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6화
일순 머릿속이 하얘졌다.
‘공작이 이 시간에 왜…….’
뭉게뭉게 그런 생각이 솟아오르던 찰나.
똑똑-. 노크 소리가 한 번 더 울렸다.
“페넬로페, 들어가도 되겠느냐.”
“아, 네, 네. 들어오세요.”
언제까지고 공작을 밖에 세워 둘 수 없어 나는 허둥지둥 외쳤다.
달칵-. 곧바로 문이 열렸다.
방 안으로 들어서던 그는 문득 나를 보고 멈칫 걸음을 멈췄다.
공작의 눈꼬리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아버지?”
영문을 알 수 없어 공작을 부르자, 그는 이내 방문을 닫고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공작은 일전에 광산을 양도한다는 이야기를 나눴을 때처럼 통창 앞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책상 앞에 엉거주춤 서 있던 나는 그를 따라 맞은편에 앉았다.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준비도 안 된 상태로 공작을 상대하려 하자 부담이 되고 막막했다.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여러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 숨소리가 조금 차분해졌을 무렵 입을 열었다.
“……차를 가지고 오라 할까요?”
“되었다.”
공작이 짧게 일축했다.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가 먼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지못해 내가 먼저 다시 말을 건넸다.
“어쩐 일로…… 오셨어요?”
내 말에 공작이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성인식 날 아침에…… 인사를 하러 와 달라 하지 않았느냐.”
“아.”
그런 부탁을 했었지, 참.
여주가 나타나기 전, 식당에서 했던 말이었다. 깜빡 잊고 있었다.
그만큼 별 의미 없었다.
그때는 오늘이면 탈출할 수 있을 거란 꿈에 부풀어서, 잠시나마 철이 든 행세를 하던 수양딸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릴 공작이 좀 안쓰럽기도 했다.
‘이렇게 될 줄도 모르고…….’
물론 지금 생각하면 다 헛소리였다.
나는 껄끄러운 심경을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무심히 답했다.
“감사해요, 들어주셔서.”
“오늘…….”
공작이 조금 망설였다.
“오늘 무척이나 예쁘구나, 페넬로페.”
공작은 원래 칭찬에 박했다. 나는 의외로운 그의 칭찬에 좀 놀라다가, 이내 심드렁해졌다.
“감사해요, 아버지.”
성장한 공작의 모습은 정말로 대귀족다운 위엄이 넘쳐흘렀다.
은장의 에카르트 문양이 선명히 새겨진 검은색 재킷을 바라보던 나는 무미건조하게 화답했다.
“아버지도 오늘 멋있으세요.”
“못 보던 드레스와 액세서리인데…… 황후마마의 재단사를 통해 맞추는 건 싫다더니, 따로 샀느냐?”
“……네.”
“네게 잘 어울린다. 예쁘구나.”
황태자의 선물이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어 그냥 수긍하자 공작이 두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다. 속이 또 울렁거리려고 해서, 나는 쥐고 있던 주먹에 힘을 꽉 주었다.
“그런데, 손에 든 건 무엇이냐.”
문득 공작이 내 한쪽 손을 흘끔거렸다.
그의 눈짓을 따라 시선을 내리니, 꽉 쥔 주먹 사이로 길게 삐져나온 은줄이 보였다.
“아.”
나는 낭패스러운 침음을 내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아직까지 목걸이를 손에 꽉 쥐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상기했다.
손가락 틈 사이로 별 장식의 끄트머리가 삐쭉삐쭉 튀어나와 있었다.
“목걸이인 게야?”
한눈에 봐도 특이한 모양새 때문인지 공작의 눈에 흥미가 서렸다.
나는 허겁지겁 손을 펴고 그것을 목에 걸었다.
“네, 선물 받은 거예요.”
“선물? 누구에게 말이냐?”
“자주 오가던 무기 상단의 주인이 성년식을 축하한다며 마법이 걸린 목걸이를 보냈더라고요. 아버지의 애뮬릿을 샀던 그곳이요.”
“아, 그곳. 대응이 꽤 괜찮군. 다음에 내 화살도 하나 맞춰야겠어.”
대강 둘러댄 말에 다행히 공작은 쉽게 수긍했다.
“한데 오늘 입은 드레스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 듯한데.”
“그래도 선물을 준 성의를 봐서 하고 있으려고요.”
물론 진짜 할 생각은 없었다. 공작이 나가면 바로 벗을 생각이었다.
“……마음씨가 곱구나.”
그러나 돌아오는 반응이 이상했다.
‘오늘따라 대체 왜 이래?’
나는 해괴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다가 조심히 물었다.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그저 네가 부탁한 것을 들어주려고…….”
“그러셨군요. 식전에 얼굴 봬서 좋아요, 아버지. 손님맞이 하시느라 바쁘실 텐데 제가 너무 오래 시간을 뺏는 게 아닌가 걱정되네요.”
됐으니 이제 그만 가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할 말이 남았는지 공작은 자리를 뜨지 않고 머뭇거렸다.
한참을 그러던 그는, 이내 깊은 한숨과 함께 무언가를 토해 냈다.
“……미안하구나.”
예상치 못한 사과였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무엇이요?”
“……그간 내가 붙여 둔 호위 때문에 근신 아닌 근신으로 많이 답답했지 않느냐. 성인식이 지나면, 모두 물리도록 하마.”
아, 그거.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시기는 이미 지났다.
“이해해요, 아버지. 저라도 그러겠어요.”
상투적인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나와의 대화 이후 뒤늦게 양심의 가책이 든 듯했다.
공작은 원래 종종 그랬다.
좀 심하다 싶으면, 물질적인 보상을 하는 것. 그것이 그의 사과 방식이었다.
‘직접 미안하단 말까지 뱉을 줄은 몰랐지만.’
나는 항상 하던 대로 공작이 원할 만한, 그의 가책을 덜어 주는 말을 내뱉었다.
어차피 마지막인데 그쯤 못 해 줄까.
“이본을 해코지하려는 저를 막으려면 장정들을 붙여 감시할 수밖에 없었잖아요. 어차피 나갈 일도 없었고, 전 괜찮아요.”
“……뭐?”
공작이 멈칫하더니 놀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냐, 페넬로페. 얘야, 그런 게 아니다.”
“그럼요?”
“너를 위해 그리한 게야. 네가 걱정되었으니까.”
“……네?”
“네가 이본을 데리고 온 그놈을…… 그런…… 그런 표정으로 바라보았지 않았느냐.”
“무슨…….”
나는 공작의 진중한 푸른색 눈에 깃든 위화감을 느꼈다.
며칠 전에 같은 주제로 대화를 나눴을 때와 답변이 미묘하게 달라졌다.
이전의 그는 끝내 확답하지 않았지만, 이본을 해코지하기 위해 호위를 붙인 게 아니냐는 내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아버지.”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공작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냥 대회가 끝난 직후였던가.”
“…….”
“레널드가 나를 찾아왔다. 잘못을 고백할 것이 있다면서.”
“무슨 잘못이요?”
“네가 공작저로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하느냐. 3층을 폐쇄하게 된 이유.”
“네, 물론…….”
진짜 페넬로페가 아닌 나조차 잊을 수 없었다.
그때 그녀가 느낀 억울함, 공작을 아버지가 아닌 ‘공작님’이라 부를 수밖에 없었던 그 처참함.
“레널드 놈이…… 그때 일에 대해 털어놓았다. 사실 그때 네가 이본의 목걸이를 훔친 것이 아니라고.”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기에.
“다…… 아셨어요?”
내가 겪은 일이 아님에도, 그 순간 뜨거운 것들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올랐다.
게임에서 페넬로페는 죽을 때까지 그 누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 않으면, 끔찍한 시체로 돌아온 그녀를 기어이 파문시키고 들판에 아무렇게나 내다 버릴 수 없었다.
“제가 그런 게 아니라…… 레널드가 그런 것이라는 것도, 전부……?”
벌벌 떨리는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공작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게…… 벌을 내려 달라더구나.”
나는 더는 참을 수 없어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공작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그놈에게 제대로 된 벌을 내릴 수 없었다. 근신과 강도 높은 훈련이나 좀 시키는 게 다였지.”
“…….”
“그놈을 있는 힘껏 후려 패고 싶었지만, 문득 내가 그럴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 들더구나.”
“…….”
“……페넬로페.”
공작이 후회와 회한으로 점철되어 붉어진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너는 너무나도 작고 빼빼 말랐었지. 어린아이답지 않은 메마른 눈으로 내게 먹을 것을 구걸하러 왔을 때, 어딘가에서 이본도 너와 같이 그럴까 봐 계속 눈에 밟혔다.”
“…….”
“가끔 구걸하러 올 때마다 먹을 것이나 좀 챙겨 주려 했는데, 어느 날 네가 금화 하나를 받고 처음으로 웃어 주었지. 그게 참 예뻤다.”
“…….”
“죽은 네 어미 곁에서 굶어 죽어 가던 널 도무지 두고 올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내가 거둬서 굶지 않게, 배부르게 먹이자고.”
처음 듣는 페넬로페와 공작의 첫 만남이었다. 게임에서조차 나오지 않았던.
“한데 내가 어리석어, 충동적으로 널 데려와 놓고 어떻게 돌봐야 하는지 몰랐다. 너는 물론이고 데릭과 레널드 또한 마찬가지였지.”
“…….”
“그래서 그때 사건 또한, 그저 네가 액세서리를 갖고 싶은가 보구나 하고 넘겼다. 아비로서 네 허물을 감싸 줘야 한다고 생각했지.”
“…….”
“그 후 네가 6년이나 나를 공작님이라 부를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공작이 그날을 회상하듯 쓸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이제 와…….’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이미 늦어 버렸다.
그때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나머지, 페넬로페는 학대당하고, 걷잡을 수 없이 삐뚤어져 종국에는 최악의 결말을 맞이하지 않는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허탈하게 바라만 보자, 그는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일은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날 네가 나를 바라보던 표정은 아직도 선명해.”
“…….”
“그리고 며칠 전, 이본을 데리고 온 그놈을 보고 똑같은 표정을 지었지.”
“…….”
“그 순간엔 그놈에게서 너를 어떻게든 떼어내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더구나.”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는데요?”
“그건…….”
공작은 얼굴을 쓸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그는 주저하다가 힘겹게 뱉어 냈다.
“너는 어렸을 때부터 곧잘 화를 내다가도 분노가 극에 달하면 오히려 입을 다물고 감정을 지우는 편이었지.”
나는 좀 놀랐다. 본래의 내가 감정을 죽이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튀어나오는 것들을 억지로 억누르고, 질식할 때까지 숨을 꾹 참으면 조금 후에 모든 것이 사라지고 평온이 찾아온다.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듯 공작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두서없이 읊조렸다.
“그런데 눈이…… 점점 빛이 꺼져 가는 눈이, 생기가 사라져서 이상하게 변해 가곤 하는데…….”
“…….”
“그게, 꼭 죽은 사람처럼 느껴질 때가…….”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끝내 말을 매듭 짓지 못했다.
‘아.’
그 순간, 벼락이 내리꽂듯 격렬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페넬로페는, 죽었다.
감정을 죽이기 위해, 숨을 참고, 또 참고, 또 참아내다가 결국 진짜로 죽어 버렸다.
그렇게 악녀를 잃어버린 게임 속에, 내가 빙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