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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0화 (160/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0화

“너만이 공녀님을 구할 수 있어, 이클리스.”

이본은 투박한 무언가를 이클리스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녀가 들고 있는 지저분한 조각에서 점차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이클리스는 완전히 홀린 사람처럼 그것을 바라보았다.

회갈색 동공 위로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런데 공녀님은 너를 싫어해. 네가 보잘것없고 비참한 신세라. 고작 패전국의 노예 따위에 불과해서.”

이본이 세뇌하듯 속삭였다.

“그러니 그녀를 너무 신뢰하지는 마. 공녀님은 너무 냉정하고 차가운 분이라서, 신경을 거스르면 너를 다시 노예 시장으로 보내거나…… 죽이실지도 몰라.”

“…….”

“공녀님에 대한 무서운 소문들은 이클리스 너도 잘 안다며? 오늘도 그런 말을 하셨다고 했잖아…….”

“…….”

“네가 믿을 사람은 나밖에 없어. 우린 이 세상에서 단둘뿐인, 같은 처지니…….”

“……너와 내가 왜 같은 처지야. 주인님을 위해 너는 언젠간 죽어야 하는…….”

창살 위로 몸을 붙인 채, 상대방의 귀에 속삭이던 이본은 불현듯 흘러나오는 소리에 우뚝 말을 멈췄다.

푸른빛이 새어 나오는 거울 조각을 수십 번 보여 줬음에도 그는 좀처럼 제게 마음을 열지 않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가짜 공녀를 향한 증오를 심는 데만 해도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유물에 정신을 빼앗긴 와중에도, 페넬로페를 향한 강한 집착을 드러내는 이클리스를 바라보며 이본은 낯을 바꿨다.

“……빨리 조각을 찾아야 해.”

언제나 천사같이 양순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그녀는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꺼냈던 조각을 거두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 * *

시간이 많이 지체되어 예상보다 빠르게 이본이 당도했다.

계단을 오르던 중 머리맡에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에 서둘러 문 뒤에 숨었다.

그리고 일어난 광경은 그야말로 경악과 공포, 그 자체였다.

여주가 행하는 모든 것을 지켜보던 나는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가슴을 부여잡고 숨죽인 채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건물을 빠져나왔을 때, 나는 가까스로 참고 있던 숨과 함께 새된 비명을 토해 냈다.

“진짜였어.”

솔레일에서 봤던 그 모든 것들이, 착각이 아니었다.

* * *

나는 공포에 질린 채 누군가에게 쫓기듯 숲길을 마구 뛰었다.

혹시라도 나를 알아챈 여주가 푸른 빛을 뿜는 조각을 들고 쫓아올까 봐. 연신 뒤를 돌아보느라 넘어질 뻔한 것도 여러 번.

환히 불이 켜진 거대한 저택이 멀찍이서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나는 숲을 빠져나와 후원에 도달했다.

“하아, 하아…….”

사방을 둘러싼 채 후원을 아름답게 비추는 조명에 천천히 정신이 돌아왔다.

그 순간 다리의 힘이 풀려 쓰러질 듯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가까스로 옆에 있는 나무를 붙들고 거칠게 호흡을 골랐다.

두방망이질 치는 가슴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두려움이 어느 정도 가시자, 뒤늦게 변장도 하지 않은 채 내 모습 그대로 나다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허겁지겁 주머니에서 팔찌를 꺼내 손목에 찼다.

얼마 후, 자주색 보석에 번쩍 불이 들어왔다.

“하…….”

나는 안도의 한숨인지, 앓는 소리인지 알 수 없는 침음을 내뱉으며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후원을 가로질러 저택의 뒷문에 도달했을 때였다.

누군가 초조하게 문 앞을 오가고 있었다.

“에밀리.”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아가……!”

에밀리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무심결에 나를 부르려다, 변신한 내 모습을 보고 허겁지겁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르며 다가와 내게 빠르게 속삭였다.

“왜, 왜 이렇게 늦게 오신 거예요! 그 여자가 산책을 하러 숲으로 갔어요.”

당초 이본이 밥을 다 먹기 전에 빠르게 이클리스를 만나고 돌아오려 했지만, 그 계획은 다 어그러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내뱉었다.

“봤어.”

“헉! 마, 마주쳤어요?”

“아니.”

“그, 그럼…….”

“일단 들어가자. 더 늦으면 이상하게 여길 수도 있으니까.”

나는 궁금해하는 에밀리를 막으며 앞서 뒷문으로 들어섰다.

격렬한 감정 소모로 인한 탈력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피곤하고 지쳐서 더 생각할 정신도 남지 않았다.

나는 에밀리와 함께 빠르게 중앙 계단을 올랐다.

그러는 와중 사용인 몇몇과 마주쳤지만, 확실히 외양이 너무 달라서 그런지 모두들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마침내 2층에 오르자, 커다란 장정 둘이 꿈쩍도 않고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에밀리의 뒤에 선 채 그쪽으로 다가가자, 호위 놈들이 대번 경계했다.

“누굽니까?”

에밀리는 미리 입을 맞춘 대로 말했다.

“아가씨께서 부른 아이예요.”

“아가씨께서 말씀입니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어디 소속이고, 무슨 일로 부른 겁니까?”

“정원에서 일하는 아이예요. 며칠 전에 아가씨께서 산책을 하시다가 액세서리 하나를 잃어버렸는데, 이 아이에게 찾아 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호위 놈들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인가?”

“네.”

나는 소매를 걷어 올려 보였다.

손목에는 사춘기 나이 때의 남자 아이가 차기에 썩 어울리지 않은 아기자기한 팔찌가 달려 있었다.

“잃어버릴까 봐 발견하자마자 제 몸에 찼어요.”

나는 태연하게 답했다.

눈앞의 소년이 나라는 것은 꿈에도 모를 호위 놈들은 저들끼리 눈을 맞추더니 곧 고개를 까딱였다.

“들어가 봐.”

에밀리와 나는 무사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자.”

나는 서둘러 팔찌와 옷을 벗어 에밀리에게 건넸다.

이제 에밀리의 차례였다. 그녀는 ‘곧 돌아올게요, 아가씨!’하고 답한 후, 비장한 얼굴로 하인 옷과 데발 놈이 준 마법 팔찌를 차고 나갔다.

나에게만 마법이 한정된 것이 아니어서 천만 다행이었다.

호위 놈들을 속이기 위해 나간 에밀리가 다시 제 옷을 갈아입고 돌아올 동안, 나는 대충 씻은 후 곧바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머리가 너무 혼잡했다.

잠들고 싶었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하기야 잠이 올 리가 없지 않은가.

‘여주가 레일라 일족이고, 남주를 유물로 세뇌했다.’

이클리스가 이렇게 극단적으로 변한 것에 그녀의 세뇌가 작용하지 않았다고 보기 어려웠다.

‘게다가, 이클리스 하나만이 아니라 데릭이나 레널드에게도 손을 뻗었을지 몰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물이 완전한 상태는 아니란 것이다.

나는 직감했다. 이본이 내가 가진 거울 조각을 찾아 유물을 완성시키려 한다는 것을.

- 저걸 발동시키면 안 됩니다.

- 고대 레일라 일족이 사용하던 유물입니다. 상대를 가장 절망스러운 상황 속으로 끌어들여서 정신을 파괴하는 겁니다.

뷘터의 무거운 음성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성인식을 3일 앞둔 밤.

나는 호감도를 한 명에게 몰빵하겠다는 계획에 실패했다.

그리고 원래 스토리보다 일찍 등장한 여주는 의미심장한 모습으로 남주들을 세뇌시키고 다니고 있다.

‘……이대로 있다간 죽을 거야.’

이건 본능이었다.

하드 모드의 제한 기간이 훌쩍 다가온 만큼, 나는 죽음이 내 목전에 넘실거리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문득 벽을 맞닥뜨린 듯 끝없는 막막함이 느껴졌다.

눈앞이 아득해졌다.

죽지 않고 이 빌어먹을 곳을 빠져나갈 방법이, 뭐가 있을까.

나는 그렇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남은 호감도들을 계산하고, 생각하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새벽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고요히 일어나 설렁줄을 당겼다.

충성스러운 전담 시녀가 졸린 눈을 억지로 치켜뜨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부르셨…….”

나는 붉게 핏발 선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에밀리가 그런 내 몰골에 흠칫했다.

“혹시…… 아직도 안 주무신 거예요?”

“에밀리.”

“네, 아가씨. 말씀하세요.”

“성인식은 어떻게 진행되지?”

“네? 성인식이요?”

꼭두새벽부터 불러서 뜬금없는 질문을 해대는 나를 보며 에밀리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대답했다.

“보통은…… 황궁의 직인이 찍힌 칙서를 받고, 가문의 원로분들에게 축사를 받은 후 직계 가족들과 세리주를 나눠 먹어요. 성인이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요.”

“그래. 세리주…….”

다행이었다. 그것 하나는 게임과 똑같이 진행돼서.

잠시 생각에 잠겼던 나는 이내 그녀에게 아무도 몰라야 할, 은밀한 지령을 내렸다.

“날이 밝으면, 흰 토끼 상단에 좀 다녀오렴.”

“상단이요?”

“그래. 가서 상단주에게…….”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해야 할 일을 속삭이자, 에밀리가 눈을 부릅떴다.

“아, 아가씨. 그, 그건……!”

“할 수 있지?”

“하, 하지만…….”

그녀는 순식간에 허옇게 들뜬 낯빛으로 주저했다.

“만약…… 만약 상단주가 의뢰를 거절하면요?”

“그럼 의뢰가 아닌, 일전에 내게 진 빚을 갚으라고 답하렴.”

에밀리는 아연한 얼굴로 입술을 벙긋댔다.

나는 서늘한 음성으로 물었다.

“할 수 있어, 없어? 할 수 없으면 다른 아이를 시키고.”

“아, 아니요! 하, 할게요, 아가씨! 할 수 있어요!”

에밀리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연달아 할 수 있다고 외치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벌려 음산하게 읊조렸다.

“에밀리, 이건 그 어느 때보다 비밀스럽게 진행되어야 해.”

“아, 아가씨…….”

“만일 들키면…… 알지?”

에밀리는 울상을 지으며 망설이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제부터 너만 믿을 거야, 에밀리. 부디 내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꼬, 꼭 성공할게요, 아가씨. 제가, 꼭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망설이던 것이 언제였냐는 양, 에밀리의 동공이 기이하게 번들거렸다.

처음 이곳으로 왔을 적, 나를 바늘로 찌르던 때 보았던 그 음험한 얼굴이었다.

‘악녀의 시녀답네.’

나는 그제야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풀고 희미하게 웃었다.

탈출을 위해 시도해 보지 않은 방법이, 아직 하나 남아 있었다.

비록 위험 부담이 극도로 높고, 이 미친 게임에서 과연 통할지조차 알 수 없지만…….

‘이대로 병신처럼 휘둘리기만 하다가 개죽음당할 순 없지.’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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