현듯 놈이 우뚝 걸음을 멈췄다.
“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