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8화
나는 언제나 등장인물들이 취할 모든 행동들을 기를 쓰고 예측하고, 그에 맞춰 행동했다.
그렇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저를 위한 행동이었다는 이클리스의 말에, 머릿속이 진탕이 되다 못해 그저 새하얘졌다.
“……왜?”
멍청하고, 무의미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에도 나는 정말로 알 수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줬잖아.”
숨이 거칠어졌다.
몰빵 남주를 정한 직후부터, 나는 최선을 다했다.
공작과 두 아들 놈들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 가며 이클리스를 두둔하고 보살폈다.
“필요한 물품도, 네 처우도, 스승도, 해 달라는 대로 다……!”
가끔 큰 위험 부담을 감수해야 하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분명 게임 공략법대로 차근차근 진행해 왔다. 틀림없었다.
“……다 해결해 줬잖아. 다 해 주려고 노력했잖아! 그런데 왜?”
나는 놈의 멱살을 붙들고 절박한 목소리로 연신 물었다.
“바로 면천을 시켜 주지 않아서 그래? 아니면, 내가 스승을 더 빨리 구해 주지 못해서?”
“…….”
“대답해! 왜! 왜 이제 와서 이러는 건데-!”
왜 하필, 탈출을 며칠 앞둔 이 시점인가.
왜 하필, 차선을 만들 수도 없는 이 상황에 이르러서야.
나는 대답 없는 놈을 마구 뒤흔들며 절규했다.
“넌 날 사랑하잖아. 맞지? 응?”
“…….”
“날 사랑하면서, 내게 왜 이래? 응? 대체 왜-!”
99%면 사랑이 아닌가. 사랑이 아닐 리 없지 않은가.
“너 날 사랑하잖아, 이클리스.”
그렇다고 말해.
나는 놈의 정수리 위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아니, 그것은 흡사 구걸이었다.
천 자락을 쥔 양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악에 받친 채 그를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쯤.
“알고…….”
허연 거스러미가 일어난 입술이 움찔, 달싹였다.
“알고…… 계셨어요?”
이클리스는 나를 내려다보며 메마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눈이 한순간 진동했다.
“모를 리가 없잖아.”
당황하는 것 같은 그 기색에, 나는 울음 섞인 괴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향한 이클리스의 눈이 점점 위험하리만치 짙어지던 순간을 기억한다.
어느 순간부터 감정을 조금씩 내비치고, 하나둘 발칙한 요구를 하던, 그.
난 그 모든 것들을 청신호로 여겼다.
“세상 그 어느 노예가 그딴 발칙한 눈으로 주인을 바라보겠니.”
흔들리던 이클리스의 잿빛 동공이 그 순간 우뚝 멈췄다.
그의 턱이 딱딱하게 불거졌다.
“알고 계셨으면서…….”
“…….”
“……왜 제가 도망가자고 할 땐 거절하셨어요?”
“널 따라 도망가면. 그럼 뭐가 달라지는데?”
게임 공략 중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그나마 한순간이라도 고려해 본 것이었다.
다른 남주들의 호감도 폭락이나 여러 돌발 상황을 고려하면, 지금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루트였다.
그런 것을 다 떠나 진짜 페넬로페였다 하더라도, 그런 위험천만한 짓을 감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다 끝난 마당이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도망에 집착하는 그가 조금도 이해 가지 않았다.
“널 따라서 멀쩡한 내 집, 내 돈 놔두고 쫓기는 처지가 되라고? 그러면, 그다음은?”
“…….”
“아버지와 내 두 오라버니들에겐 뭐라 그래? 지금 영위하는 생활이 거지 같아서 타국으로 망명하는 거라고? 아니면 노예에 미쳐서 지위도 긍지도 필요 없다고 그럴까?”
“이럴까 봐 그랬어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클리스가 불쑥 대꾸했다.
“당신이 좀처럼 그 자리에서 내려올 것 같지 않으니까.”
“……뭐?”
“세상 누구보다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이 빌어먹을 집구석에서 조금도 벗어나려 하지 않았잖아요.”
“그게 무슨…….”
그게 무슨 소리냐 되물으려던 나는 흠칫 입을 닫았다.
등불에 반사된 그의 눈이 기이하게 번뜩이고 있었기에.
“마물에 부상당한 이본을 만났을 때부터 얼마나 고민했는지 몰라요, 주인님.”
“…….”
“쥐도 새도 모르게 그녀를 죽여 버리면…….”
“…….”
“그래서 당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모든 것들을 제거하면, 환히 웃어 줄까.”
그 말을 하는 이클리스가 문득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와 달리, 나는 날카롭게 숨을 들이켰다. 섬뜩함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생각을 알 수 없다곤 여겼지만, 이토록이나 음험하고 끔찍한 속내를 감추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놈의 멱살을 잡은 손을 떼고,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려던 때.
그가 와락 내 손을 잡아 채, 억지로 제 뺨 위에 얹었다.
“그런데, 그러면 제가 오히려 주인님을 돕는 꼴이 되잖아요.”
“…….”
“주인님은 이 집에 있어서 불행한 건데, 이본을 죽이면 당신이 진짜 공녀가 돼 버리잖아.”
“너…….”
“그래서 달리 생각해 봤어요. 공작의 친딸을 이용해서, 주인님을 이 집구석에서 점점 고립시키고, 이 집 인간들에게 학을 떼게 하다가…….”
“이거 놔, 놔.”
그토록 알고 싶었던 이유였지만, 나는 더는 놈의 질척한 속내를 듣고 싶지 않았다.
질겁하며 잡힌 손을 빼내려 했다. 그러나 놈은 놔주기는커녕 내 손바닥에 마구 뺨을 비볐다.
“이루려는 목적을 포기시키고 주저앉히는 게 어떨까…… 하고.”
“목적……?”
순간 사고가 멈췄다. 나는 더듬더듬 되물었다.
“무슨 목적?”
“경매장에서 저를 사 와서 이용하는 이유 말이에요.”
그 목적은 놈에게 호감도를 몰빵해서 이 미친 게임을 탈출하려는 것이었고…….
‘그걸 눈치챘다.’
내가 모종의 이유로 놈을 데리고 와 철저한 계산 아래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흐읍.
나는 거칠게 숨을 들이켜던 그대로 딱딱하게 얼어붙었다.
“신분? 그까짓 게 뭐라고요.”
그런 내 반응에 그의 입가에 뜬 희미한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마치 나를 비웃듯이.
“그런 거야 제 힘으로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어요. 하나뿐인 소드 마스터를 제국에서 놓칠 리 없잖아요.”
“너…… 너…….”
나는 바보처럼 놈을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그간 나를 감쪽같이 속여 온 놈의 뺨을 내려치기는커녕, 잡힌 손조차 빼내지 못한 채.
놈은 그런 나를 보며, 풀 죽은 강아지처럼 눈꼬리를 조금 늘어뜨렸다.
“……하지만 그러면, 내가 가질 수가 없잖아.”
“뭘……?”
“당신 말이에요, 페넬로페.”
쪽-.
놈은 도망을 가자고 했던 날처럼 나를 응시하며 천천히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입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목적을 위해 날 철저히도 이용하는 당신.”
“…….”
“꿀처럼 달콤한 말을 늘어놓고, 조금이라도 다가가려 하면 곧바로 달아나는 당신.”
나를 똑바로 직시하는 회갈빛 눈은, 전혀 사랑하는 사람의 눈처럼 보이지 않았다.
잔뜩 충혈된 흰자위, 붉게 달아오른 눈가.
그는 오히려 나를 증오하고 싫어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이런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는 널.”
그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마침내 내가 원하는 말을 토해 냈다.
“사랑해, 페넬로페.”
〈SYSTEM〉 [1800만 골드]를 차감하여 [이클리스]의 호감도를 확인합니다.
(남은 보유자금 : 999,999,999+)
그토록 바라던 말을 들었음에도 나는 처참하게 얼굴을 허물어뜨렸다.
[호감도 99%]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빌어먹을 게임 속이었다.
“나라고 고국인이고 모두 팔아먹은 찢어 죽일 매국노가 되어도-.”
호감도가 오르지 않았다.
남은 그 단 1%의 호감도가 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영원히 그 1%를 채우지 못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널 가지고 싶어, 페넬로페 에카르트.”
“너…… 너 정말 미쳤어?”
“맞아요. 당신이 날 이렇게 미치게 만들었어.”
이클리스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히 빛나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지껄였다.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그렇게 말간 얼굴로 모르는 척할 때마다…… 미치고 환장할 것 같아요.”
“…….”
“그런데 어쩌겠어요. 그런데도 이렇게 사랑스러운데…….”
놈의 눈빛이 이제야 애틋함 비슷한 것으로 변했다.
그 모든 것이 내게는 가증스럽고 소름 끼치게만 느껴졌다.
새하얗게 얼어붙은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내가 썩 이상했는지 놈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왜 이렇게 떨어요, 주인님.”
“…….”
“화났어요?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요, 저야말로. 이제 이곳에 있는 걸 모두가 인정할 만큼 제 가치를 증명했어요, 주인님.”
“…….”
“아니면……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제가 무서워요? 가엽게도.”
“미친 새끼.”
힘겹게 숨을 헐떡이던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진저리치며 읊조렸다.
그러나 놈은 상스러운 욕설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 손을 겹쳐 잡고 있던 손가락을 슬며시 움직여, 한쪽 손가락을 진득하게 문질렀다.
정확히는, 루비 반지가 끼워져 있는 검지를.
“……떨지 마세요, 주인님. 앞에 말은 그냥 의미 없이 지껄인 거고……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
“당신은 여전히 에카르트의 공녀고, 난 그런 당신의 하나뿐인 기사예요. 하나뿐인.”
“…….”
“이렇게 당신에게 미쳐 버린 놈의 고삐를 직접 붙들고 있는데 뭐가 그렇게 걱정돼요.”
루비를 누를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그 위를 넘나들던 이클리스는, 사랑스럽고 또 증오스럽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놈의 머리 위 검붉은 색이, 고여 썩어 버린 피처럼 비릿하게 빛났다.
“……당신만이 내 목줄을 틀어쥘 수 있어요, 사랑하는 나의 주인님.”
나는, 그제야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클리스 몰빵 엔딩은 실패했다.
공략 대상인 그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고, 그것을 그가 잘 알고 있다는 것.
그것이 내 패착이었다는 걸.
나는 이클리스 루트에 완전히 실패했고, 이제라도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할 때였다.
“……목줄?”
짧은 백일몽에서 깨어나듯, 뿌연 안개가 가득 찼던 머릿속이 서서히 걷혔다.
실패라는 게 확실해진 이상, 더는 놈에게 절절맬 필요가 없어졌기에.
“내가 왜?”
“…….”
“버릇없는 개는 목줄을 당겨서 훈육이라도 시킬 수 있지. 가치? 넌 그럴 가치조차 없어.”
나는 실패로 인한 충격을 받은 게 거짓말처럼,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감히 주인을 물어뜯었잖아.”
“……주인님.”
“입, 닥쳐.”
이클리스의 눈빛이 한차례 흔들렸다.
나는 놈에게 잡혀 강제로 놈의 뺨을 쓰다듬던 손을 뜯어내다시피 뿌리쳤다.
“……페넬로페.”
그 와중에도 나를 붙들기 위해 뻗어지는 손을 싸늘하게 쳐 내며, 나는 창살에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난 널 이용하려고 데리고 왔어. 그런데, 그게 뭐? 결국, 너 때문에 목적을 이루긴커녕, 개판 오 분 전이 돼 버렸는데.”
“…….”
“개는 개답게 굴어야지. 주인을 무는 개새끼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니, 이클리스.”
짓씹듯이 뇌까린 후, 나는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웃었다.
넌 이제 효용 가치가 없어졌노라고.
이클리스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슬로우 모션처럼 진행되는 그 찰나의 순간.
나는 놈의 눈앞에서 거칠게 루비 반지를 뽑아 들었다.
“주인……!”
그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부를 적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창살 안으로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깡-! 챙, 캉-!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려 퍼졌다. 몇 번 어딘가에 부딪혀 번쩍이던 쇠붙이는 금방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이클리스를 데리고 온 후, 단 한 번도 반지를 빼놓은 적이 없던 검지가 텅 비었다.
그는 망연자실 내 허전한 손을 바라보았다.
“내가 말 했지. 배신은 죽음뿐이라고”
“…….”
“이제 내게 넌 죽은 존재야, 이클리스.”
올 때와는 달리, 나는 망설임 하나 없이 휙 몸을 돌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