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2화
황궁으로 가자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전하, 전하.”
나는 황급히 내 팔을 낚아챈 황태자를 붙들었다.
그가 사납게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뭐 해? 빨리 안 일어나고.”
“전하께서야말로 좀 진정하시고 앉으세요. 별일 아니에요.”
나는 점차 흥분하는 황태자를 뜯어 말렸다.
굳이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더라도 페넬로페는 우악스러운 성정답게 몸 또한 예민한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를 진정시키려고 꺼낸 말이 오히려 역효과를 일으킨 듯했다.
“하, 그럼 공녀에겐 뭐가 별일이지?”
차가운 헛바람과 함께 황태자가 눈살을 꿈틀거렸다.
“정말로 굶어 뒈져서 땅에 묻혀 봐야 그대에겐 좀 별일이 되려나?”
“과장하지 마세요. 이런 걸로 안 죽어요. 그리고 그렇다 한들, 전하께서 무슨 상관이세요?”
무심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 감정 없는 정략혼을 제안했던 그가, 고작 살이 좀 빠진 것 가지고 왜 이렇게 화를 낸단 말인가.
꼭 나를 사랑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 ……사랑?
- 우리 같은 처지에 그런 건 너무 어울리지 않는 순진한 단어지 않나? 답지 않게 왜 그래?
잠깐 든 생각은 곧, 부질없는 가정으로 변했다.
그날, 그가 했던 말들이 활자가 되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그 옆에 화인처럼 새겨진 ‘76%’ 또한.
〈SYSTEM〉 [칼리스토]의 호감도를 확인하시겠습니까?
[400만 골드 / 명성 200]
나는 아까 전부터 허공에 떠 있는 하얀 네모 창을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천천히 그에게 잡힌 팔목을 떼어 냈다.
“제가 밥을 굶고 있든, 그로 인해 살이 빠졌든, 설령 제가 공작가에서 정말로 학대를 받든…….”
“…….”
“전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별일이 아닌 거죠.”
완전히 그를 떼어 내자 시스템 창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물론 지금처럼 굴지 않고, 이클리스에게 하던 대로 더 살갑게 군다면, 어쩌면 100%를 채우고 원하는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한텐 시간이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도, 그의 호감도를 확인하는 짓도, 모두 부질없는 짓이지 않은가.
나는 황태자가 내 무례한 어투를 지적하며 화를 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나를 말없이 응시하다, 이내 고요히 입을 열었다.
“……걱정하는 사람한테 말을 꼭 그렇게 못돼 처먹게 해야 해?”
표정은 잠잠했지만, 크게 들이 내쉬는 그의 숨결에서 가까스로 참고 있는 분노의 잔재가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무감각한 음성으로 물었다.
“왜요?”
“뭐?”
“전하께서 왜 저를 걱정하세요.”
“공녀.”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요.”
나는 경고라도 하듯 점점 차가워지는 황태자의 목소리에 개의치 않고 답했다.
“무슨 사이긴.”
황태자가 득달같이 답했다.
“내가 그대에게 청혼했고, 정식으로 약혼을 할 사이지.”
“돌아와서, 그때 하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짓씹듯이 내뱉는 그의 말에는 알 수 없는 확신이 가득했다.
나는 그의 그런 확신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이건 기회였다. 나는 방금 전 미처 못다 한 이야기를 냉큼 꺼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하의 제안은 거절밖에 할 수 없어요. 제 답변은 거절이에요, 전하.”
“하…… 미치겠군.”
속사포처럼 읊조리자, 황태자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다가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했다.
우리의 대화가 조금 엇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모르는 척 외면했다.
성인식 이전에 이 말을 할 수 있어서 그저 다행이었다.
한동안 얼굴을 문지르던 황태자가 이윽고 손을 내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눈이 조금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공녀, 방금 전까지 우리는 그대의 섭식과 건강에 관해 얘기 중이었어. 이런 상황에서 꼭 그 말을 꺼내야 하는 건가?”
“저는 원래 이 말을 하려 했습니다만…….”
“왜지? 이유라도 한번 지껄여 봐.”
황태자가 짜증스럽게 내 말을 끊고 몸을 움직였다.
그는 다시 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드디어 내 말을 들어줄 의향이 생긴 듯했다.
“참고로 죽일 뻔해서 그렇다는 둥 그런 말장난 같은 이유는 이제 안 통해, 공녀.”
그는 문득 낮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난 그대에게 충분한 기회를 줬어. 내게 복수할 기회 말이야.”
상 미친놈 같았지만, 어쨌든 그는 내게 직접 목을 벨 기회를 주었고 하지 않은 건 나였다.
꽤 편리한 이유였는데, 이제 더는 쓸 수 없는 패가 돼 버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그 이유는 아닙니다.”
“그럼?”
“전하와 제가 지향하는 바가 다르고, 서로가 바라는 이상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에요.”
“지향하는 바? ……이상? 허. 내가 그날 그런 말까지 내뱉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황태자는 내 말에 기가 막힌다는 듯 헛바람을 터뜨렸다.
톡톡, 테이블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불쑥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어차피 집안에서 정해 주는 혼처대로 결혼할 거, 서로 적당히 마음 맞고 처지도 맞는 사람끼리 잘해 보자는 말이 그렇게 어렵나?”
말은 어렵지 않았다. 상황이 어려울 뿐.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달래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그대에게 황태자비가 되라 요구한 게 아니야, 공녀. 나와 인생을 함께할 파트너를 제안한 거지. 얼굴도 모르는 놈과의 정략혼보단 나은 선택일 텐데.”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내가 더 잘생겼어.”
그가 오만하게 고개를 쳐든 채 잘도 지껄였다.
복잡한 상념에 휩싸인 상태였는데도, 그 순간 작게 웃음이 터졌다.
“웃어?”
하고 칼리스토가 눈을 번뜩 부라렸지만, 새어 나오는 실소는 멈추지 못했다.
내가 진짜 페넬로페였다면, 진짜 이곳에서 나고 자란 귀족이었다면, 어쩌면 그의 말이 참으로 달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아니었다.
“전하.”
나는 마침내 웃음을 갈무리하고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공작가에서 내놓은 미운 오리 새끼란 처지’에 제가 부합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다소 맥락 없는 내 말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진짜 공녀가 돌아왔거든요.”
“……진짜 공녀?”
“공작님의 친딸이요.”
내 대답에 그는 턱을 한번 꿈틀거릴 뿐,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알고 계셨군요.”
“……세작에게서 공작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은 전해 들었다. 사례금을 노린 가짜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군.”
순순히 알게 된 경로를 털어놓던 그가, 불현듯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런데 그게 그대와 나의 관계와 대체 무슨 상관이 있지?”
“전 가짜잖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진짜가 등장하면 퇴장할 가짜.”
“요즘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어?”
칼리스토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6년이나 공녀 자리 꿰차고 살았는데 이제 와서 친딸이 등장했으니 공작이 파양이라도 하겠다 그러나? 그래서 밥도 안 주고 굶겨?”
“그런 거 아니에요, 전하. 그만 좀 하세요. 누가 들으면 제 꼴이 정말로 기아나 다름없을 거라고 착각하겠어요.”
“…….”
갑자기 놈이 입을 다물었다.
측은지심이 서리는 그 눈빛에 기분이 나빠졌다.
나는 미간을 찡그린 채 말을 이었다.
“이 상태로 제가 전하와 약혼을 한다 한들, 전하께 별로 득 될 것 없다는 소립니다.”
“…….”
“다른 귀족들의 시선이 있으니 파양까진 안 가도, 친딸만큼 대우해 줄 이유는 없겠죠. 피는 물보다 진한 법이니까.”
“그때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군.”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내 말을 듣던 황태자가 험악하게 뇌까렸다.
“내가 선택한 건 너야, 페넬로페 에카르트. 공작가를 선택한 게 아니라.”
“전하.”
“그대에겐 차라리 잘된 일이지 않나? 친딸이 돌아왔으니, 저택을 나가도 크게 관여 안 할 거 아니야.”
“…….”
“그대의 말처럼 공작이 그대를 당장 파양하진 않겠지. 그렇게 막 나가는 인사는 아니니까.”
“…….”
“쫓겨나기 전에 먼저 황궁으로 와. 그럼 끝나는 일 아닌가? 왜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
그는 아연해진 나를 살피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난 우리가 서로에게 꽤 호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내 착각인 건가?”
그도 알고 있다는 사실에 문득 눈앞이 아찔해졌다.
그도 나도, 우리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절대로 그 이상으로 발전할 수 없는 그 실낱같은 감정.
‘이래서 너와 내가 안 되는 거라고.’
심장이 천천히 침잠했다.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냈다.
“……그 호감이 사랑은 아니잖아요.”
“어린아이도 아니고 무슨 사랑 타령이야, 공녀.”
황태자는 다소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그런 멍청한 감정놀음은 다 끝이 정해져 있는 착각에 불과해. 그대도 그쯤은 아는 처지잖아.”
“…….”
“진짜 공녀가 나타났다느니, 이상에 합당하지 않다느니. 다 변명처럼 들리는군. 그런 거 말고 진짜 이유를 말해.”
“…….”
“차라리 내가 싫다고 말하는 게 더 설득력 있겠어.”
“싫어요.”
그 순간 횡설수설하며 나조차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었던 거절의 이유들이 거짓말처럼 명료해졌다.
나는 고개를 들고 칼리스토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았다.
“제가 사랑 없인 싫어요, 전하.”
“…….”
“저를 사랑하지 않고, 제가 사랑하지 않는 당신을 선택하기 싫어요. 이제 이유가 됐을까요?”
찰나, 새빨간 동공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진작 이럴걸.’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