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1화
“하, 하아…… 하하하…….”
눈앞이 시뻘겋게 변했다. 나는 무너져 내리는 모래성 사이에서 허탈하게 웃었다.
“야, 너…….”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는 내가 이상했는지, 레널드가 생경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내 기괴한 웃음소리에 수군거림이 차차 잦아들었다.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노기를 띠던 공작도, 대립하던 데릭 놈도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모든 것이 예상대로였다.
하드 모드는 처참함만을 남긴 채 끝이 났고, 나는 여전히 게임 속이었다.
이 빌어먹을, 이 빌어 처먹을 게임 속.
잔을 든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괜찮아.’
하지만 아직 좌절하기엔 일렀다.
내겐 아직 쓰지 않은 하나의 방법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고 가만히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지.’
이대로라면 꼼짝없이 진짜 공녀를 핍박한 가짜 공녀가 되지 않는가.
물론 이 빌어먹을 곳을 나가고 나면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그러면.
결국 원래의 스토리대로 악녀로 전락하면.
그동안 놈들 앞에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목숨을 구걸해 오던 내가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나는 이를 한번 까득 사리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첫째 오라버니 말씀이 모두 맞아요.”
한껏 턱을 쳐들고 좌중을 둘러보았다.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페넬로페처럼.
그러다 시선을 떨고 있는 가녀린 여자에게 고정시켰다.
“이본.”
나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페넬로페……!”
공작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를 다급히 불렀지만 늦었다.
나는 단상을 돌아, 이본에게 다가갔다.
송곳 같은 데릭의 시선도 개의치 않은 채 부드럽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신에게 감사하게도 제 하나뿐인 자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여러분.”
이본이 휘둥그레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모든 남주들과 엑스트라들도 그랬다.
하지만 나는 사력을 다해 웃었다.
“아버지께선 이본이 돌아온 것을 알리려 하셨지만, 제가 손님들 사이에 혼란이 일 것을 우려해서 피로연 때 공표해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
“언니를 숨기려 했다니, 첫째 오라버니와 소통에 오해가 있었나 봐요. 그렇죠, 아버지?”
나는 공작을 돌아보며 동의를 구했다.
“오늘 아침 제 방에 찾아와 그에 관해 대화를 나눴잖아요.”
침도 바르지 않고 지어낸 말이 술술 쏟아져 나왔다.
처음 듣는 소리에 공작이 움찔거렸다.
그는 내게 무어라 말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도, 끝내 입을 다물었다.
당장에 터져 나오는 추문을 막으려면 그 수밖에 없었으니까.
후원에 소름 끼치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굳은 표정의 데릭은 거들떠보지 않은 채 이본을 잡아끌었다.
“이리 와, 이본 언니.”
맞잡은 손을 타고 섬뜩한 한기가 전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단상을 돌아 내 자리로 돌아왔다.
당황스러운 기색이 느껴지는 이본을 내 곁에 바싹 세워 둔 후 앞에 있는 금잔을 들이밀었다.
“내게 세리주를 따라 주겠어? 우린 이제 가족이잖아.”
“페넬로페!”
공작이 엄중한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나는 과장되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애원했다.
“아버지, 제 생일이잖아요.”
“…….”
공작의 입이 딱 다물렸다. 소리 없는 묵언에 나는 생긋 웃었다.
그는 결국 집사에게 손짓했다. 여분의 잔을 가지고 오란 소리였다.
이런 와중에도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냉철하게 행동하는 그가 새삼 대단해 보였다.
수습할 수 없을 만큼 미묘한 분위기가 짙게 깔렸지만, 성인식의 마지막 절차는 내 의지하에 강행됐다.
얼마 후 집사의 지시에 따라 하녀 하나가 금잔을 들고 달려왔다.
공교롭게도 이본의 임시 시녀였다.
페넬로페의 황금잔 옆에 비슷한 민무늬 잔이 놓여졌다.
나는 곧바로 술병을 들어 이본에게 건넸다.
“따라 줄 거지?”
그때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사정 없이 떨리던 이본의 눈에 기쁨이 듬뿍 차올랐다.
“그, 그럼……!”
그녀는 내게 끌려오며 풀 죽은 채 눈치를 본 게 거짓말처럼 냉큼 세리주 병을 받았다.
나는 단상 위에 놓인 민무늬 잔 중 하나를 집어 내밀었다.
“고, 고마워, 페넬로페. 그리고 미안해, 성인식을 망쳐서…….”
내가 내민 잔에 세리주를 따라 주며 그녀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그런 소리 마. 망치긴.”
나는 빙긋 웃으며 그녀가 내민 술병을 받아 들었다.
반대로 그녀의 잔에 세리주를 따라 주며, 자애로운 자매를 흉내 냈다.
“미안해할 필요 없어. 어차피…….”
그 순간이었다. 불현듯 가슴 쪽에서 미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쪼륵-.
나는 말은 물론이고, 병을 기울이던 것마저 멈춘 채 슬쩍 시선을 내리깔았다.
황태자의 권유로 결국 벗지 못한 고대 마법 목걸이. 그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흰 구슬의 색이 변해 있었다.
노르스름하게.
나는 딱딱하게 얼어붙은 채로 간신히 시선을 들어, 이본을 바라보았다.
환히 내리쬐는 햇빛 때문에 아직 눈치채지 못했는지,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갑자기 행동을 멈춘 나를 응시했다.
- 그런데 그 애가 제게 상단 거리로 가는 길을 묻는 게 아니겠어요?
찰나의 순간, 에밀리의 목소리가 사정없이 귀를 후려쳤다.
나는 내 방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두고 온 보랏빛 액체가 담긴 병을 떠올렸다.
내가 써 보지 않은 남은 하나의 방법.
그것은 죽어서 탈출하기였다.
하드 모드를 코앞에 둔 채 극에 몰린 내가, 이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위험까지 감수해야 하더라도.
나는 뷘터에게 잠든 것처럼 고요히 죽을 수 있는 독을 의뢰했다.
그리고 본래, 그 짓을 성인식 도중 진행하려 했다.
작은 심술이었다.
‘내가 죽어 나자빠지는 꼴 보면서, 어디 한번 천사 같은 여주를 의심해 보라지.’
그러나 성인식 바로 직전 계획을 변경했다.
에밀리의 언질도 언질이었지만, 공작과의 대화가 컸다.
양딸의 성인식을 최고로 해 주고 싶었다는 그와 생에 딱 한 번뿐인 성인식도 치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페넬로페.
그것을 생각하니, 차마 성인식을 엉망으로 망칠 수가 없었다.
독이야 언제든 마실 수 있는 것 아닌가.
어차피, 하드 모드가 어떻게 종료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나는 깔끔하게 그 계획을 포기하고 서랍을 걸어 잠갔다.
분명, 성인식이 끝난 직후 아무도 모르게 홀로 조용히 시도하려고 했는데…….
“페넬로페……?”
꽤 오랫동안 미동 없이 서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이본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나는 잠시 멈추고 있던 손목을 기울여 마저 세리주를 따랐다.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강해졌다.
“그, 목걸이는…….”
부정할 수 없을 만큼 샛노란색으로 변한 구슬의 모습에, 마침내 이본 또한 눈치챘다.
그녀가 흠칫하며 목걸이를 흔들리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쪼르륵-. 나는 잔 가득 시뻘건 술을 채운 후 단상 위에 병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본.”
“어, 어……?”
그녀가 화들짝 놀라 내 목걸이에서 시선을 떼고 나를 응시했다.
짧은 새 결론을 내린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잔이 바뀌었어.”
“으, 응?”
“그 잔이 내 잔이야. 아무런 무늬가 없어서 헷갈렸나 봐.”
나는 그녀가 들고 있는 세리주가 가득 찬 황금잔을 가리켰다.
거짓말이었다.
이본의 임시 하녀는 가져온 잔을 정확히 그녀의 앞에 두었으니, 헷갈릴 일 따윈 없었다.
“그, 그랬나? 미, 미안해…….”
나는 당황한 기색으로 울먹이는 그녀에게서 막무가내로 잔을 빼앗아 들었다.
그 바람에 가득 따른 세리주가 흘러넘쳐 손등을 적셨다.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액체가 꼭 손목에서 흘러나오는 피 같았다.
“헉, 페넬로페. 수, 술이 흐르는데…….”
“네 잔 들어.”
나는 허둥대는 여주가 정신을 차리고 방해하기 전에 짧게 읊조렸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내 잔을 들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은 채, 휙 몸을 돌렸다.
“오늘의 주인공은 제가 아닌 돌아온 이본이에요, 여러분.”
나는 빼앗은 이본의 잔을 들어 보이며 관객들에게 말했다.
다시 한번 웅성거림이 후원을 점령했다. 나는 환하게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모두 축하해 주세요. 진짜 공녀의 귀환을.”
‘페넬로페!’ 낮게 윽박지르는 공작과 경악에 가득 찬 레널드의 시선이 느껴졌다.
이것이 게임 스토리건, 여주의 함정이건, 그런 건 이제 아무런 상관없었다.
이곳에서 죽어 탈출하면 끝이니까.
‘이 짓도 이제 끝이로구나.’
계획한 바는 아니었지만, 막상 이렇게 되자 속이 후련했다.
‘결국 이렇게 될 걸.’
무엇을 위해 그토록 두려워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마지막으로 남주들의 얼굴을 차례차례 훑었다.
팔짱을 낀 채 무표정하게 내가 하는 행동을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는 데릭.
갑작스럽게 돌아가는 꼴이 좀 이상한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황태자.
그리고 불안함이 잔뜩 스민 얼굴의 뷘터.
놈들의 정수리 위에 아직도 게이지 바가 남아 있는 게 좀 이상했지만, 신경 꼈다.
이제 저 지긋지긋한 면상들을 보는 것도 오늘로 끝이었다.
“주인공을 위하여.”
나는 나지막이 중얼거린 후, 눈앞에 쳐들고 있던 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누군가 말릴 틈도 없이 안에 있는 액체를 모조리 삼킨 후 탁, 잔을 내려놓는 순간.
“영애!”
끼익, 콰당-!
돌연 뷘터가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이제야 목걸이의 색을 눈치챈 것 같았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베르단디 후작을 사람들이 하나같이 놀란 눈으로 돌아보았다.
나는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은 채 그런 그를 멀거니 응시했다.
문득 가슴에 뜨끈한 감각이 느껴졌다. 점차 심박 수가 빨라졌다.
일순 눈앞을 점령하는 아찔함에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렸다.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듯 눈매를 꿈틀거리던 황태자가 벌떡 몸을 일으키는 것이 스치듯 보였다.
“의원을, 당장 의원을 불러야……!”
불안한 눈으로 연신 나를 살피던 뷘터에게서 버럭 커다란 소리가 터져 나올 즈음.
“으윽…….”
가슴이 타들어 갈 듯 뜨거워졌다. 어마어마한 고통에 눈앞이 새하얘졌다.
목 밑에서 천불이 드글드글 끓는 느낌에, 나는 작게 기침을 토해 냈다.
“커흑!”
문득 눈앞이 시뻘게졌다. 아닌 게 아니라, 내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정말로 시뻘건 핏물이었다.
“꺄아아악-!”
“페넬로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아득하게 귓가를 둥둥 울렸다.
후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하지만 서서히 몸이 허물어지던 나는 그것을 느낄 새가 없었다.
타악-! 단상 끄트머리를 잡고 간신히 쓰러지던 상체를 지탱할 무렵.
문득 눈앞이 하얘졌다.
〈SYSTEM〉 메인 퀘스트 ~사라진 아이들의 행방~
[세 번째. 악의 세력으로부터 납치된 아이들 구하기] 퀘스트 기타 보상 발동!
‘뭐야.’
가물가물한 시야 사이로 새하얀 네모 창이 떠오른 것이 보였다.
〈SYSTEM〉 고난이도의 퀘스트를 해결한 당신! 이대로 끝내긴 아쉽지 않겠습니까?
하드 모드를 열렬히 플레이해 준 당신께 특별 보상으로 절찬리에 히든 엔딩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집니다!
1,000,000,000골드 -〉 500,000,000골드
[지불 / 거절]
‘……히든 엔딩?’
모든 것이 아득하고 흐릿해지는 와중에도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꾸만 무너지는 몸을 일으키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자꾸만 눈앞이 뿌옇게 이지러지고 팔이 뚝뚝 꺾였다.
그러는 사이 시스템 창 안의 글씨가 변했다.
〈SYSTEM〉 보유 자금이 충분하므로, 5초 후 자동 지불됩니다.
〈SYSTEM〉 5
〈SYSTEM〉 4
‘시발, 뭐야! 아니야, 아니야!’
나는 마구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거절]을 누르기 위해 손을 내뻗었다.
“커헉-!”
그러나 그 순간, 또 한 번 요동치는 몸과 함께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그때, 누군가 거칠게 나를 끌어안았다. [거절]에 닿을락 말락했던 손가락이 저지됐다.
“의원을, 의원을 불러라! 어서!”
나를 껴안은 누군가 울부짖었다.
〈SYSTEM〉 3
〈SYSTEM〉 2
그러든지 말든지, 나는 시스템 창에 시선을 못 박은 채 절박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안, 안…… 꺼…….”
안 돼! 거절 눌러야 하니까 꺼지라고!
숫자가 빠르게 변했다. 나는 [거절]을 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손을 허우적거렸다.
“커억!”
그러나 또 다시 거칠게 몸이 들썩이고, 한차례 눈앞이 거무룩 죽었다.
비명, 경악, 혼돈, 절규, 울부짖음, 그 모든 것이 담긴 아수라장.
‘아니야, 비켜! 아니야, 씨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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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STEM〉 [5억 골드]를 지불하여 히든 루트로 진입합니다!
(남은 보유 자금: 999,999,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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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카운트다운이 완료되고 떠오른 시스템 창. 그 모습이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악마처럼 느껴졌다.
쿠쿵-. 귓가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발 그만 나를 죽…… 여…… 줘…….’
나는 눈을 감으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