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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69화 (16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69화

귀에 익은 음성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햇볕을 받은 금발이 코앞에서 찬란하게 부스러졌다.

“……전하.”

나는 오지 말라고 했음에도 기어이 내 성인식에 참여한 사내의 모습에 설핏 웃음이 터져 나왔다.

더는 나를 상종도 하지 않을 거라 여긴 것이 무색하게, 칼리스토는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당당히도 나타났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고개를 살짝 숙여 묵례했다.

인사에도 답이 없던 황태자는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고갤 들라.”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아는 척하지 말라고 했는데, 또 아는 척하시네요.”

“아름답군.”

시큰둥한 태도에 곧장 엉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한발 늦게 그의 말을 이해했다.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입은 드레스인데, 선물을 준 당사자가 등장하니 당혹감이 밀려왔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내 모습에도, 황태자는 개의치 않고 내뱉었다.

“상상했던 것보다 더.”

“…….”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나 했는데…… 주변을 보니까 사내놈들 시선이 다 이쪽에 꽂혀 있더군.”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무뚝뚝하게 읊조렸다.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놀람도 잠시.

이렇게 삭막한 칭찬은 또 처음이라, 또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담담히 그의 선물과 찬사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농담 아니야, 공녀.”

그는 내 쪽으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저 새끼들 눈깔을 다 잡아 뽑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다고.”

나는 퍽 잔인한 농담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식이 끝날 때까진 계속 참아 보세요.”

“그게, 오늘의 주인공이 할 소리야?”

“아니면, 저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하시든지요.”

칼리스토가 그제야 살벌하게 경직돼 있던 표정을 풀고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 그대는 잔인한 걸 싫어하니까.”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던 그가 불쑥 물었다.

“내 선물은 잘 받았나?”

“네. 너무 많아서 다 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감사드려요, 전하.”

“오다 주운 거니 너무 부담 갖진 마.”

엊그제 집사가 말을 전할 때는 그저 과장된 첨언이겠거니 여겼는데, 정말 본인이 직접 한 말이었다.

나는 허세를 부리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공작저에 오실 때마다 어디 정복 전쟁이라도 하고 오십니까?”

“뭐, 어디 갖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말만 해. 그대가 그렇게 호전적인 성격인 줄 미처 몰랐군.”

“아니요, 없습니다.”

내 대답에 칼리스토가 다시 짧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이 내 가슴 아래쪽에 꽂혔다.

“그런데, 그거 지난번 솔레일에서도 하고 있었던 거 아닌가?”

“네? 뭐…….”

그의 시선을 따라 덩달아 고개를 내린 나는, 방금 전까지 고민 대상이었던 고대 마법 목걸이를 발견했다.

“아.”

“괴상하군.”

황태자가 영 어우러지지 않는 내 모습을 한마디로 일축했다.

“뭔데 그렇게 애지중지해? 감히 제국의 황태자가 내린 포상 위에 얹기나 하고 말이야. 무엄해.”

그가 불쾌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나는 그의 불쾌함을 십분 이해해서 순순히 답했다.

“빈수가 준 선물이에요.”

“빈수? 그게 누구지?”

“그때 도와준 그 타국의 마법사 있잖아요. 가면 쓴.”

“아, 그 악령 씐 맨발.”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황태자가 짧게 침음했다.

기억나는 게 악령과 맨발밖에 없는 듯했다.

나는 그의 뒤에 자리한 그 악령 씐 맨발의 사나이에게 좀 미안해져서 그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뭐 하는 물건인데?”

문득 황태자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물었다.

“착용자의 몸을 지켜 준대요.”

“어떻게.”

“주변에 위험이 있으면 가운데 구슬 색깔이 변한다는데…… 그 나라에선 애뮬릿 같은 건가 봐요.”

정확히는 독성이나 마법으로 인한 성질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었지만, 나는 대충 에둘러 말했다.

“꼭 저 같은 선물을 줬군.”

그제야 수긍이 가는지 황태자가 집요하게 캐묻는 것을 멈추고 빈정거렸다.

‘저 같은’ 게 뭔지 좀 궁금했지만, 나는 따져 묻기보단 서둘러 목걸이를 벗는 것을 택했다.

“그냥 차고 있어.”

그런데 막 은줄을 잡는 순간, 칼리스토가 나를 저지했다.

“왜요?”

“오늘 같은 날엔 별별 놈들이 다 기어들어 왔을 것 아니야. 무슨 일이 생길 줄 어떻게 알고.”

“그자 같은 선물이라면서요.”

“그래도 마법 실력 하나는 믿을 만하잖나.”

칼리스토가 어깨를 으쓱이며 산뜻하게 답했다.

그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서둘러 벗으려 한 게 머쓱해졌다.

은줄을 잡은 손이 스르륵 놓였다.

그리고 우리 사이에 짧은 정적이 찾아왔다.

실은 처음부터 느꼈다. 나처럼, 그도 오늘만큼은 다투지 않기 위해 많이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틀 전만 해도 다신 보지 않을 것처럼 헤어졌던 우리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 정도면 됐어.’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정도면 아무런 미련 남기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전하.”

나는 흘끔 주변을 곁눈질하며, 찬찬히 입을 벌렸다.

“……사람들이 쳐다봐요.”

성인식을 맞이한 귀족에게 건네는 인사치고, 시간이 꽤 지체됐다.

이미 아까 전부터 이쪽을 흘끔거리는 시선들이 한가득이었다.

“이제 그만…….”

“……이상하군.”

이제 그만 대화를 마무리 짓자고 말을 꺼내려던 찰나, 칼리스토가 불쑥 내 말을 끊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그대가 얄밉고 괘씸해서 미칠 것 같았거든.”

“…….”

“그래서, 오늘 아침에도 확 가지 말까 계속 고민했는데 말이야.”

그 고민이 무색하게도 이 자리에 있는 자신이 우스운지, 칼리스토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오늘 그대를 보는 순간, 그대의 머리카락 위로 빛이 부스러져서.”

“…….”

“눈을 뗄 수가 없더군.”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그는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눈을 내리깐 채, 혼잣말처럼 조곤조곤 중얼거렸다.

“분명 햇빛 때문에 그런 줄 알았는데…….”

“…….”

“가까이 있는데도 계속 그래, 공녀. 눈이 부실 지경이야.”

그가 문득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내게로 손을 뻗었다.

남자의 손가락 끝이 스칠 듯 말 듯 귀 옆으로 새어 나온 잔머리를 건드렸다.

“……이상하군. 발광 마법이라도 걸어 놓은 건가?”

그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내 머리를 어루만지는 손, 이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를 보며 항상 느꼈던 감상을, 황태자가 고스란히 똑같이 내뱉고 있었다.

내가 그의 찬연한 황금색 머리카락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처럼, 별것 아니었다.

머리 위에 꽂은 티아라라든지, 착용한 귀걸이라든지. 빛이 반사되어 그렇게 느껴질 만한 것들이 충분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그의 말처럼 기분이 이상해졌다.

가슴이 너무 울렁거려서…….

아니, 속절없이 떨리는 걸 참을 수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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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쉴 수 있었다.

나는 새빨간 호감도 게이지 바 위, 반짝이는 수치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지난번에 느꼈던 허무함과 실망감이 거짓말 같았다.

그가 나를 아직 완벽하게 사랑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나는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별거 아니에요, 전하. 다이아몬드 때문일 거예요.”

얼굴을 허물어뜨리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가까스로 입술을 끌어올리고 웃었다.

“전하께서 주신 다이아몬드가 너무 값진 것이라 그래요.”

“그런가?”

“네.”

“……그렇군.”

칼리스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내 머리칼을 건드리던 손을 찬찬히 거뒀다.

“그대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멀어지는 그의 손이, 그 순간이 꼭 영원같이 느껴졌다. 스치듯 서로의 눈이 마주치던 순간.

“황태자 전하.”

불쑥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끼어들었다.

퍼뜩 고개를 돌리니 공작과 그를 데리러 갔던 레널드가 다가와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멈춘 것만 같던 시간이 단숨에 빠르게 흘러갔다.

“고개를 들라.”

황태자는 선선히 허락이 담긴 명을 내렸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나를 쳐다본 게 언제였냐는 양, 얼굴을 무너뜨리고 예의 그 사나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군, 공작.”

“바쁘신 와중에 참석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장차 내게 큰 힘이 되어 줄 공작가의 대사인데 당연히 와야지.”

황태자가 능청스럽게 턱을 치켜들며 말했다.

공작의 눈썹이 한차례 꿈틀거렸다.

“더 인사를 나누고 싶사옵니다만, 송구하게도 이제 식을 시작해야 합니다, 전하.”

“아, 식. 그래, 공녀의 한 번뿐인 성인식이 늦춰질 순 없지.”

황태자는 이내 내게로 다시 고개를 돌린 후 아무렇지도 않게 인사를 건다.

“생일 축하해, 공녀.”

“감사합니다.”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군 채 화답했다.

이윽고 그가 몸을 돌려 제 지정석으로 돌아갔다.

나는 휘날리는 붉은 망토를 끝내 바라보지 않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어느새 수많은 귀족들이 마련한 테이블에 빽빽하게 착석해 있는 상태였다.

“이제 식을 거행하지.”

공작의 엄중한 목소리를 시작으로, 마침내 성인식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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