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0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세가 드높은 공작가에서 키우는 미친개의 성인식이 거행되었다.
나를 포함한 공작 일가는 단상 뒤에 나란히 섰다.
“에카르트가의 독녀, 페넬로페 에카르트의 성인식을 진심으로 축하하노라. 대잉카 제국의 명예로운 귀족 일원이자 한 명의 충성스러운 백성으로서, 사는 동안 그 성과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도록…….”
병환으로 인해 직접 오지 못한 황제를 대신하여 직속 시종이 칙서를 읽었다.
지루한 연설이 반복됐다.
그다음 순서는 가문 원로의 축언이었다.
“비록 시작은 갇혀 있는 번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악하는 한낱 미물에 불과하였지만, 성년을 맞이하여 이제는 허물을 벗고 긍지 높은 에카르트의 일원으로…….”
퍽 고상하고 길게 말했지만, 성인이 되었으니 더는 예전처럼 날뛰지 말란 소리였다.
왜 레널드가 늙은 원로를 가리키며 ‘잔소리 타령이 시작되려나 보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고도로 나를 까는 듯한 원로의 연설이 끝날 듯 끝나지 않을 듯 가늘고 길게 이어졌다.
“……따라서 페넬로페 에카르트가 성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정식으로 선포하노라.”
탁-.
마침내 원로 할아버지가 말을 마치고 들고 있던 우단 서류철을 깔끔하게 닫았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는 미소를 짓지도, 다른 화답조차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그 소리를 듣기만 했다.
주인 없는 성인식을 대신 치러 주는 동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뿐이었기 때문이다.
“집사.”
박수 소리가 조금씩 잦아들 무렵 공작이 식을 총괄하는 집사에게 눈짓했다.
집사가 즉각 몸을 움직였다. 그는 한쪽에 미리 준비해 뒀던 트레이를 끌고 왔다.
마지막 절차였다. 직속 가족끼리 축하와 경애의 의미로 세리주를 나눠 마시는 것.
물론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은 아니고, 이후 피로연으로 이어졌다.
어쨌든 별일 없이 무사히 마지막을 앞두고 있기에 나는 한시름 내려놓았다.
“그런데 데릭 이놈은 대체 어디 처박혀 있는 거야.”
그때 공작이 노기 가득한 목소리로 레널드에게 읊조렸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식이 거행되는 동안 데릭이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레널드가 휘휘 주변을 둘러보며 덩달아 눈살을 찌푸렸다.
“아오, 아까 전에도 한참 찾았는데 안 보이던데요. 지금이라도 데리고 올까요, 아버지?”
“당장 갔…….”
그러나 공작이 채 이를 갈며 허락하기도 전에 집사가 당도했다.
공작이 재빨리 입을 다물고 다시 사람 좋은 낯을 뒤집어썼다.
집사가 끌고 온 트레이 위에는 술병과 황금 잔 네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집사, 어서 데릭 놈 찾아 데리고 와.”
잔을 건네는 집사에게 공작이 작게 명령했다. 그는 이내 객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식이 멈췄다.
레널드면 또 모를까, 그토록 철저한 데릭 놈이 문제를 일으킬 줄은 몰라서 신선한 감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나는 집사 대신 하녀가 단상 위에 술병과 잔을 놓는 모습을 심드렁하게 구경했다.
달칵-.
내 앞엔 다소 투박한 금잔이 놓였다.
가문의 문장과 유려한 필기체가 새겨져 있는 공작과 두 아들놈들의 화려한 잔과는 달리, 이름조차 쓰여 있지 않은 단조로운 것이었다.
성인식처럼 특별한 날에 사용하는 황금배(gold cup)는 새것이 아닌, 오래간 애용한 것을 쓴다.
그만큼 해당 날의 주인공을 향한 애정을 담는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귀족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금반지 대신 이름이 새겨진 금배를 주고받았다.
페넬로페에게도 컵이 있다는 사실을 얼마 전에 에밀리에게 들어 알았다.
그녀가 공작을 따라 막 공작가에 왔을 땐 데릭의 성년식을 바로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런 이유로 급히 금배를 준비하느라 안타깝게도 이름을 새기지 못했다.
그 이후엔 새길 시간이 충분했지만, 레널드의 성인식까지 4년이란 긴 틈이 존재했다.
주인에게마저 잊힌 성배는 아직까지도 민무늬 상태 그대로였다.
멍하니 금잔들을 바라보고 있는 와중, 멈춘 식에 의아함을 느끼는 귀족들의 술렁임이 점점 커졌다.
데릭을 찾으러 간 집사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페넬로페.”
더 지체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공작이 별수 없이 술병을 들었다.
“잔을 들거라.”
나는 군말 없이 내 몫의 잔을 들었다.
잠시 중단됐던 성인식이 다시 진행됐다.
쪼르륵-. 피처럼 붉은 액체가 황금잔 안에 쏟아져 들어왔다.
이어서 내게 병을 건네며 공작이 스치듯 속삭였다.
“너무 독하거든, 마시는 척만 하고 바닥에 버리려무나.”
반가운 소리였다. 딱히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잔에 술병을 기울였다.
챙- 이윽고 잔이 맞부딪혔다.
“페넬로페를 위하여.”
짧게 구호를 외친 공작이 그대로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었다. 다시 일정한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공작이 알려 준 대로 마시는 척하고 잔디밭 위에 그대로 술을 버렸다.
다시 단상 위에 잔을 놓자 레널드가 자연스럽게 술을 따랐다.
“페넬로페를 위하여.”
앞서 공작과 했던 행위가 한 번 더 반복됐다.
술을 버리는 게 좀 전보다 더 쉽고 자연스러웠다.
레널드와도 세리주를 나누는 것이 끝나자 공작이 고요히 입을 열었다.
“소공작은 안타깝게도 일이 있어…….”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공작의 말을 막고 누군가 엄숙하고 고요한 자리에 끼어들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휙 돌아갔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집사였다.
그를 슬며시 밀치며 장신의 사내가 뚜벅뚜벅 단상 앞으로 걸어 나왔다.
늘 그랬듯 차갑고 서늘한 얼굴이 나를 마주했다.
나는 조금 놀란 눈으로 튀어나온 그를 쳐다보다가 멈칫했다.
‘게이지 바가…….’
데릭의 정수리 위, 게이지 바 색이 바뀌어 있었다.
주황색에서, 샛노란 색으로.
눈이 부릅떠졌다.
데릭의 호감도 게이지 바가 바뀐 것에 신경이 쏠려 나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의 뒤에 끌려 나온 자그마한 인영을.
“저 아가씨는 누구죠?”
“소공작님의 숨겨진 연인인가요? 대체 무슨 일이…….”
고요한 장내에 소곤거림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먼저 알아차린 것은 다름 아닌, 공작이었다.
“데릭, 너…… 너……!”
공작은 그가 잡고 있는 가느다란 손목을 응시하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경악하는 제 아비를 보고 데릭 놈은 태연히 읊조렸다.
“직계 가족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자리가 아니겠습니까. 이본을 데리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아, 아버지…….”
그의 등 뒤에서 작게 떠는 몸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여주였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파드득 어깨를 떨며 허겁지겁 도로 고개를 숙였다.
누가 봐도 가짜 공녀의 패악에 못 이겨 숨어 있다가, 친오라버니의 손에 끌려 나온 듯한 모습이었다.
“아버지……?”
“그럼 저, 저 아가씨가 설마…….”
작은 소곤거림은 금세 번잡한 웅성거림으로 번졌다.
나는 순식간에 엉망이 된 성인식을 무미건조한 눈으로 관조했다.
“데릭 에카르트! 너 대체 이게…… 이게 무슨 짓이야-!”
시퍼렇게 변색된 얼굴로 파들파들 떨던 공작의 입에서 기어이 노성이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
데릭은 제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에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사람처럼 지껄였다.
“왜 페넬로페의 성인식을 위해 이본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것을 미루고, 존재마저 숨겨야 하는지요.”
“너, 너! 네놈이 감히……!”
“가솔들은 물론, 제국의 귀빈들이 대부분 모인 김에 이 자리에서 공표하시죠.”
공작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그 순간 내게로 슬쩍 이동했다.
“……어릴 적 잃어버렸던, 에카르트 공녀가 다시 돌아왔음을.”
찰나, 놈의 푸른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생각보다 놀랍진 않았다.
아침에 둘이 다과를 든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될지도 모르겠다고 이미 가정을 해서일지 모른다.
무표정한 나를 빤히 바라보던 놈의 눈이 그 순간,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동요하지 않는 내 모습이 썩 마음에 들지 않는 걸까. 놈의 턱이 도드라지게 불거졌다.
나는 놈을 무심히 스쳐 지나가 엉망진창이 된 성인식장을 둘러보았다.
‘이제 어떻게 되려나.’
고요했던 후원 안은 도떼기시장처럼 소란스러워졌다.
이본은 그 틈을 타 데릭의 등 뒤에서 완전히 벗어나 그렁그렁한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때였다.
〈SYSTEM〉 하드 모드의 제한 기간이 끝났습니다.
호감도 집계 중……
〈SYSTEM〉 …
〈SYSTEM〉 …
〈SYSTEM〉 …
〈SYSTEM〉 호감도 집계 완료!
불현듯 눈앞이 환해졌다. 그리고.
〈SYSTEM〉 당신은 제한 기간까지 그 어떤 공략 대상과도 엔딩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게임 공략에 실패했음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떴다.
여기까진 각오하고 있어서 괜찮았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SYSTEM〉 실패로 인해 패널티가 발생합니다.
‘패널티……?’
꿈에도 예상치 못한 전개에 일순 머릿속이 하얘졌다.
‘뭐야? 무슨 패널티가…….’
상황을 받아들이기도 전에, 시스템 창 안의 글씨가 빠르게 변했다.
〈SYSTEM〉 [모든 남주들의 호감도 하락] 패널티 적용.
[이클리스 - 20%]
[데릭 -20%]
[레널드 -10%]
[뷘터 -10%]
[칼리스토 -10%]
눈 깜짝할 새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를 단 흰 글씨가 사방에서 환영처럼 떠올랐다.
그간 내가 피눈물을 흘리며 쌓아 올렸던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SYSTEM〉 하드 모드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