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8화
* * *
“아가씨, 가실 시간이 되었어요.”
공작이 나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에밀리가 나를 데리러 왔다.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에밀리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는데, 생각보다 무덤덤했다.
성인식 장소는 저택 내부의 연회장이나, 앞쪽 정원이 아닌 후원에 꾸며졌다.
공작의 뜻이었다. 내가 자주 시간을 보내는 장소라는, 정말 쓸데없는 의미 부여였다.
나는 다시금 요동치는 속을 억누른 후, 활짝 열린 뒷문 너머로 찬찬히 나아갔다.
환한 햇살이 후원을 비쳤다.
식장 준비로 인해 이틀간 출입할 수 없었던 그곳은 별천지로 뒤바뀌어 있었다.
화려한 금사가 수놓아진 새하얀색의 휘장과 천막, 꽃과 크리스탈, 각종 보석들로 아낌없이 장식한 단상과 수많은 테이블.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없었던 거대한 분수가 정 가운데를 차지한 채 물을 뿜었다.
그 모든 것들의 대미를 장식하듯 하늘에서 드문드문 반짝이는 살굿빛 꽃비가 천천히 쏟아졌다.
“환상이 아니라 실체화 마법이에요, 아가씨.”
에밀리가 흐뭇하게 속삭였다.
“오늘을 위해 공작님께서 마법사들을 대량 고용하셨대요.”
그 말을 듣자니, 공작이 왜 그리도 강경하게 취소할 수 없다고 말했는지 조금쯤 알 것 같았다.
식장은 그야말로 돈을 때려 부은 듯한 사치의 극치였다.
“너무 아름답죠, 아가씨…….”
에밀리가 꿈결을 걷는 듯한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는 손을 펼쳐 내밀었다. 마침 산들산들 떨어지던 꽃잎 하나가 내 손바닥 위에 안착했다.
그 순간, 나는 왈칵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탐스러운 살굿빛 꽃잎의 정체는, 디 엘런윅 로즈였다.
레널드의 시비를 피하기 위해 공작 앞에서 아무 의미 없이 예쁘다고 말했던.
그것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을 적.
턱-. 불현듯, 누군가 허공을 향해 뻗은 내 손을 낚아챘다.
“여기 멍청하게 서서 뭐 하냐?”
퍼뜩 고개를 들자, 낯익은 분홍 머리가 보였다.
나는 오만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뭐야.”
“성인식마저 네 에스코트해 준다는 기사 한 명 없지? 어휴, 넌 진짜 나 없으면 어쩔 뻔했냐.”
“필요 없어, 혼자 가면 되니까. 그리고 내가 당분간 말 걸지 말랬지.”
나는 날카롭게 쏘아붙인 후 잡힌 손을 탁, 뿌리쳤다.
“야, 야!”
레널드가 다급하게 내 손을 다시 붙잡았다.
“놓으라니까, 안 들려?”
“이, 이대로 혼자 가면 에카르트의 위신이 어떻게 되겠냐? 오라비가 두 명이나 있는데, 한 명도 에스코트를 안 해 주냐고 손가락질 할걸?”
“알 게 뭐야.”
신경 쓰지 않고 팔을 뒤틀자, 레널드가 황급히 외쳤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너 사고 안 치게 돌보라고 하셨어! 야, 네가 말해 봐. 아버지가 시켰지? 어?”
놈이 에밀리에게 눈을 부라렸다. 겁에 질린 에밀리가 마구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럼요, 아가씨! 저도 들었어요! 작은 도련님께서 식장까지 에스코트해 주시기로요…….”
“거 봐, 얘도 들었다잖아!”
누가 봐도 급조한 거짓말이었다. 나는 티 나지 않게 한숨을 쉬며 팔에 힘을 뺐다.
레널드 놈과 상종도 하기 싫었지만, 이대로 계속 실랑이를 하다간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쏠릴 것 같았다.
팔 하나 없는 셈 치고 말없이 걸음을 옮기자 놈이 얼른 따라붙었다.
히죽 웃는 꼴을 보기 싫어서 시선을 정면에만 고정시켰다.
한가운데에 있는 분수 너머의 단상까지 거리가 꽤 있었다.
제법 신사답게 내 허리와 손을 떠받치는 레널드와 함께 레드 카펫을 밟자 아니나 다를까 익숙한 숙덕임이 들려왔다.
“내놓은 자식이 아니라, 공작님께서 애지중지하는 고명딸이란 소문이 정말로 사실인가 봐요.”
“하긴, 그러니까 지금껏 그런 패악질을 부렸는데도…….”
“오죽하면 둘째 공자께서 직접 에스코트를 다……. 그런데 이 장식은 뭔가요? 세상에, 너무 값비싸 보이는걸요.”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SYSTEM〉 공작저 주변인과의 관계 개선으로 명성이 +100 되었습니다. (total :460)
나는 하드 모드의 마지막 날에 뜬 명성 증가 소식을 짜게 식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레널드 놈은 엑스트라들의 수군거림이 썩 듣기 좋은지 맞잡은 손을 더 높이 치켜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오늘 내가 있을 자리에 도달했다.
레널드는 임무를 완수했음에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계속 신경 썼다간 나만 스트레스였으므로, 나는 물을 뿜는 분수를 무료하게 구경했다.
하지만 지긋지긋한 공포의 주둥이가 나를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아직도 그때 일로 삐져 있냐?”
“아니.”
나는 놈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즉답했다.
“허.” 하고 헛바람을 터뜨린 레널드가 기가 막힌다는 듯 뇌까렸다.
“좀 듣는 시늉이라도 하고 대답해라, 어?”
“듣고 있어.”
“단단히 삐졌네.”
무시하려 했지만, 밉살맞은 언행에 눈 밑이 꿈틀댔다.
“내가 왜 화났을 거라 생각해? 난 아무렇지도 않아.”
“말투가 딱 너 괴성 지르기 직전 말툰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미안한데, 너한텐 그런 감정 쏟는 시간도 아까워.”
“아유, 우리 애기. 삐져쪄요.”
놈이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지껄였다. 나는 그 손을 팍 내치며 경악에 차 소리쳤다.
“너 미쳤어?”
“어쭈. 이젠 그냥 맞먹으시고.”
“하…….”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다시 시선을 분수대에 고정했다.
식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하루가 끝난 기분이었다.
내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도 이제부터 철저히 무시하려고 마음먹던 그 순간이었다.
“……미안하다, 오해해서.”
나지막한 사과가 들려왔다.
나는 생소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다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이번엔 레널드가 나를 마주 보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너도 알잖냐. 내가 가끔 병신처럼 지껄이는 거.”
그걸 본인이 알고 있다니 정말 의외였다.
“시도 때도 없이 나한테 시비 걸고 싶어서 안달 나 있는 거겠지.”
“이게, 오라비를 아주 물로 보고.”
놈이 발끈하며 나를 흘기다가 이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때 생각하면 나도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다고……. 시발, 꿈 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랬나.”
“……꿈? 뭔 꿈?”
“전날 밤에 그 상황이랑 똑같은 꿈을 꿨어. 그래서 난 네가 진짜 걔 패는 줄 알았지. 그 뭐냐, 데자분가 그거 있잖아.”
레널드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내 내 핀잔으로 넘어갔다.
“그러니까 평소에 좀 얌전히 지내라, 어? 오죽하면 네가 걜 패는 꿈까지 다 꾸겠냐.”
불현듯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나는 어렴풋이 그때 그 일의 경위를 알 것 같았다.
이본이 공작은 물론 레널드에게도 세뇌를 시도한 게 분명했다.
나는 바르르 떨리는 손을 뒤로 맞잡으며, 입을 열었다.
“넌 안쓰럽지도 않아?”
“뭐가?”
“내 성인식 때문에 네 진짜 동생일지도 모르는 애가 계속 숨어 있어야 하잖아.”
내 말에 레널드가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뭐 어떠냐? 아직 확실해진 것도 아닌데. 진짜라고 아버지가 못 박으면 그때 가서 안쓰러워 해 주면 되지.”
세뇌의 영향에서 벗어난 레널드는 동생의 등장에도 퍽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나는 좀 멍해졌다. 여주가 나타나서 온갖 경계와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꼭 나 하나뿐인 것 같았다.
하기야, 공작 일가는 지금껏 사례금을 노린 사기꾼들을 수도 없이 상대해 왔다.
이곳이 현실이라면, 이편이 더 자연스럽긴 하지만…….
“읏차.”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상념은 레널드의 기이한 행동으로 인해 끝났다.
갑자기 훅 몸을 숙인 놈이, 단상 아래로 늘어진 천을 걷어 그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올렸다.
“자, 받아.”
그가 내게 내민 것은 꽤 커다란 나무 상자였다.
“뭐야?”
나는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놈이 막무가내로 상자를 떠안겼다. 그리고 아차 할 새도 없이 뚜껑을 열었다.
얼떨결에 상자 안을 확인한 나는 천천히 눈을 크게 떴다.
폭신폭신하게 깔린 짚더미 위에, 손바닥만 한 네 개의 솜뭉치가 옹기종기 모인 채 쌕쌕 잠들어 있었다.
“이건…….”
아기 토끼들이었다.
하얀색, 회색, 검은색, 그리고 마지막은 특이하게도 하늘색 바탕에 녹색의 점박이였다.
“……웬 토끼야?”
“네가 풀어 놓으라던 토끼들이 연무장 근처에 새끼를 바글바글하게 깠어. 이것들은 벌써 3세야.”
“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사냥제가 끝난 후 갖고 싶은 사냥감이 있냐고 집요하게 묻는 놈에게 ‘토끼’라 답했다는 것을.
멍청한 소리를 내자, 레널드가 험악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넌 들여다보지도 않았지?”
들여다보는 것은 물론이고, 놈이 토끼를 돌봐온 것조차 몰랐다.
당황스러움에 시선을 다시 상자 안으로 떨구자, 레널드가 새끼들 중 하나를 가리켰다.
“이게 내 선물이다.”
하늘색 바탕에 녹색 점을 가진, 독특한 토끼였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레널드가 묵묵히 읊조렸다.
“비싼 돈 주고 남방의 녹색 토끼까지 사서 하늘색이랑 짝 붙였는데, 네 눈 같은 색을 가진 새끼는 안 나오더라.”
“물감이야? 섞으면 색깔 진해지게?”
“이, 이게 오빠한테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내가 바보냐? 어?”
어이가 없어 되묻자, 레널드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정곡을 찔린 건지 놈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리고 뛰는 모습 보면 얼추 청록색이라고! 성공한 건 맞거든?!”
잠시 버벅이던 그가 버럭 외쳤다.
그러더니 토끼들이 깰까 봐 금세 상자 안을 들여다보곤, 조심조심 뚜껑을 닫았다.
“잘 보살펴라. 이제 네가 엄마니까.”
“어미는? 없어?”
“약해서 버려졌거나 부모가 죽은 애들이야. 그냥 내버려 뒀다간 다 굶어 죽었겠지.”
그 말에 조금 숙연해졌다.
나는 곁에 서 있던 에밀리를 불러 상자를 내밀었다.
애석하게도, 잘 돌보라는 레널드의 말은 지킬 수 없었다.
하지만 데릭이 선물로 주겠다던 진분홍색 희귀 새처럼,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갓 태어난 것들이라 마음이 약해진 탓도 있지만, 레널드가 노심초사하며 기른 것이 느껴져서 차마 외면할 수 없었다.
나는 뒤늦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물 고마워, 오라버니.”
내 말에 레널드가 드물게 이를 드러내고 환히 웃었다.
“생일 축하한다, 페넬로페.”
그의 머리 위 연분홍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반짝였다.
그것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을 적, 후원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휙 고개를 돌려 원인을 확인한 레널드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야, 할아범 왔다. 곧 잔소리 타령 시작하려나 보다.”
성인식 축사를 하러 온 에카르트 가문의 원로였다.
게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집사에게 미리 들어 알고 있었다.
“나 아버지 데리고 올 테니까, 잠깐 혼자 있어라.”
레널드는 제법 가문의 일원답게 행사 진행을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그런데 형은 이 바쁜 때에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지가 해야 할 일을 왜 내가 해야 하냐고.”
구시렁거리며 멀어지는 그에게서 막 고개를 돌릴 무렵이었다.
문득 볼이 따가웠다. 무심결에 시선을 움직이던 나는 누군가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자리가 아직 다 차지 않아 한산한 테이블 가운데, 보라색 호감도 게이지 바가 깜빡였다.
뷘터 베르단디였다.
오랜만에 보는,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맨 얼굴에는 날 선 서늘함이 맴돌고 있었다.
경계 어린 군청색 동공은 꼭 초기, 그의 비밀 공간에 침투했을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뭐, 이 정도면 양호한 건가.’
나는 묵묵히 그의 차가운 시선을 감내했다.
훌륭한 정보상이니 그는 이미 알 것이다. 이본이 공작저로 돌아와 저택 어딘가에 있음을.
뷘터는 본래 성인식 당일 여주를 데리고 올 만큼 그녀에게 마음을 쏟는 캐릭터였다.
트라탄에서 내게 저지른 실수까지 들먹이며 의뢰를 강요한 나를 보고,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때였다. 내게 못 박혀 있던 그의 차가운 시선이 스르륵 아래로 내려갔다.
그가 내 얼굴이 아닌 드레스 쪽을 빤히 응시했다.
‘아, 망할.’
덩달아 시선을 내리던 나는, 그가 무엇을 보는지 깨닫고 짧게 욕설을 읊조렸다.
공작과의 대화 때문에 목걸이를 벗는 것을 깜빡 잊고 그대로 하고 와 버렸다.
완벽하게 성장한 차림새엔 퍽 어울리지 않는 액세서리였다.
‘어떡하지. 지금이라도 벗어 놓을까?’
물론 별일은 없을 것이다. 병은 방에 두고 왔으니까.
반질반질한 흰 구슬을 내려다보며 어떡할지 갈등하던 찰나였다.
문득 머리맡이 어두워졌다.
“공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