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59화
챙-!
컴컴한 어둠 저편으로 집어 던져진 반지의 궤적을 좇을 무렵.
앞쪽에서 ‘쎄엑’ 하고 미약한 바람이 불었다.
반사적으로 휙 고개를 돌리자, 진분홍빛 머리칼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아스라이 흩날렸다.
“잠깐…….”
이클리스는 손을 뻗었다. 붙잡기 위해서였다.
“주인, 주인님.”
그러나 채 잡기 전에 페넬로페는 완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클리스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반지를 찾아 주워 줘야 하는데, 그의 주인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멀어져 갔다.
“가지, 가지 마세요, 주인님, 잠깐.”
이클리스는 멀어지는 주인을 애타게 불렀다.
속 타는 심정과는 달리 건조하고 딱딱하기만 한 목소리가 원망스러웠다.
“주인님.”
그런데 이상했다.
이쯤이면 주인이 한 번쯤은 돌아봐 줄 때도 됐는데…….
그의 주인은 항상 그랬다.
독한 말을 내뱉으며 당장 자신을 경매장으로 돌려보낼 것처럼 굴다가도, 결국엔 그를 용서했다.
원하는 것은 모두 들어주며 항상 그에게 여지를 남겼다. 슬쩍슬쩍 선을 넘어도 관대하게 넘겼다.
그래서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을 단념할 수도 없게끔.
그런데 자신을 그렇게 길들인 장본인이, 개새끼가 기어이 주제를 모르고 기어오르게 만든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가느다란 신형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점점, 점점 멀어진다…….
불현듯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 주인님! 가지, 가지 마세요, 아직 할 말이……!”
머리통을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자기 번쩍 정신이 들었다.
혼탁했던 머릿속이 점점 맑아졌다.
주인님이 반지를 왜 던진 거지?
“페넬로페.”
그 순간의 표정이 어떠했던가?
“페넬로페, 가지 마-!”
이클리스는 멀어지는 여자를 잡기 위해 좁은 창살 틈으로 팔을 뻗었다.
뿌드득-.
거의 몸을 욱여넣다시피 한 탓인지, 둔중한 통증과 함께 소름 끼치는 소리가 그의 몸에서 새어 나왔다.
당연하지만, 닿을 리 없었다.
훌쩍 멀어진 진분홍빛 머리카락으로 뻗어진 그의 팔이 허공에서 볼품없이 덜렁거렸다.
“페넬로페!”
제국으로 끌려온 이후, 처음으로 두려움이 엄습했다.
“페넬로페-!”
저벅, 저벅-.
그러나 발걸음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은 채 점점 희미해지고.
종국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그게 끝이었다.
그의 하나뿐인 주인은 떠났다. 이 춥고 어두운 감옥에 그, 그리고 그와 긴밀한 관계였다는 증표만을 남겨 둔 채.
창살에 딱 달라붙어 허망한 표정으로 감옥의 복도를 바라보던 이클리스가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반지.”
그는 번뜩 몸을 물렸다. 그리고 아까 전 반지가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났던 구석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등불 빛이 닿지 않는 감옥 안쪽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컴컴했다.
이클리스는 망설임 없이 더러운 바닥에 엎드렸다.
그리고 개처럼 기며 바닥을 더듬거렸다.
다행히 반지는 수챗구멍에 빠지기 직전, 돌바닥의 틈에 아슬아슬하게 껴 있었다.
그는 그것을 손에 꼭 쥐고 다시 불빛이 닿는 창살 앞으로 갔다.
방금 전까지 그의 주인이 서 있던 자리였다.
빛에 드러난 빨간 루비는 다행히 흠집 하나 없이 멀쩡했다.
그러나 루비 아래, 금반지가 완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더는 손가락을 끼워 넣을 수도 없을 정도로.
그 순간의 주인이 얼마나 있는 힘껏 집어 던졌는지 알 듯했다.
이리저리 돌려 가며 유심히 반지를 돌려 보던 이클리스의 눈매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왜지?”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방금 전의 주인이.
물론, 이본을 데려가면 그녀가 전에 없이 거세게 분노하리란 것쯤은 예측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꼭 자신을 내버리겠다는 것처럼…….
‘주인님이 날 버릴 리 없어.’
이클리스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날 계속 이용해야 하잖아, 페넬로페.”
그러니 그 이루려는 목적 때문이라도 그녀는 자신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야 하는데…….
- 이제 내게 넌 죽은 존재야, 이클리스.
반지를 던지던 그 눈빛,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돌아서던 그 얼굴은 오히려 후련해 보였다.
차라리 잘됐다는 듯.
“왜…… 왜? 왜, 페넬로페?”
공작저로 이본을 데리고 오는 중에도 주인이 저를 놓지 않을 거라 여기던 그 굳건한 믿음이, 조금씩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럴 리 없어.”
이클리스는 반지를 부여잡은 채 혼란스러운 얼굴로 연신 현실을 부정했다.
지금은 주인이 너무 화가 나서 그런 것뿐이다.
곧 화가 풀리면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랬듯 꽃처럼 어여쁘게 웃으며…….
“……이클리스.”
그때였다.
몽롱한 상념 속에서 맴돌던 그의 이름이 현실이 되어 그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발치에 부드러운 치맛자락이 어른거렸다.
환희 대신 절망이 스며들었다.
상상 속에서 어여쁘게 웃던 이의 음성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렸기에.
“이클리스, 어디 아파?”
상냥한 음성에, 이클리스는 우두커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등불 아래, 연한 분홍색 머리칼이 넘실거렸다.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고 있는 푸른색 눈동자.
착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현저한 모습에, 부지불식간 뜨거운 것들이 들끓었다.
이클리스는 튀어 오르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가는 목을 와락 움켜쥐었다.
“커헉-!”
갑작스럽게 숨통이 잡힌 여자는, 푸른 눈을 부릅뜬 채 버둥거렸다.
이클리스는 당황과 경악으로 펄떡이는 작은 몸을 무감각하게 바라보았다.
“널 죽이지 않고 공작저로 데려가 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며.”
“이, 이클…… 컥!”
“소드 마스터가 아니면 주인님께서 실망하실지도 모른다고 해서 오러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것도 밝히지 않았고, 그 때문에 동향인들도 다 팔아먹었어.”
“커흑…….”
“네가 하라는 대로 했어, 이본.”
눈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이본은 벌써 그의 눈에 몇 번이고 찢겨 죽었을 것이다.
이미 있는 힘껏 목을 죄고 있음에도, 이클리스는 더 없이 섬뜩한 살기를 내뿜었다.
“그런데 주인님이 꼭, 다신 나를 안 볼 것처럼 구셔. 날 죽은 존재로 여기겠대.”
“이클, 리…… 헉.”
“왜 그렇지?”
새하얗던 이본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맑은 눈에 흉측한 핏발이 섰다.
곧 죽을 듯 껄떡이는 가녀린 여자의 모습에도 이클리스는 손에 힘을 풀지 않은 채 고요히 윽박질렀다.
“어? 페넬로페가 왜 그러는 거야.”
“크흑, 커억…….”
“대답해.”
스르륵, 동공이 풀리면서 자꾸만 뒤로 넘어갔다.
이본은 종용하는 이클리스의 팔을 필사적으로 툭툭 쳤다.
대답을 할 테니 풀어 달라는 의사였다.
살벌하게 그녀를 노려보던 이클리스가 마지못해 목을 감싸고 있던 양 손을 확 떼어냈다.
“푸헉! 허윽, 허억…….”
이본이 숨넘어갈 듯 거칠게 기침을 토해 냈다.
한참 후 기침이 잦아들 무렵.
선명한 손가락 자국이 새겨진 목을 매만지며, 그렁그렁한 눈으로 물었다.
“뭐, 뭐가 문젠데?”
“뭐가 문제?”
이클리스의 눈빛이 사납게 일렁였다.
“오러를 사용할 줄 안다고 밝혔으면 바로 면천을 받았을 거다. 고국인들을 팔아먹는 더러운 짓까지 하지 않아도 온전한 내 힘으로, 정식으로 작위를 받아서…….”
“받아서?”
이본이 중간에 그의 말을 끊고 답했다.
“작위가 생겨도, 그래도 공녀님의 곁에 설 수 없어.”
정말로 죽일 것처럼 제 목을 쥔 사내임에도, 이본은 퍽 서글픈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적국의 포로에게 작위를 내려봤자, 자작이 최대일 거야. 재산 없는 자작은 평민과 다를 게 없어, 이클리스. 공녀님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계시잖아.”
“…….”
“가엾은 사람. 우리 같은 처지는 원래 그렇다는 걸 잘 알잖아.”
“너와 내가 왜 같은 처지야.”
이클리스가 짓씹듯 물었다.
이본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답하지 않았다.
기분 더러웠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같은 밑바닥을 기고 있었고, 그 밑바닥에서 벗어나려고 아등바등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그도 꿈을 꿨었다.
정식으로 검을 배워 제 능력을 입증하고, 정식으로 작위를 받아 노예가 아닌 기사로 주인의 옆에 당당히 서겠노라고.
순진하고 순수했던 열망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그는 차차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주인과는 가까워질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는 걸.
그녀에게 떼를 쓰고 졸라 스승을 찾고, 가르침을 받고, 오러를 쓰게 되어도 그는 여전히 노예였다.
면천, 그 이상으로 오르려면 누구나 인정할 공로가 필요했다.
그런 그를 부추긴 것이 이본이었다.
농장에 마물이 나타나던 날, 공격을 받고 다친 채 쓰러져 있던 그녀를 노예들이 돌봤다.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이클리스는 첫눈에 그녀가 공작의 친딸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래서 페넬로페를 위해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본은 그의 손에 목이 죄이는 순간에도 그의 허황된 꿈을 동정했다.
“공녀님이…… 지금 혼란스러운 시기여서 그래.”
목이 죄인 후유증 때문인지 이본은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로 흥분한 이클리스를 달랬다.
“갑자기 내가 나타난 데다, 여러 상황이 겹쳤으니 얼마나 놀라고 속상하시겠어.”
“…….”
“처형당한 분들은 너무 슬프지만…… 그게 최선이었어, 이클리스. 그분들이 도주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잖아.”
“…….”
“공녀님께서도 곧 네 진심을 알아주실 거야. 응? 이 집에서 너만큼 그녀를 생각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그녀는 천사같이 선량한 얼굴로 제 목을 조른 자를 위로하고 희망을 덧씌웠다.
이본은 가족을 원했고, 이클리스는 페넬로페를 원했다.
거래가 성사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는 그를 통해 공작저에 들어갈 수 있었고, 그는 이본을 통해 까마득한 페넬로페를 제 곁으로 끌어내렸다.
아니, 곧 끌어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이클리스는 종종, 이것이 정말 맞는 길인가 의문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런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걸까.
“잘 생각해 봐, 이클리스. 만약 네가 이러지 않았다면, 공녀님이 어떻게 되었을지.”
이본이 자장가라도 부르듯 사근사근하게 말을 건넸다.
이클리스는 그 말에 홀린 것처럼 상념에 잠겼다.
그날, 페넬로페가 마차도 없이 황궁에서 홀로 돌아왔던 그날이 도화선이었다.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끼던 그녀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그대로 뒀다면, 그녀는 기어이 공작저 놈들과 귀족 새끼들의 무시와 경멸 속에서 말라 죽어 갔을 것이다.
이클리스의 눈앞에 피폐해진 몰골로 울부짖는 페넬로페가 떠올랐다.
살려 줘. 죽여 줘. 아니, 살려 줘. 나를 죽여 줘…….
그녀를 이곳에서 구출해야 했다.
빨리 그녀를 데리고 나가야 그녀가 살 수 있는데…….
공녀의 불행한 환영을 상상하는 이클리스의 눈이 점점 혼몽하게 풀렸다.
그래서 그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슬며시 무언가를 꺼내 제게 들이미는 이본의 행동과.
“……디 아쑴.”
작게 주문을 외는 소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