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4화 (16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4화

나는 황태자가 황궁으로 완전히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 돼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실을 막 빠져나오던 무렵이었다.

문 앞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장정 두 명, 그리고 그들을 살피고 있는 왜소한 체구를 발견했다.

‘진짜 때려서 기절시켰네.’

황태자의 패악에 놀란 심정이 지나가자 이내 불편함이 찾아왔다.

퍼뜩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분홍머리 때문이었다.

기절한 호위 기사들이 안쓰러워서 울기라도 했는지, 그녀의 두 눈덩이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주는 울고 난 얼굴조차 예뻤다.

“…….”

눈살을 찌푸린 채 잠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이내 걸음을 옮겨 지나치려던 순간.

“고, 공녀님!”

이본이 벌떡 일어나 앞을 막아섰다.

길이 막히자 본의 아니게 삐딱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뭐야.”

“아, 안녕하세요, 공녀님. 그…… 제가 산책을 하다가 공녀님의 호위 기사분들이 쓰러져 계신 것을 보아서요…….”

“그런데?”

“사, 사람을 부르려고 하다가, 호, 혹시나 주변에 공녀님께서 혼자 남아 계실까 봐 걱정돼서…….”

역시 게임 설정대로 여주는 몹시 선량하고 착해 보였다.

근처에서 서성이던 이유를 우물쭈물 털어놓던 그녀는, 돌아오는 답이 없자 점점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죄, 죄송해요. 그런데 제가 그런 것 절대 아니에요.”

퍼드득 어깨를 떠는 그녀는 꼭 사나운 살쾡이 앞에 선 한 마리의 가엾은 아기 사슴 같았다.

머리가 아팠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세상 둘도 없는 악녀가 된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 데릭이나 레널드 두 놈 중 한 명이라도 나타나면 대박이겠네.’

내 안위를 위해선 빨리 자리를 피해야 한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신경 쓸 것 없어.”

“네? 그, 그게…….”

“시간 되면 알아서 일어나겠지. 온실을 구경하러 온 거 같은데, 네 볼일 보렴. 안녕.”

“어…….”

버벅대는 이본을 남겨둔 채 그녀의 앞을 스쳐 지나가려던 찰나였다.

문득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얀 원피스 목깃에 두어 개의 핏자국들이 선명히 찍혀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을 따라 시선을 올리자 분홍색의 부드러운 머릿결 사이로 얕게 베인 상흔이 눈에 들어왔다.

“너…… 다쳤니?”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 그, 그게.”

이본이 한 손으로 제 목덜미를 가리며 주춤 내게서 물러섰다.

“벼, 별거 아니에요.”

“어디 봐.”

나는 그녀가 물러선 만큼 성큼 다가가서 목을 가린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거추장스러운 분홍색 머리칼을 들추자, 이본이 숨을 들이켰다.

나는 심각한 눈으로 상처를 샅샅이 훑었다.

다행히 상처는 얕았다. 내가 베였을 때에 비하면 좀 긁힌 것에 그친 정도였다.

하지만 나는 이 짓을 해 놓은 미친놈 때문에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미친놈! 진짜 친딸이라니까!’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황태자가 범인인 것을 직감한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여주의 상처를 노려보았다.

딱히 그녀가 걱정돼서는 아니었다.

이것을 안 공작이나 두 아들놈들이 어떻게 나올지가 걱정될 뿐.

‘하…… 분명 노멀 모드에서는 안 이랬잖아요.’

이제 와서 그런 것을 따지기엔 무의미했다.

이클리스 때문에 모든 것이 걷잡을 수 없이 어그러졌는데, 빌어먹을 게임 탓을 해 봤자 뭐가 달라질까.

“……아플 텐데 너부터 가서 치료하는 게 좋겠어.”

나는 터져 나오는 한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이미 황태자가 저질러 놓은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친 애를 붙들고 오늘 일을 불문에 붙이라고 윽박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집사에게 가서 의원을 불러 달라 해. 그럼 수고하렴.”

나는 이본을 잡았던 손을 깔끔하게 놓고, 다시 등을 돌렸다.

“고, 공녀님.”

그러나 채 한 발짝도 떼기 전에 치마 끝자락이 잡혔다.

무심하게 고개를 틀자 여주가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그분은…… 황족이신 거죠? 그 금발에 붉은 눈을 가지신…….”

“황태자 전하셔.”

“그분이랑…… 가, 가까운 사이이신 거예요……?”

순순히 답을 내어준 나는 이어 들려온 질문에 짐짓 얼굴을 굳혔다.

네가 그런 걸 왜 묻냐는 날카로운 말들이 혀끝에 아롱거렸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애써 넘기며 태연히 내뱉었다.

“일개 백성 주제에 감히 제국의 작은 태양과 어찌 친분을 운운하겠니.”

“아…… 죄, 죄송해요.”

이본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꺾였다. 그러나 질문을 멈추진 않았다.

“그, 그런데.”

“…….”

“누가 왜 다쳤냐고 물어보면…… 그냥, 그냥 어디 긁혔다고 하는 게 좋겠죠?”

물기를 머금은 푸른 눈이 내 눈치를 살피며 미약하게 흔들렸다.

나는 참지 못하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보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

“일 크게 만들고 싶으면 사실대로 말하고, 조용히 넘어가고 싶으면 적당히 지어내든지.”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치맛자락을 붙잡은 손을 탁, 털어냈다.

“죄, 죄송해요…….”

힘없이 사과를 중얼거리는 여주는 참으로 가엾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경직된 눈으로 그녀를 주시했다.

정확히는, 아까부터 계속 뒤에 숨겨져 있는 그녀의 한쪽 팔을.

이본을 뒤로한 채 저택으로 막 돌아왔다.

방에 오르기 위해 중앙 홀에 도착하자, 어마어마한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사방 천지에 쌓여 있는 고급스러운 상자와 번쩍번쩍 빛을 뿜는 보석, 드레스, 사치품들.

웬만한 귀족가의 저택보다 두어 배는 큰 공작저 내부가 좁아 보일 만큼 어마어마한 수였다.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하인들이 나를 보고 당황한 낯으로 꾸벅 인사했다.

인상을 찌푸린 채 걸음을 옮기자, 그 한가운데에서 진두지휘하고 있던 집사가 나를 알아보았다.

“아, 아가씨!”

“하, 벌써부터 공녀 대접 해 주기로 결정 난 건가?”

나는 차게 조소하며 빈정댔다.

“예, 예?”

퍽 불쾌해 보이는 내 모습에 집사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토록 기분이 더러운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 ……이본 얘기는 입단속을 시켜 놨으니 염려 마라. 확실해질 때까지 공표할 생각 없다.

공작이 내게 그런 말을 한 게 바로 어제 아침이었다.

그런데 하루도 못 가 온갖 사치품들을 사다 나르는 꼴을 보니, 잠잠했던 심기가 절로 비틀리는 것 같았다.

“이럴 거면 그냥 아예 데리고 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단장시켜 주지 그래. 진짜 공녀가 돌아왔노라 대놓고 광고라도 하면서 말이야.”

나는 발에 치이는 황금색 상자 하나를 ‘퍽-!’ 걷어차며 신경질적으로 뇌까렸다.

내가 생각해도 퍽 못돼먹은 악녀 같다는 자각이 들었지만, 치오르는 짜증을 억누르기 힘들었다.

“그, 그런 게 아닙니다, 아가씨! 그게 아니오라……!”

집사는 그런 내 행동에 허겁지겁 부인했다.

“이, 이것들은 모두 황태자 전하께서 가지고 오신 아가씨의 생일 선물입니다.”

“……뭐?”

나는 멈칫했다.

한눈에 봐도 보통 액세서리가 아닌 것 같아 보이는 것들 수십 개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상자마다 쌓여 있는 어마어마한 수의 드레스, 구두, 장갑, 모자, 그리고 석궁.

다시 한번 난잡한 중앙 홀을 둘러보던 나는 허탈하게 물었다.

“이게…… 전부?”

“예, 오다 주운 거니 부담 갖지 마시라고 전언하셨습니다.”

“하…….”

나는 기가 막혀서 헛헛한 실소를 터뜨리며 이마를 짚었다.

선물 주지 말라 했더니, 오히려 한 나라를 몽땅 털어 오기라도 한 것처럼 어마어마한 수의 선물을 떠안겼다.

“그…… 석궁이 종류별로 너무 많사온데 어떤 식으로 정리해 두는 게 좋겠습니까, 아가씨?”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눈치를 보며 집사가 물었다.

“단순히 장식용으로 사용하는 것도 있고, 마법이 걸린 것과 전쟁에서 쓰이는 듯한 살상용도 있사온데…….”

그가 가리킨 곳에는 정말로 수십 개의 석궁 상자들이 자리했다.

그중 몇몇 개를 열어 보던 하인들이 난감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무슨 밥 먹고 허구한 날 석궁만 쏘는지 아냐?!’

그냥 다 돌려보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러면 놈이 또 득달같이 공작저로 찾아올지 모른다.

급격히 피로가 몰려왔다. 나는 대충 손짓하며 몸을 돌렸다.

“알아서 정리해 줘, 집사. 나 피곤해서 먼저 올라갈게.”

“네, 아가씨! 그럼 제가 알아서 잘 정리하겠습니다. 쉬십시오.”

집사는 고개를 숙여 깍듯이 나를 배웅했다.

“자! 액세서리는 먼저 종류별로 분류한다!”

‘짝!’ 하는 박수 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정리를 시작하는 집사의 목소리가 등 뒤로 울려 퍼졌다.

어쩐지, 조금 신나 보였다.

방으로 돌아오자 누군가 초조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에밀리.”

나는 반색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잘 다녀왔니?”

“네, 네.”

그녀는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걸치고 있던 숄을 벗어 그녀에게 건넸다.

그리고 책상 앞으로 가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태연히 물었다.

“뭐래.”

“……처음엔 정말 아가씨께서 보낸 게 맞느냐고 수차례 확인했어요. 여러 번 맞다고 답하자, 자기 상단은 그런 의뢰는 받지 않는다고 거절했는데…….”

“에밀리, 결론만 말해.”

나는 중언부언하는 하녀를 단호하게 끊었다.

“그래서 못 하겠대?”

“……아가씨께서 시키신 대로 말하니, 곧 준비해서 보내겠다 하였어요.”

그녀는 아래로 고개를 숙이며 소심하게 대답했다.

내가 시킨 은밀한 지시가 꽤나 큰 부담으로 느껴진 듯했다.

“잘된 일이구나.”

나는 칭찬을 담아 짧게 대꾸한 후, 한참 전에 읽다 말았던 책을 꺼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닌지, 에밀리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상단주가 아가씨께, 말을 전해 달라 했어요.”

“무슨 말.”

“이것으로 아가씨께 진 빚은 모두 청산했으니, 두 번 다시 의뢰를 받을 일은 없을 거라고…….”

책의 표지를 넘기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 굳었다.

“……그래.”

나는 한참 후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두 번은 없어야지.”

* * *

그날 밤, 거친 돌풍과 함께 내 방에 토끼가 나타났다.

일전에 보았던 아기 토끼가 아닌, 커다란 성체였다.

소스라치는 나를 보며 토끼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한동안 고요히 나를 바라보았다.

착각일까. 몽롱한 시선 속에서, 나를 비추는 반질반질한 동공에 일순 검푸른 색이 감도는 게 보였다.

“그그그, 그어억-.”

얼마 후, 토끼는 주둥이를 쩍 벌려 무언가를 토해 냈다.

끔찍한 악몽처럼 괴기스러운 장면이었다.

무언가를 툭 내뱉은 토끼는, 다시 돌풍과 함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꿈결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지만, 꿈이 아니었다. 토끼가 토해 낸 물건이 내 눈앞에 분명히 존재했기에.

나는 그것을 아득 쥐고, 또 한 번의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 * *

시간은 잡을 틈도 없이 쏜살같이 흘러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성인식 날이 밝았다.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