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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5화 (16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5화

연회 때마다 늘 그랬듯, 나는 이른 새벽부터 하녀들에 의해 강제로 일으켜졌다.

어차피 잠을 거의 자지 못해, 억지로 일어나는 것이 다른 때처럼 짜증 나진 않았다.

그러나 얼굴과 몸에 무언가를 덕지덕지 바르고 향유를 푼 물에 씻기를 여러 번 반복하다 보니, 욕실을 나올 무렵 나는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다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지?”

“우리 아가씨가, 그 어느 때보다 빛나야 해!”

“그럼, 그럼! 맡겨만 주세요, 아가씨! 영혼까지 끌어모아서 아가씨의 미모를 가장 돋보이게 해 드릴게요!”

평소에는 내 앞에서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하녀들이 오늘도 주먹을 꽉 쥐고 의기투합했다.

“대충해, 제발…….”

내 힘없는 애원은 당연히 묵살되었다.

하녀들은 평소보다 몇 배의 공을 들여 화장을 하고, 머리를 손질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마침내 나를 주무르는 여러 손에서 벗어났을 무렵에서야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

천천히 눈을 뜨자, 누군가 한숨 같은 작은 탄성을 내질렀다.

호들갑 떨던 평소와 달리 하녀들이 조용했다.

나는 곧 그 이유를 알았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로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다웠다.

무표정한 얼굴을 다소 사나워 보이게 할 만큼 치켜 올라간 눈꼬리는 화장 덕분에 도도하고 화려한 눈매로 재탄생했다.

앙증맞은 코, 불그스름한 볼과 입술, 곱게 땋아 틀어 올린 진분홍빛 머리가 제법 사랑스러워 보였다.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더듬었다.

‘……예쁘네.’

노멀 모드의 초기, 성인식 장면을 담은 일러스트에서 조그맣게 스치듯 나왔던 페넬로페는 이토록 숨이 멎을 만큼 예뻤다.

‘이렇게 예뻤구나.’

그때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아쉽게 느껴질 정도로.

거울을 바라본 나는 조금 서글퍼졌다.

곧 내가 저지를 나쁜 짓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주인 잃은 몸뚱이가 가엾어서.

“아가씨! 얼굴 만지시면 안 돼요! 오늘 하루는 얼굴에 손대는 거 금지예요!”

하지만 기겁을 하며 나를 뜯어말리는 하녀들로 인해 그 찰나의 연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알았어.”

나는 못마땅한 얼굴로 순순히 손을 내렸다.

오늘 하루쯤은 그녀들의 장단에 어울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일 테니까.

그때, 또 다른 하녀가 말했다.

“아가씨, 그리고 드레스는…….”

나는 평소 입던 대로 가져오라고 지시하려 했다.

‘평소 입던 대로’란 대체로 목까지 가려진 정숙한 것들을 뜻했다.

그런데 막 입을 떼려던 그 순간 하녀들이 슬금슬금 비켜서더니, 누군가 옷걸이를 밀며 걸어왔다.

“오늘은 이 드레스를 입어 주세요, 아가씨.”

에밀리가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이건…….”

“이 옷만큼 오늘의 아가씨와 잘 어울리는 옷이 없어요!”

나는 그녀가 가지고 온 드레스를 보고 멈칫했다.

검푸른 빛이 일렁거리며 천 자락을 타고 아래로 퍼져 나갔다.

그 위를 반짝이는 은빛 가루가 장식했다.

점차 퍼져 나가던 색상은 아래쪽에 곱게 수놓아진 금사를 만나 찬란히 부스러졌다.

달빛이 비치는 고요한 밤바다를 연상시키는 드레스.

황태자가 준 선물이었다.

나는 그것을 보며 얼굴을 조금 허물어뜨렸다. 그런 내 표정에 에밀리가 안절부절못하며 애걸했다.

“누구보다 가장 빛나야 할 단 한 번뿐인 성인식이잖아요, 아가씨. 평민들도 이날은 빚을 져 가면서까지 비싼 옷을 입으려 하는걸요.”

“…….”

“한 번만요. 오늘만큼은 저희 뜻대로 해 주세요. 네? 아가씨이…….”

“맞아요, 아가씨. 그간 자주 입으신 것들은 조, 조금 어둡고 단출해서…….”

“무, 물론! 아가씨는 모든 옷들을 소화하실 만큼 아름다우시지만요!”

에밀리의 말에 하녀들이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한 마디씩 쏟아냈다.

외출 때마다 튀지 않으려고 주워 입었던 성당 룩이 그간 퍽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게 뭐라고.’

사력을 다해 나를 설득하려는 하녀들이 조금 짠해졌다.

“알았어. 입혀 봐, 한번.”

결국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요? 정말이죠, 아가씨?”

“그, 그럼 액세서리도 드레스와 세트인 거로 하시는 거죠?”

“그런 당연한 건 묻지도 마, 얘!”

하녀들이 뛸 듯이 좋아했다.

황태자가 선물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이것도 다 한때의 추억이리라.

‘……오늘 오지 않을지도 모르지.’

문득 화를 내며 온실을 빠져나가던 황태자의 뒷모습이 떠올렸다.

어쩌면 연거푸 제안을 거절한 내게 분노해서 두 번 다시 상종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메마른 침과 함께 씁쓸한 무언가도 아득 눌러 삼켰다.

드레스와 액세서리를 모두 착용하자 하녀들에게서 다시 찬사와 감탄이 쏟아졌다.

요 며칠 제대로 자지 못한 탓인지, 나는 다시 거울을 확인할 여력도 없이 지쳤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 그녀들을 빠르게 물린 후 에밀리에게 다과를 부탁했다.

얼마 후 돌아온 에밀리가 흐트러지지 않고 쉴 수 있도록 소파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그녀가 받쳐 준 쿠션에 얼굴이 닿지 않게 기대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직 멀었어? 언제부터 시작이니?”

“정오부터 손님들을 본격적으로 받을 예정이라고 해요. 식은 2시에 시작이에요, 아가씨.”

“그 애는 뭐 하고 있어.”

에밀리가 가져다준 냉차로 목을 축이며 짧게 물었다.

다과는 핑계였다. 내 물음에 에밀리가 망설이며 답했다.

“소공작님의 집무실에서…… 같이 차를 들고 있대요.”

“지금 이 시간에?”

나는 놀란 음성으로 되물었다.

꼭두새벽부터 준비를 해서 그런지 아직도 점심이 되려면 한참 남은 이른 오전이었다.

티타임을 가지기엔, 날도 시간도 맞지 않았다.

‘별일 없겠지…….’

불안함이 발끝을 감돌았다. 하지만 별일이 생기더라도 감수해야 했다.

게다가 데발놈은 어차피 세뇌를 당하든 안 당하든 그게 그거였다.

그때,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나를 일깨웠다.

“아가씨, 그런데 그, 상단주에게서 의뢰는…….”

“스읍, 입조심.”

나는 혀를 차며 곧바로 주의를 줬다. 그리고 눈살을 찌푸리며 확인했다.

“에밀리, 내가 시킨 대로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행동한 건 맞겠지?”

“네, 네! 그럼요, 아가씨.”

에밀리가 퍼드득 어깨를 떨며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런데 아가씨…….”

그러다 불현듯, 그녀가 갈색 눈을 살살 굴리며 속삭였다.

“어젯밤에 좀 수상한 일이 있었어요.”

“뭔데.”

“씻으려고 잠깐 제 방으로 돌아가는데, 숙소 앞에서 베키를 만났어요. 그런데 그 애가 제게 상단 거리로 가는 길을 묻는 게 아니겠어요?”

“……뭐?”

베키는 이본의 임시 하녀였다. 나는 편히 기대고 있던 몸을 벌떡 일으키며 외쳤다.

“그걸 왜 이제 말해?”

“너무 늦은 시각이라, 아가씨를 깨울 수가 없었어요…….”

에밀리가 금세 주눅이 든 얼굴로 변명했다.

“하지만 걱정 마셔요, 아가씨! 저는 당연히 모른다고 발뺌했지요! 그 애도 알았다며 그냥 제 방으로 돌아갔고요.”

“……그건 좀 잘했구나.”

나는 다소 성의 없이 대꾸하며 다시 풀썩 쿠션에 몸을 기댔다.

톡톡톡- 소파의 팔걸이를 두드리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걔가 왜 상단 거리를 찾을까. 뷘터를 만나려고?’

충분히 가능성 있었다.

노멀 모드에서도 여주는 공작저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뷘터를 찾아 헤매니까.

하지만 지금은 원래 게임 스토리와는 달리 이클리스가 먼저 그녀를 데리고 온 상태였다.

뷘터와 그녀가 이미 마주쳤을 거란 가정은 어디까지나 내 추측이었다.

결국 그는 그녀를 데리고 오지 않았으니, 그간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오갔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으로 휙휙 걸어갔다.

“에밀리, 넌 잠깐 나가 있으렴.”

“네? 아, 네!”

에밀리를 밖으로 내보내자, 방 안은 정적에 휩싸였다.

입으로는 너를 믿는다 하였지만, 실상 내가 이곳에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책상 앞에 선 나는, 항시 몸에 지니고 있는 열쇠를 꺼내어 잠겨 있는 마지막 서랍을 열었다.

그 안에는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남주들의 정보를 적은 것과 틈틈이 호감도를 정리한 종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간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얻은 잡다한 것들, 뷘터의 물품과 지난밤 그와의 거래로 얻은 것 또한 자리했다.

나는 어제 토끼가 내뱉은 보라색 액체가 든 병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문득 서랍 안쪽에서 붉은빛이 쏟아져 나왔다.

“……응?”

나는 조금 놀라 멈칫하다가, 이내 빛을 내는 광원을 꺼내 들었다.

“……이건.”

지난번 트라탄 봉사 활동 때 뷘터가 내게 걸어 준 고대 마법 목걸이였다.

별 모양의 화려한 장식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커다란 구슬이, 검붉은색으로 빛나며 얕게 진동했다.

나는 멍하니 구슬의 빛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갔다.

“……아.”

검붉은 빛이 비추는 보라색 액체가 든 병을 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이클리스였다.

내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던 호감도 게이지 바의 색깔.

“……죽음이었구나.”

그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내 몰빵 계획이 완전히 패도의 길을 걷고 있었단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어서.

아니 어쩌면, 나는 그간 호감도에 눈이 멀어 애써 부정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것은 죽음 같은 사랑이었다.

나를 죽여서라도 가질, 지독한 사랑. 뜻밖의 깨달음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목걸이를 든 손이 바르르 떨리는 것을 느끼던 찰나.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거칠게 고개를 들었다.

탁-. 목걸이의 빛을 죽이기 위해 병이 든 서랍을 거칠게 닫고, 숙였던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그리고 곧바로 날카롭게 방문자를 확인했다.

“누구야.”

“……애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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