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3화 (16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3화

나는 갈피를 잃은 듯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묵묵히 읊었다.

“저는 항상 언제 쫓겨날지 몰라 불안에 떨며 살았어요, 전하.”

“…….”

“물론 지금은 쫓겨나는 게 반쯤 기정사실이 됐지만요.”

남들이 들으면 동정을 살 만한 말들이 삭막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칼리스토의 미간이 깊이 파였다.

애석하게도 나는 이런 말을 내뱉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다.

진짜 내 상황도 아니었고, 어차피 이건 정해져 있는 게임 스토리였다.

내가 어떻게 해도 바꿀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전하의 제안 중에서, 제가 언제까지나 공녀일 거라는 전제부터가 잘못됐어요, 전하.”

나는 울렁거리는 속을 다독이며, 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의 아주 일부분을 털어놓았다.

“저는 이 지옥에서 저를 꺼내 줄 수 있을 만큼 절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하거든요.”

“…….”

“제국의 공녀로서, 적당히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사람이 아니라, 저를요. 저를 이곳에서 꺼내 줄 사람.”

“…….”

“그리고 그게-.”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한숨처럼 내뱉었다.

“전하는 아니겠죠.”

흘깃 시선을 들어 확인한 칼리스토의 얼굴에서는 표정이 사라져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그가 조금 멍해진 얼굴로 물었다.

“네.”

다시 한번 시뻘건 동공이 한차례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선 황제가 되실 거니까요.”

나는 가까스로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찾아보면 더 있을 거예요. 적당히 이해관계도 맞아떨어지고, 함께 있으면 즐겁고 유쾌한 영애들이요. 예를 들면.”

“…….”

“예를 들면, 돌아온 진짜 공녀라든지요.”

말을 하고 나니, 문득 노멀 모드의 황태자 루트가 떠올랐다.

여주를 무던히도 괴롭히던 악녀를 잔인하게 죽인 그는, 이후 여주와 약혼식을 올린다.

그리고 에카르트 공작가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불온 세력을 무찌르고 황좌에 오른 다음 여주와 결혼한다.

엔딩 직후 에필로그에서 나오던 황제와 황후의 화려한 성혼을 담은 일러스트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솔직히 지금의 이본은 영 꺼림칙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결과적으로 황태자가 그녀를 등에 업고 피 터지는 황위 다툼에서 무사히 살아남아 황좌를 거머쥐었다는 것.

성장한 채 왕관을 쓴 일러스트 속의 그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사람처럼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게, 중요했다.

그것을 머릿속에 새기자, 울렁거리던 한 줌뿐인 무언가를 죽여 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어쩌면 그편이, 전하께 더 도움이 될 수도 있겠네요.”

제법 멀쩡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뭐?”

칼리스토가 되물었다.

나는 테이블 아래 푸릇한 잔디 사이에 피어난 작은 흰색 꽃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제가 아니라 진짜 공녀와 교제를 하는 편이 전하께는 더 나은 선택일 수도…….”

“그 입, 다물어.”

그 순간, ‘까드득’ 하고 뼈가 맞물리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살이 뜨끔할 만큼 날카로운 살기가 쏟아졌다.

나는 화들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쳐들었다.

황태자가 새빨간 눈을 형형히 빛내며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나를 모욕할 셈이야, 공녀.”

“……전하.”

“이젠 하다못해 중매인까지 자처하면서 황태자를 종마 취급해? 그대에겐 내 제안이 그리도 우습나?”

나는 그가 갑자기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당황해서 눈을 굴리다가 가까스로 답했다.

“……그런 뜻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몰라.”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황태자가 짓씹듯이 내뱉었다.

“제기랄, 나는 네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그가 한 손으로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럼 넌. 날 그 계집에게 보내고, 다른 새끼 찾아 붙어먹은 후에 이 집구석에서 유유히 나가시겠다?”

“갑자기 얘기가 왜 그렇게 됩니까?”

“어떤 새끼야, 말해.”

나는 두서없이 튀는 대화의 방향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 탈출은 온전히 내가 알아서 할 일이었다.

“그런 사람 없어요. 그리고 있더라도 전하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니죠.”

“나 지금 한계야, 페넬로페 에카르트. 대답 신중히 해야 할 거야.”

정말로 한계인지 테이블에 얹어진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섰다.

나는 도통 이해가 안 가서 물었다.

“왜 화를 내세요?”

“그럼 지금 화 안 나게 생겼어?”

황태자가 분을 참지 못했는지 그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쾅-!

커다란 소음에 놀라서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나는 벙찐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나야말로 모르겠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네가 내게 왜 이러는지.

“전하께서는 감정 없이 이해관계가 맞는 귀족 여식이 필요하고, 저는 저를 사랑해 줄 사람이 필요하고.”

“…….”

“이 말이 어려우세요?”

나는 황태자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었다.

칼리스토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살기등등하게 불렀다.

“……너.”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는 무어라 말할 것처럼 입술을 달싹이다,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간 유리 온실 안에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우두커니 앉아 있는 우리.

나는 문득 깊은 피로감을 느끼며, 찬찬히 입을 벌렸다.

“……이제 공작저에 찾아오지 마세요, 전하.”

나도 모르는 사이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주먹을 꽉 쥔 채 화를 삭이고 있던 칼리스토가 번뜩 붉은 시선을 들었다.

“선물을 주지도 마세요. 다른 곳에서 봐도 제게 아는 척하지 마세요.”

“왜.”

“아무 사이도 아닌 사람들은 원래 그래요.”

“우리가, 아무 사이도 아닌가?”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확답했다.

“전하와 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앞으로도 계속.”

“하…….”

칼리스토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힘줄이 솟을 만큼 꽉 쥐고 있던 주먹을 펴고 연신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지금 상황이 퍽 답답하고 착잡한 듯 보였다.

한참을 그러던 황태자가 제 얼굴에서 손을 뗐다. 잠깐 사이 피로에 찌든 얼굴을 하고 그가 물었다.

“……확실하게 해 둘 게 있는데, 공녀.”

“네, 말씀하세요.”

“지금, 나 차인 건가?”

“불쾌하시다면, 전하께서 저를 찬 거라 생각하셔도 됩니다.”

나는 깔끔하고, 건조하게 답했다.

“일전에 제가 미로 정원에서 저지른 만행의 연장선으로서요.”

“정말이지…… 이상하군.”

묻기에 대답을 해 준 것뿐인데, 그가 불현듯 나를 보며 오만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는 다시 한번 연거푸 마른세수를 한 후 입을 열었다.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고 믿었다.”

“…….”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마음으로, 같은 길을 걸어갈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

“그대가 그렇게 말하니 기분이 정말…… 이상하군.”

나는 뭐가 이상하냐고 물어볼까 주저하다, 그냥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톡톡톡. 황태자가 정서불안처럼 또다시 정신 사납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주절거렸다.

“분명 그대가 거절할 수도 있다고 예측했는데 말이야.”

“…….”

“그대는 원래 내 앞에서 썩은 생선 눈깔을 하고 미운 말만 잘도 골라 내뱉곤 했으니까.”

한결같이 저질스러운 놈의 언어 선택에 절로 질색하는 표정이 지어졌다.

그러나 나는 침묵을 지켰다. 칼리스토가 허탈한 웃음과 함께 말을 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딴 식으로 거절을 당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해서 그런가…… 기분이 정말…….”

“…….”

“더러운걸.”

그의 말에 심장이 덜컥였다.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때, 황태자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콰당-! 거친 몸짓에 의자가 뒤로 넘어갔지만 그도 나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대의 답변은 알겠다.”

“……전하.”

“성인식 날 보도록 하지.”

그는 나를 바라보지 않은 채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나는 서둘러 대답했다.

“선물은 이미 주셨으니, 당일엔 오지 않으셔도 됩…….”

하지만 말을 다 전하기도 전에 칼리스토가 찬바람을 일으키며 매몰차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온실 입구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쾅-!

얼마 안 가 거칠게 열린 유리문이 굉음을 울리며 닫혔다.

유리 온실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다행이지, 뭐.”

놈이 이본을 만나 반한 후엔, 지금과 같은 말을 칼리스토 앞에서 입 밖에도 꺼내지 못할 게 아닌가.

그 전에 말할 수 있어서, 비참하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닫힌 유리문을 황망히 바라보며 연달아 다행을 읊조렸다.

* * *

페넬로페를 남겨 둔 채 유리문을 막 빠져나오던 칼리스토는 문득 발에 치이는 무언가에 시선을 내렸다.

“뭐야, 씨발.”

바닥에 아무렇게 쓰러져 있는 장정 두 명.

그리고 작은 몸뚱이 하나가 쪼그려 앉아 그들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하녀인가?’

온실 안에 들어서기 전, 친히 주먹으로 다스려 준 이들은 쓰러진 후에도 그의 발길을 막고 있었다.

참으로 무엄한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그는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누군가의 팔을 굴러다니는 쓰레기 차듯 구둣발로 거칠게 걷어찼다.

“으윽!”

“헉!”

누군가의 신음 소리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 같은 건 귀에 와 닿지 않았다.

그런 것들은 언제나 그의 일상이었으므로.

더는 발을 막는 것 없이 길이 깨끗해졌다.

그는 그제야 걸음을 옮겼다. 아니 옮기려던 찰나였다.

“저, 저기…….”

문득 망토 끝자락이 잡아 당겨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제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분홍색 정수리가 보였다. 하녀였다.

“아, 안녕하세요. 저, 저는…… 저는 이 집에 신세 지고 있는, 이본이라고 하는데…….”

“…….”

“기, 기사님들이 쓰러져 있어서 너, 너무 깜짝 놀라서 살펴보고 있었어요.”

하녀가 묻지도 않은 말을 줄줄 늘어놓으며 잘못을 빌었다.

“보, 본의 아니게 가시는 길을 막아서 불편하셨다면 저, 정말 죄송…….”

“손 떼.”

그때까지 침묵하던 칼리스토가 불쑥 입을 열었다.

“……네, 네?”

하녀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지 어리숙한 표정이었다.

안 그래도 더러운 기분이 진창에 처박혔다. 칼리스토는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잘리기 싫으면 손 떼라고.”

“어, 어…….”

도통 제 말이 이해가 안 가는지 하녀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스르릉-. 황태자는 언제나 그랬듯 곧바로 칼을 꺼내 들었다.

눈 깜짝할 새 여자의 목 밑에 바짝 칼을 들이민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귓구멍이 처 막혔나?”

“흐, 흐윽!”

“허락 없이 황족의 몸에 손을 대면 즉결 처형이라는 거 몰라?”

“저, 저…… 흐, 그, 그게 몰랐, 죄송…….”

날카로운 칼날이 목 밑을 파고들었다.

뜨끔한 고통에 하녀가 사시나무처럼 떨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정말로 듣기 싫었다.

유년 시절, 틈만 나면 그를 붙잡고 하염없이 흐느끼던 누군가가 떠올라서.

당장 죽여 버리고 싶었지만, 그는 가까스로 심호흡하며 화를 내리눌렀다.

바로 뒤, 온실 안에 있는 여자 때문이었다.

그 여자는 피를 싫어하고, 잔인한 것은 아주 질색을 했다.

저같이 곱고 어여쁜 것들만 보여 줘도 모자랄 마당에, 공작저 안에서 칼부림을 부렸다간 두 번 다신 자신과 상종하지 않을 것이다.

“후…….”

칼리스토는 깊은 호흡을 내쉬며 꺼내 든 칼을 다시 칼집에 집어넣었다.

“엄선된 이들만 받는다더니, 공작저도 고용인 교육이 영 형편없군.”

그리고 여전히 제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벌벌 떨고 있는 분홍 머리를 휙 스쳐 지나갔다.

더 상대할 가치조차 없다는 듯.

황태자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사라지고 한참이 지나서야 이본은 고개를 들었다.

온통 눈물로 적셔진 얼굴이 참으로 가련하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황태자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는 물기 가득한 푸른 눈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허름한 조각 하나를 꽉 쥔 채 등 뒤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