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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1화 (161/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1화

D-2.

에밀리는 지시대로 날이 밝자마자 집을 떠났다.

나는 호위기사 둘을 뒤에 달고 저택 밖으로 나왔다.

감시를 받는 것보다 방 안에만 갇혀 있는 게 더 답답했기 때문이다.

우중충한 내 마음과는 달리, 하늘이 거짓말처럼 화창했다.

어젯밤, 한숨도 자지 못한 탓인지 머릿속이 몽롱했다.

비칠거리며 후원을 한 바퀴 돈 나는, 유리 온실로 향했다.

호위들은 재빠른 몸짓으로 유리문을 열어 준 후 입구의 양옆을 지키고 섰다.

‘죄인 압송이냐고.’

짜게 식은 눈으로 그런 놈들을 노려보던 나는, 이내 한숨을 쉬며 유리문 사이로 들어갔다.

“아무도 들이지 마.”

문을 닫기 전 스쳐 지나가듯 명령했다.

폭풍 전야이지만, 모처럼 평화로운 이 기분을 나돌아 다니는 여주와 마주쳐서 망치기 싫었다.

커다란 장정 두 명이 졸졸 뒤따라 오는 것은 짜증 났지만, 이런 건 확실히 막을 수 있어 좋았다.

나는 걸음을 옮겨 온실 안을 휙휙 가로질렀다.

유리 온실에는 화려하고 신기한 꽃들이 한가득이었지만 별로 눈에 들어오진 않았다.

마침내 걸음이 멈춘 곳은 구석진 자리였다.

푸릇한 잔디 사이로 작고 흰 들꽃들이 소담스럽게 피어 있었다.

일전에 이클리스가 나를 찾아왔던, 그리고 그가 나를 위해 꽃을 꺾어서 화관을 만들었던 그 꽃 무리였다.

나는 그 앞에 선 채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그것들을 내려다보다가, 이내 그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이곳에서 꽃같이 미소 지으며 너밖에 없다고 속삭이고, 얼마 후 화관을 받았다.

‘그리고 탈출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희망에 잔뜩 부풀어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느리게 눈을 끔뻑이던 나는 이내 완전히 눈을 감았다.

‘피곤해…….’

사방이 고요했다. 슬그머니 잠이 몰려오는 것 같았지만, 완전히 잠에 빠져들지는 못했다.

나는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한 팔을 들어 눈 위에 얹었다.

그저 눈을 감은 채 선잠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혼몽한 의식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을 때였다.

달칵-.

문득 희미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분명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팔로 가려진 눈살이 와락 찌푸려졌다.

일어나서 명령을 어긴 이를 쏘아붙일까 하다가, 그냥 관뒀다. 축 늘어진 몸으로는 그조차 귀찮았다.

저벅, 저벅-.

기척을 숨길 생각도 없는지, 거침없이 내게로 다가오는 침입자의 발소리가 들렸다.

‘……호위들? 아니면, 에밀린가?’

다소 급한 걸음걸이에 나는 오늘 아침 상단으로 보냈던 전담 하녀를 떠올렸다.

뷘터에게서 어떤 답을 가지고 왔을지 좀 궁금했다.

‘그놈이 끝까지 거절하면 일이 귀찮아질 텐데…….’

깜빡 잊고 놈이 내게 줬던 목걸이와 신발을 들려 보내지 못한 게 조금 후회됐다.

만일 그가 끝내 거절한다면, 남은 이틀간 어떻게 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을 즈음.

저벅-.

불현듯 다가오던 누군가의 발걸음이 머리맡에서 우뚝 멈췄다.

나는 여전히 팔로 눈을 가린 채 짜증스럽게 읊조렸다.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그 아무나에 황족도 포함되나?”

그러나 돌아온 음성은 전혀 예상치 못한 자의 것이었다.

나는 퍼뜩 팔을 내렸다.

갑작스레 빛이 파고든 탓에 눈이 시렸다.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찬란한 황금빛, 그리고 새빨간 루비가 반짝였다.

“……칼리스토?”

아직 잠이 덜 깼나.

멍하니 눈앞에 비친 인영을 바라보고 있을 적.

문득 새빨간 루비 한 쌍이 훌쩍 가까워졌다.

부스러지는 황금빛이 닿을 듯 말 듯, 이마를 간지럽혔다.

남자가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이런, 벌써 깨면 안 되는데. 아직 키스를 안 했거든.”

웃음기가 서린 낮은 저음이 보다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제야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쩍 정신이 들었다.

“저, 전하!”

벌떡 상체를 일으키다가 하마터면 황태자와 머리를 박을 뻔했다.

그가 ‘어이쿠!’하며 익살스럽게 몸을 물렸다.

나는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다, 이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여,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꽤 충성스러운 호위들을 뒀더군.”

칼리스토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감히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기에 모두 기절시키고 들어왔다.”

“기절……?”

“아끼는 자들인가? 욱해서 좀 세게 쳤는데.”

“아니요, 그건 아니지만…….”

어째서 이야기가 이렇게 흐르는지 모르겠지만, 때려서 기절시켰다는 말에 문득 속이 좀 시원해졌다.

공작의 명령 때문인지, 따라오지 말라는 내 말을 더럽게도 안 듣고 기어이 쫓아왔기 때문이다.

‘나도 다음엔 힘들게 벽 탈 생각 말고 차라리 기절시켜 놓고 나갈까…….’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왜 이렇게 멍청한 얼굴이야?’ 하고 묻는 말에 아차, 하고 정신을 되찾았다.

“여긴 왜 오셨어요?”

갑자기 등장한 놈으로 인해 당황스러움이 가시자, 나도 모르게 차가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

시큰둥해진 내 표정에 황태자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약혼자의 집에 마음대로 오지도 못해?”

“처음 듣는 소린데요. 오라버니들 중 어느 쪽이랑 약혼을 하셨습니까?”

또 시작되는 헛소리에 침착하게 헛소리로 대꾸하자 놈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무슨 그런 끔찍한 농담을 해? 그렇게 안 봤는데 공녀, 사람이 참 재미없어.”

“진담입니다.”

짧게 대꾸한 나는 눕느라 흐트러진 옷을 주섬주섬 간추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돌려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화려한 제복이 구겨지는 것도 상관 않고 잔디밭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새하얀 제복 바지 끝자락에 풀물이 조금 번져 있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며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만 일어나세요, 전하. 옷 더러워지십니다.”

“…….”

황태자는 제 앞에 내밀어진 내 손을 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러다 그의 의복이 완전히 더러워질 것 같았다.

“뭐 하세요? 얼른요.”

손을 흔들며 재촉했다.

타악-.

그러자 마침내 그가 낚아채듯 내 손을 움켜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완전히 일어선 것을 보고 나는 바로 손을 놓기 위해 힘을 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황태자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잠시 내려다보며, 억지로나마 뿌리칠까 생각했지만 이내 그냥 신경을 껐다.

쉽게 놓아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어릿어릿해질 만큼 억센 힘이 가해졌다.

나는 그런 그를 내버려 둔 채 걸음을 옮겼다.

유리 온실 한가운데에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도착할 때까지 황태자는 묵묵히 내게 끌려왔다.

맞잡은 손을 타고 뜨거운 온기가 느껴졌다.

호감을 가졌다는 것을 바로 얼마 전에 깨달은 상태였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이에 변화되는 것은 없었다.

그런 시시껄렁한 감정 따위를 신경 쓰기에, 나는 너무나도 극한 상황에 처한 상태였다.

고작 손 한번 맞잡았다고, 어린애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하진 않았다.

심장이 요동치지도 않았다.

아무렇지 않았다.

“앉으세요.”

테이블에 도달한 나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황태자는 그제야 꽉 움켜쥐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의자에 앉았다.

피가 통하지 않았던 손이 아릿했다.

나는 내색하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종을 들어 두어 번 흔들었다.

온실을 관리하는 하녀에게 다과를 가지고 오라는 신호였다.

황태자가 그런 나를 의외라는 듯 바라보았다.

“바로 내쫓을 줄 알았는데.”

“황태자 전하께 제가 어찌 감히 그러겠어요. 저는 그런 몰상식한 사람 아닙니다.”

“성인식을 맞이하여 공작이 황궁 예절 선생을 새로이 붙여 주었나?”

“소양이 너무 완벽해서 더는 가르칠 게 없다며 극찬을 하더군요.”

이를 악물고 미소를 지은 채 답하자, 황태자가 눈을 접고 키득거렸다.

얼마 후 하녀 하나가 유리문을 열고 다과를 가져왔다.

가까이서 보니 하녀의 얼굴이 창백했다. 호위들을 기절시키고 침입했다더니, 정말인 듯했다.

나는 차를 두고 도망치듯 밖으로 나가는 하녀의 뒷모습을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이내 황태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공작저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대의 성인식에 줄 선물을 가져왔다.”

“선물이요?”

“좀 많아서 미리 갖다 두라 지시했지. 성인식 당일엔 온갖 잡것들이 다 꼬일 거 아니야.”

순순히 답을 내주는 칼리스토를 조금 놀란 눈으로 바라보다 물었다.

“저번에 주셨잖아요.”

“그건 포상이었지.”

그게 나름 ‘포상’이었다는 걸 깜빡 잊고 있었던 나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심결에 툭 내뱉었다.

“그런데 굳이 이렇게 직접 오셔서 알려주실 필요까진 없을 텐데요. 바쁘신데 그때처럼 그냥 아랫사람을 시키시지 그러셨습니까.”

“허.”

황태자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나는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요?”

“당연히 얼굴 보러 온 거지. 안 그러면 이 바쁜 시국에 내가 뭣 하러 이곳까지 직접 행차하겠어?”

당연하다는 듯 대꾸하는 놈의 말에 나는 순간 멍해졌다.

버벅이며 돌아가지 않는 머리와는 달리, 가슴이 수런거렸다.

찰나, 시야가 흔들렸다.

황태자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덧붙였다.

“내 입으로 꼭 이런 말을 해야 속이 시원하나? 그대는 가만 보면 둔해 터진 구석이 있어.”

“……전하.”

정신을 차린 나는 한숨처럼 그를 불렀다.

심장이 자꾸만 움틀댔다. 아니, 그렇지 않았다.

나는 입 안쪽 살을 꽉 물었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마침 오셨으니 잘됐습니다. 성인식 날엔 바빠서 미쳐 답을 못 드릴 것 같았거든요.”

“…….”

“그때 제안해 주신 사안에 대해 확실하게 답변드리자면, 저는 전하와 그런…….”

힘겹게 말을 끝맺으려던 찰나였다.

“잠깐, 공녀.”

불현듯 황태자가 손을 들어 나를 막아섰다. 그리고 뜬구름 잡는 소리를 했다.

“듣기 전에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요즘 공작저의 재정 상태가 어렵나?”

“……예?”

“아니면, 친딸 아니라고 밥 안 줘? 요즘 세상에, 아직도 입양아라고 차별을 하나?”

“그게 무슨…….”

나는 황태자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 그가 불쑥 내게로 손을 뻗었다.

“뼈밖에 안 남았군.”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왼쪽 손목이 커다란 손아귀에 잡혀 휙 쳐들렸다.

“뭐, 뭐 하시는 겁니까?!”

“안 본 새에 얼굴 꼴이 그게 뭐야.”

황태자가 살벌한 얼굴로 나를 빤히 노려보았다.

그저 놀란 눈을 끔뻑이고만 있자, 그가 내 팔을 잡고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어나.”

“저, 전하!”

나는 대경실색하여 나도 모르게 그의 손을 와락 붙들었다.

“대체 갑자기 왜 이러시는……!”

“이러다가 제국에서 영양실조로 굶어 뒈진 최초의 귀족이란 비문이 새겨지겠군.”

황태자는 낮은 음성으로 뇌까렸다.

그러더니 제가 잡은 내 팔을 획획 흔들었다.

그가 흔드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팔목은 내가 보기에도 기괴할 만큼 앙상했다.

요 며칠 신경 쓸 게 많아 얼굴이 좀 갸름해진 것 같기는 했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갈 상황도 아니었기에 그냥 굶었더니, 눈치채지 못한 사이 민망할 만큼 살이 내려 있었다.

힘을 주면 그대로 똑 부러질 것처럼 가는 팔목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당장 가서 짐 싸.”

황태자가 으르렁거리듯 거칠게 내뱉었다.

“황궁으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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