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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57화 (157/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7화

데릭 놈이 갑작스레 휙 뒤돌아 나를 불렀다.

‘설마 눈치챈 건가?’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나는 내린 소매가 손등까지 가린 것을 확인하고, 가까스로 고개를 들었다.

“……저, 저를 부르셨습니까?”

굳이 연기하지 않아도 허스키한 목소리 탓인지 어리숙한 하인 같은 말투가 튀어 나왔다.

데릭 놈의 머리 위 주황색 게이지 바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히 빛났다.

서늘한 시선에 마른침을 삼키고 있을 즈음.

“저택에서 일하는 자인 듯한데.”

나를 아래위로 훑던 놈이 툭 내뱉었다.

“여긴 어쩐 일이지?”

“아…… 수, 수감된 노예의 세탁물을 가지러 왔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준비했던 답을 내놓았다.

“노예? 감히 누구 명령으로 말이냐.”

“공녀님의 명으로…….”

“공녀?”

찰나, 푸른 동공이 살짝 커졌다.

그러나 이내 놈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페넬로페…… 그 아이가 시키던가?”

“아니요. 이본…… 아가씨께서 시키셨습니다.”

나는 놈의 눈치를 살피며 찬찬히 말했다.

일부러 눈을 피하지 않았다.

거짓말이었지만, 괜히 미심쩍게 굴었다간 놈이 그대로 여주에게 확인하러 갈 수도 있었기에.

그러면, 그보다 더한 낭패는 없으리라.

뒷목을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이 여실히 느껴질 무렵.

“……입조심해라.”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데릭이 돌연 사납게 쏘아붙였다.

“아직 확정도 나지 않은 일을 내뱉고 다니다니, 주둥이가 너무 가볍군. 분명 조심하라는 명령이 전해졌을 텐데.”

나는 뜬금없는 화제 전환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먼저 물어봐 놓고 왜 갑자기 성질이야?’

극진히 대우해 줘도 지랄이라며 속으로 툴툴거리던 나는, 문득 여주도 초반에 까탈스러운 형제 놈들에게 시달렸던 것을 떠올렸다.

‘하여간 성격 더러운 놈.’

그러나 나는 정체를 들키면 큰일 나는 처지였으므로, 황급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 죄, 죄송합니다, 소공작님. 시정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허리가 90도가 될 만큼 비굴하게 구부리자, 내가 생각해도 제법 하인다운 모습이 됐다.

오만하게 눈을 내리깔고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데릭이 물었다.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이인가?”

“예, 예.”

“이상하군. 묘하게 낯이 익는데…….”

놈의 말에 다시 한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무 대답도 못 하고 그저 얼어붙어 있던 때.

“들어가 봐라.”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마침내 데릭 놈의 허락이 떨어졌다.

“네! 가, 감사합니다. 살펴 가십시오!”

마지막까지 굽신굽신 머리를 조아리자, 데릭 놈은 답도 없이 몸을 돌려 쌩하니 걸어갔다.

‘망할 놈.’

어두운 숲 저편으로 사라지는 놈을 바라보던 나는, 소매 아래로 조심스럽게 중지를 펼쳤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허겁지겁 건물로 돌아섰다.

놈을 마주치는 바람에 생각보다 시간이 지체돼 버렸다.

“저, 노예를 만나러 왔는데…….”

“들어가 봐라.”

이미 데릭과 내 대화를 다 들었는지, 지키고 선 기사들은 순순히 길을 터 주었다.

“아, 그 노예 놈은 지하에 있다. 계단 위로 올라가지 말고 아래로 내려가라고.”

친절하게도 설명을 덧붙여 준 덕분에 나는 헤매지 않고 곧장 이클리스 놈에게로 향할 수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계단이 곧바로 이어졌다.

깊은 지하인지 드문드문 등불이 걸려 있는 음산한 계단이 꽤 오래 이어졌다.

마침내 도달한 끝은, 진짜 감옥처럼 온통 쇠창살뿐이었다.

잘 이용하지 않는 건지, 낡고 오래된 감옥 안은 텅텅 비어 있었다.

등불조차 닿지 않는 가장 끄트머리만 빼고.

보안에 자신이 있는 건지, 지하에는 명목상의 간수 한 명조차 없었다.

‘그래도 나름 견습 기산데, 대우가 형편없네.’

아직 확인 절차가 모두 완료된 게 아니라 석방은 당장 못 해 준다 치더라도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어찌 보면 ‘진짜 공녀’를 데리고 온 가문의 은인임에도 이랬다.

놈을 향한 공작과 데릭의 적대감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지하 감옥을 쭉 둘러보던 나는 서둘러 소매를 걷고 팔찌를 풀었다.

예전 같았으면 원래 스토리대로 공작이 데리고 오지 않았기에 이런 것이라며 미약한 죄책감이나마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젠 그런 감정을 느낄 새도 없었다.

놈이 때린 뒤통수가 너무 아팠기에.

마법이 풀리자 곧장 어깨 위로 구불거리는 머리칼들이 쏟아져 내렸다.

팔찌를 주머니 속에 넣자, 왼쪽 손에 남은 것은 커다란 루비 반지 하나뿐이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나는 지체 없이 끄트머리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인영은 움직이지 않았다.

저벅-.

마침내 목적지 앞에 우뚝 선 나는, 옆 벽에 있는 등불 하나를 뽑아 들고 쇠창살 너머를 비췄다.

어둠 속으로 훅, 빛이 쏟아져 들며, 처량 맞게 쭈그려 앉아 있는 회갈색 머리통을 비췄다.

“안녕.”

나는 묵묵히 인사를 건넸다.

사람이 걸어오는 인기척에도 내내 미동 없던 몸이 흠칫, 들썩였다.

이클리스는 매우 느린 속도로 고개를 들었다.

내가 비추는 등불 때문에 눈이 부신지 잠시 꿈틀거리던 눈이, 이내 천천히 확장됐다.

“……주인님?”

갑작스럽게 나타난 내 모습이 믿기지 않는지, 이클리스가 처음 보는 얼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그는 비척비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한 발짝씩 내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음침한 지하에 가둬 뒀길래 퍽 억울한 취급을 당하는 줄 알았는데, 수갑도 족쇄도 없는 것을 보니 그런 것도 아닌 모양이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클리스의 행색을 관찰하는 사이, 어느새 그가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놈이 불쑥 창살 사이로 손을 뻗었다.

뺨에 서늘한 타인의 체온이 느껴졌다.

나는 주춤, 물러설 뻔한 몸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꿈……?”

며칠 새 수척해져서, 진짜 인형 같은 얼굴로 이클리스가 혼잣말했다.

그 순간.

〈SYSTEM〉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하겠습니까?

[1800만 골드 / 명성 400]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이 빌어먹을 상황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이렇게 시스템 창이 선명한 것을 보니, 꿈은 절대 아니었다.

“……그럴 리 없잖니.”

나는 어금니를 사리물고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뺨에 닿은 손바닥이 움찔 떨렸다.

꿈 따위가 아님을 그제야 알아차린 건지, 빛에 반사되는 잿빛 눈동자가 마구 뒤흔들렸다.

“여, 여긴 어떻게…….”

그가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짓고 물었다.

나는 여전히 내 뺨을 쓰다듬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목적 달성을 위해서.

“잘 지냈니?”

이클리스는 한차례 숨죽였다가, 이내 고요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주인님은요?”

“글쎄.”

격정이 일던 놈의 동공은 짧은 사이 침잠되었다.

언제나처럼 무미건조한 그것을 빤히 응시하며, 나는 입을 열었다.

“잘 못 지냈어.”

“…….”

“이런 허접한 꼴로 몰래 널 만나러 와야 할 만큼.”

예전 같았으면 그에게 전혀 꺼내지 않았을 말들이 술술 잘도 흘러나왔다.

이클리스는 내 말에 동요하지 않았다.

한 꺼풀이 벗겨진 우리는 이토록이나 멀고 삭막한 사이였다. 부스러져 내리는 모래성처럼.

“소식은 들었니? 도망을 치려던 네 고국인들이 모두 붙잡혀서 처형당했다더구나.”

“…….”

“덕분에 농장에 남은 델만인들도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지.”

얼굴을 보면 분명 순식간에 분노가 차오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 곱상한 얼굴을 마주하니 그렇게까지 치밀어 오르진 않았다. 참을 만했다.

내 건조한 눈빛에 화답하듯 이클리스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에 힘입어 무덤덤하게 하고자 한 말을 내뱉었다.

“……사흘간 수도 없이 생각해 봤어.”

“…….”

“네가 내게 왜 그랬을까. 내가 더 못 해 준 게 있었을까. 아니면 신분 상승이 그토록 중한 일이었는데,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걸까.”

내 시선은 점점 내려가 놈의 목덜미에 닿았다.

여전히 그의 목에는 노란 구슬이 달린 초커가 고이 채워져 있었다.

“혹은 또 무슨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걸까…….”

“……주인님.”

“필사적으로 생각해 봤어, 이클리스.”

나는 초커에 머물던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들어 올렸다.

“그런데 면천도, 작위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더구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뺨에 닿아 있는 손가락이 그 순간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나는 매번 그가 하는 것처럼, 그 뺨에 얼굴을 비비며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그토록 원망스러웠니?”

“주…… 인님.”

“널 사 온 나를 역모로 엮어서 죽이고 싶을 만큼? 혹은 공작의 친딸을 데려와 끌어내리고 싶을 만큼 밉고 증오스러웠어?”

“그게…….”

이클리스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으니, 언제나 밀랍 같던 표정도 미세하게 창백해지는 것이 보이긴 했다.

“아니면, 면천시켜 줄 힘조차 없는 주인을 갈아 치우고 싶었던 건가?”

“그건……!”

불현듯 이클리스가 소리를 높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주인님.”

“…….”

“제가 어떻게 감히 그런 생각을 하겠어요.”

“그런데 내게 왜 그랬어, 이클리스.”

최대한 부드럽게 회유하려고 했는데, 자꾸만 따지는 듯한 어투가 튀어나왔다.

나는 격해지는 감정을 힘겹게 억눌렀다.

그리고 내 뺨에 닿아 있는 손을 밀어낸 후, 역으로 창살 안으로 양 손을 뻗어 놈의 얼굴을 살며시 붙들었다.

그리고 화가 나지 않은 것처럼.

이 상황이 누구보다 걱정스럽고 비통한 사람처럼.

“네가 고국인들과의 내통에 날 끌어들인 탓에, 난 이제 더는 네게 관여할 수 없게 되었단다.”

“…….”

“그렇다면, 이제 네 새 주인은 과연 누가 될까?”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놈이 드물게 단호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저는 곧 면천할 테니까, 이제 더는 주인이 필요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야?”

“고발자가 같은 델만 출신 노예라는 것을 황궁에서도 알게 되었으니, 타국인들에게 전례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평민으로 올려 두려 하겠지요.”

“그럼 첫째 오라버니의 권유는 왜 거절했니?”

“그래야 별다른 의심 없이 이곳에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

나는 풀리지 않았던 미스터리에 눈을 부릅떴다.

“……뭐?”

“소공작에게 면천이나 작위를 요구했다면, 그 핑계로 저를 저택에서 내보내려 하겠죠.”

“…….”

“역겹지만 순수하게 가문에서 베풀어 준 은혜를 갚는 충신 노릇을 해야…… 에카르트 공작저에, 당신 곁에 안전히 남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주인님.”

“내 곁……?”

나는 꼭 처음 말을 내뱉는 아이처럼 어물어물 되뇌었다.

“네. 주인님의 곁.”

놈이 고개를 까딱이며 확답했다.

“하.”

그와 동시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무 기가 막혀서, 놈이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니, 이클리스.”

“…….”

“너는 지금까지 쭉 내 곁에 있었어. 하지만 네가 진짜 공녀를 데리고 온 덕분에 나는 공작령으로 쫓겨날 판이란다.”

“…….”

“그런데 네까짓 게 무슨 수로 내 곁에 남아.”

“그러면…… 제가 주인님을 따라 공작령으로 전출 지원을 할게요.”

“헛소리 좀 집어치워!”

그 순간, 나는 악착같이 내리누르던 모든 것들이 무용지물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클리스는, 그간 내가 가장 가까이 뒀던 등장인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놈의 얼굴을 붙들고 있던 손이 보드라운 피부를 긁듯이 타고 내려가, 와락 멱살을 쥐었다.

“내가 언제 그걸 원한다고 한 적 있어?”

놈의 정수리 위 검붉은 게이지 바가 위태롭게 깜빡였다.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터져 나오는 울화통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 멋대로 추측해서, 네 멋대로 결론 내린 거잖아, 이 미친 새끼야!”

“이번에는 아니에요, 주인님.”

“……뭐?

“주인님이 아니라 저를 위해서였어요.”

“…….”

“당신이 아니라, 온전히 나를 위해서.”

그 순간, 눈앞이 아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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