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7화
나는 내가 생각해 놓고도 너무 소름 돋는 가정에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그럼 내가 탈출하면 페넬로페는?’
아무리 마법이 팽배한 환상 같은 게임 속이라지만 죽은 자가 살아오는 일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지만, 나는 뒷목을 타고 흐르는 섬뜩함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게임 스토리는? 페넬로페 없이도 여주는 남주들을 공략할 수 있는 거야?’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내 탈출이었다.
‘난? 난 정말 이 게임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출구 없는 미로에 빠진 것처럼 눈앞이 핑핑 돌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얕게 헐떡이는 나를 보며 공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말이 헛나온 게다, 잊어버려라.”
그러나 사납게 날뛰는 가슴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갈수록 창백해지는 나를 보며, 공작이 다급히 물었다.
“페넬로페, 어디 아픈 게냐? 의원을 부를까?”
“아니요. 아니요, 아버지…….”
나는 애써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늘 하던 대로 숨을 죽이고 억지로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도 아셨다는 사실에, 좀 놀라서요.”
공작은 굳은 낯빛으로 내 변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힘겹게 내뱉었다.
“페넬로페, 나는…….”
“…….”
“나는 너무도 미숙하고 못난 아비라 아직도 널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나는 계속 숨을 죽인 채 처음으로 내게 진심을 내보이는 그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저 사 달라는 것들을 모두 쥐여 주고, 네가 매번 화를 내며 내게 소리치던 대로 신경 쓰지 않으면, 그러면 되는 줄 알았다.”
“…….”
“……그러면 되는 줄 알았어.”
그게 아니라는 걸, 이제 그도 알았다. 서글픈 깨달음이었다.
끝내 대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불쑥 입을 열었다.
“……이클리스, 그놈이 그렇게 좋은 게냐?”
나는 난데없는 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그게 무슨…….”
“네가, 그나마 마음을 열고 지내던 아이잖느냐.”
“…….”
“그런데 그놈이 이본을 데려왔으니…… 네가 상처를 받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래서 무작정 만나지 못하게 했던 것이야.”
“…….”
“하지만 네가 정 원한다면…… 성인식이 끝나고 다시 그놈을 네 호위로 복귀시켜 주마. 그러니…… 밥은 제때 먹거라.”
나는 음울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그 말은 3일 전에 했어야 했다.
아니 사실, 그때 이클리스를 만나는 것을 허락받았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게이지 바의 색깔이 검붉은 색을 띠었을 무렵부터, 나는 이미 몰빵 루트에 실패한 거나 다름없었기에.
“……그런 거 아니에요, 아버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날은 너무 놀라서 그랬어요. 그냥 위급 시에 도와준 은인일 뿐, 그 이상으로 의미 있는 사람 아니에요.”
“진심이 아니란 걸 안다.”
이제는 진심이었지만 그간 너무 간절히도 이클리스를 원해서였을까. 공작이 쉬이 믿지 않았다.
“……그럼 이본은요.”
나는 삭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 애가 이클리스를 원한다고 했다면서요.”
공작은 내 말에 난처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차분히 대답했다.
“당분간 한집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네 말대로 자매 사이에도 선은 지켜야지.”
“벌써 언니 동생까지 결정 난지는 미처 몰랐는데요.”
“……페넬로페.”
그가 타이르듯 나를 불렀다. 따지고 보면 이본이 언니였다.
공작저에 돌아왔을 무렵, 그녀는 축제 날을 생일 삼아 성인식을 간략하게 치렀다는 서술을 스치듯 본 것이 떠올랐다.
‘말이 또 달라졌어.’
그와 동시에 나는 3일 전과 미묘하게 달라진 공작의 태도를 알아차렸다.
‘그때는 이클리스를 이본에게 붙이는 게 반 확정된 것 같더니.’
어느 쪽이 공작의 진심인지 가늠하던 중.
문득 모든 게 다 무의미하게만 느껴졌다.
‘……이제 와서 그걸 가늠해 봤자 다 무슨 소용이야.’
무수히 많은 기회들은 모조리 놓친 채, 나는 이제 하드 모드의 끝을 앞두고 있었다.
“공작님.”
나는 오랫동안 부르지 않았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오랜만에 듣는 낯선 부름에 공작의 푸른 동공이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나는 담담하게 말을 건넸다.
“이제 제게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마세요.”
“……페넬로페.”
“6년간 이본 대신 공작가에서 머물며 큰 은혜를 입었어요. 저도 그간 보고 배운 것이 있어서, 퇴장할 때를 아는 것이 귀족의 미덕이라는 것쯤은 알아요.”
“그게, 그게 무슨 소리냐. 대신이라니.”
“저 하나 때문에 공작가 전체가 우스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요. 조용히 떠나고 싶어요.”
“떠나다니!”
당황하여 말을 더듬던 공작이, 그 순간 버럭 노성을 내질렀다.
“이전부터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결혼도 안 한 여식이 집 놔두고 대체 어디를 간다고!”
“친딸이 돌아왔잖아요.”
“후…….”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는 나조차 알아차릴 만큼 막막한 눈으로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게냐, 페넬로페. 너 또한 내 딸이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공작님. 성인식을 취소해 주세요.”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가 또 한 번 버럭 소리쳤다.
이건 단순히 성인식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러기엔 이미 너무 늦었다.
미운 정도 정이라고, 제국의 온갖 귀족들에 타국 인사들까지 불러 모은 공작을 위한 일말의 충고였다.
“다른 사람들에게 체면이 깎이는 것을 염려하시는 것이라면, 잠시 미룬 것으로 하고 이본의 성인식을 다시 크게 치러 주시면 되잖아요.”
“그깟 체면 때문에 성인식을 강행하는 게 아니야!”
또 한 번의 노성을 내지른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나를 살벌하게 노려보던 그는 이내 눈에 힘을 풀고 내 시선을 피했다.
언성이 오간 몇 초 사이 그는 10년은 늙어 보이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뿐인 네 성인식을 최고로 치르게 해 주고 싶었다.”
이윽고 그가 취소하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털어놓았을 때.
“기뻐하는 네게, 늦었지만 용서를 구했으면 해서…….”
나는 또다시 얼굴이 형편없이 일그러지는 것을 막지 못했다.
“이본, 그래.”
“…….”
“죽은 줄 알았던 그 애가 돌아와서 뛸 듯이 기뻤다. 그동안 고생했을 것을 생각하면 한없이 죄스럽고, 지금 네 성인식 연회를 성대하게 여는 것조차 미안하더구나.”
“…….”
“……하지만 너도 내 딸이야, 페넬로페. 공작저로 데리고 온 순간부터 한 번도 내 딸이 아니라고 생각한 적 없다.”
시야가 흐려졌다. 나는 이곳에 와서 한 번도 입 밖에 꺼낸 적 없던 억울함 한 점을, 힘겹게 토해 냈다.
“……그런데, 왜 제 부탁은 한 번도 안 들어주세요.”
“내가, 또 잘못하고 있는 게냐?”
공작이 지친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본을 숨기고 네 성인식을 누구보다 화려하게 치러 주고 싶은 것이, 그리도 못 할 짓인 게야?”
“……공작님.”
“성인식을 취소해 달란 말을 들어 주지 못해 미안하구나. 하지만 이미 도착한 손님들도 있는데, 취소가 어찌 말이 돼.”
공작은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내 부탁을 거절했다.
“이본에 대한 것은 네 성인식이 끝나고 시간이 오래 흐른 후에 공표할 것이다. 그러니, 넌 그냥 오늘 식을 잘 치를 생각만…….”
주절주절 말을 내뱉던 공작이 우뚝 말을 멈췄다.
“페넬로페.”
푸른 눈이 서서히 커졌다.
끼익-. 공작이 의자를 끌며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얘야, 왜, 왜 그러는 게야. 응?”
안절부절못하던 그가 내게로 손을 뻗었다.
눈 밑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나는 그제야 눈가가 축축하게 젖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에 단 한 번뿐인 기쁜 날에, 왜 울고 그러니.”
“…….”
“아가, 아비가 다 잘못했다. 울지 말아 다오. 응?”
한 줄기 흘러내리는 눈물에 어쩔 줄을 몰라 하던 공작이 끝내 나를 얼싸안고 다독였다.
그다지 슬프지도 않은데, 왜 눈물이 흐르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고작 게임 속 등장인물일 뿐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페넬로페를 방치하고 빙의 직후 나를 수없이 비참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그가 정말로 아버지처럼 느껴져서.
“……아버지.”
“그래, 다 말하거라.”
안녕히 계세요.
나는 끝내 공작에게 내뱉지 못할 인사를 중얼거렸다.
- 이른 아침, 인사하러 와 주실 수 있으세요?
- 인사?
- 네. ……철없던 어린 딸과의 작별 인사요.
이로써 우스갯소리로 내뱉었던 공작과의 작별 인사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