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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2화 (172/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2화

갑작스러운 친딸의 등장에도 여자는 태연했다.

어그러진 분위기를 재빠르게 모면하고, 담담히 식을 강행하는 행동은 그 어떤 대귀족보다 우아하고 품위 있었다.

‘에카르트의 미친개’라는 별칭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주인공을 위하여.”

그 나지막한 목소리가 마법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순간 후원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의 시간이 멈췄다.

그사이 여자는 홀로 고고하게 잔을 쳐들고,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커흑.”

그리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붉은색에 가까운 진분홍빛 머리칼이, 낙화하는 꽃처럼 천천히 스러졌다.

그래서 데릭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바로 알 수 없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이본, 레널드, 공작 모두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고 얼어붙은 채 서 있었다.

허물어지던 여자의 몸이 가까스로 단상을 붙들었다.

“커헉!”

그러나 또 한 번 작은 몸뚱이가 펄떡이며 피를 쏟아 낼 무렵.

“의원을……!”

“꺄아아아악-!”

한발 늦은 괴성과 함께 식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페넬…….”

데릭이 입술을 달싹거리며 본능적으로 주춤 앞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퍼억-! 누군가 그의 몸을 거세게 밀쳤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면서도 데릭은 그 짧은 찰나, 흩날리는 금발을 보고 의아함을 느꼈다.

뒤쪽에 얌전히 앉아 있었던 황태자가 튀어 오르듯 달려가는 중이었다.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쏜살같이 단상 너머에 도착한 그는 가까스로 무너지는 몸을 받아 제 품에 끌어안았다.

그가 입은 새하얀 제복에 붉은 물이 옮겨 드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제야 데릭은 페넬로페가 토한 것이 피였음을, 정확히 인지했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무언가가 그의 양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그저 눈을 부릅뜬 채, 황태자의 품에서 축 늘어지는 진분홍빛 머리칼을 바라볼 뿐.

“의원을, 의원을 불러라!”

페넬로페를 끌어안은 채 황태자가 울부짖었다.

그 벼락같은 음성에 그제야 마법이 풀렸다.

경악에 가득 찬 채 얼어붙어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 뜨고 있어, 공녀. 응? 감지 마, 안 돼. 제발, 제발…….”

끈적끈적한 핏물이 손에 묻는 것도 개의치 않은 채 황태자가 페넬로페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무성한 소문으로 점철된 두 사람 사이에 기묘한 애틋함이 감돌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공작이 창백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섰다.

“……저, 전하.”

“씨발, 의원은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애 죽어 가는 거 안 보여?!”

그러나 말을 걸기가 무섭게, 황태자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빛냈다.

꼭 공작이 품에 안긴 여자를 빼앗아 가기라도 할 것처럼 경계하며.

“제가, 제가 공녀님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소리쳤다.

“베르단디 후작.”

몰려든 인파를 헤치고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뷘터였다.

그는 희게 질린 안색으로 의식을 잃은 공녀를 안고 있는 황태자에게 빠르게 읍소했다.

“황태자 전하, 제가 잠시 공녀님을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그대가 무슨 수로.”

“위급 상황을 대비하여 평소 가지고 다니는 해독제가 있습니다.”

“베르단디 후작! 지, 지금 공작저 내에서 누군가 독살을 시도하려 했단 말인가!”

공작이 예민하게 반응했다.

자칫 정치적인 문제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

정황상 의심을 가질 뿐, 확정을 짓기엔 시기상조였다.

“그건…… 제가 감히 답을 내릴 사안이 아닙니다.”

뷘터는 황태자와 페넬로페를 둘러싼 사람들 너머를 흘긋 바라보며 덧붙였다.

“저는 그저, 당장 할 수 있는 응급 처치를 해 드리고 싶은 것뿐입니다.”

“자네를 뭘 믿고.”

황태자가 그를 바라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설령 공녀가 독을 먹었다 한들, 자네가 가지고 있는 정체 모를 것과 어떤 작용을 일으킬지는 모르는 일 아닌가.”

“극독 해독제입니다.”

뷘터가 덤덤하게 답했다.

“공녀님이 드신 독이 정확히 어떤 종류인지 모르니 완전한 해독은 힘들겠지만, 어느 정도 중화 역할을 할 겁니다.”

“…….”

황태자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런 후작을 노려보았다.

신뢰해도 되는지 가늠하는 듯했다.

공작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전하의 말씀이 맞소. 페넬로페가 독을 먹은 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그냥 의원을 기다리는 것이…….”

“독이든, 뭐든, 몸에 해되는 거 아니면 당장 뭐라도 먹여 봐요.”

“레널드.”

그때까지 멍한 얼굴로 얼어붙어 있던 레널드가 붉게 충혈된 눈을 하고 제 아비에게 손짓했다.

“하지만…….”

“베르단디 후작님을 못 믿습니까, 아버지? 응급 처치라잖아요. 이러다 의원 오기도 전에 얘 죽겠어요.”

“…….”

그 손가락 끝이 향하는 방향을 확인한 공작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입을 닫았다.

방금 전까지는 피를 토하며 경련하던 페넬로페의 몸이 어느새 잠잠해져 있었다.

칼리스토가 제발 뜨고 있으라고 애원하던 두 눈은 곱게 감긴 채 미동도 없었다.

시체처럼 서늘한 낯빛, 찬찬히 사그라지는 숨결.

그를 확인한 황태자가 꽉 조여드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먹여.”

“전하!”

“하지만 혹시라도 잘못되면.”

만류가 담긴 공작의 외침에도 황태자가 짓씹듯이 읊조렸다.

“……각오해야 할 거야, 후작.”

허락이 떨어지자 뷘터가 침착한 얼굴로 품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남들 앞에선 태연하게 되뇌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에서 가려지자 우습게도 손끝이 벌벌 떨렸다.

혹시 몰라 해독제를 가지고 왔지만, 그는 맹세코 이것이 이렇게 쓰일 줄 몰랐다.

‘……그때, 무슨 말을 듣더라도 거절했어야 했던가.’

한 줄기 회한이 뇌리를 스쳤다.

- 아가씨께서 만약 의뢰를 거절당한다면, 진 빚을 갚는 것으로 하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나 하녀의 그 말을 듣는 순간, 차마 재차 거절의 말을 뱉을 수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죄인이었다.

레일라와는 조금도 관련 없는 사람을 함부로 의심하고 시험한 죄.

- 하지만 관심 같은 헛소리로 사람을 기만하지는 말았어야지.

동시에 제 감정조차 추스르지 못한 주제에 말로써 그녀를 기만한 죄.

먼저 찾을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그는, 연락을 취해 용서를 구하고 싶다는 충동과 단념하고 감내해야 한다는 이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번뇌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가 그를 찾는 하녀를 보내고, 또 그 하녀에게서 의뢰 내용을 전달받았을 때.

그때 들었던 생각은 우습게도 실망보단, 안도와 걱정이었다.

그간 굳게 지켜온 신념과는 거리가 먼 불경한 생각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해독제 없는 독을 제조하면서도, 단 한 번도 그것을 그녀 스스로 마시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물며 제가 준 것도 아닌 독을 먹고 쓰러지리란 것은 전혀…….

‘그런데 왜.’

그녀는 분명 금배에 독이 든 것을 알고 있었다.

목걸이의 구슬 색이 변했으니까.

멀리 떨어져 앉은 그조차 알아 볼 정도로 선명히 빛나던 그 색을, 그녀가 보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 왜 그렇게 무덤덤한 표정으로 그것을 들이킨 것인가.

혼란으로 뒤섞인 속이 매스꺼웠다.

그러나 태평하게 답 없는 질문이나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그는 이를 사리물고 손끝에 닿은 병을 바깥으로 끄집어냈다.

보랏빛 액체가 담긴 작은 유리병의 마개를 열고 곧장 몸을 숙였다.

제 입으로 명을 내렸음에도 공녀를 꽉 끌어안은 채 내보일 생각을 안 하는 황태자의 모습에 쓴 물이 올라왔다.

그는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말했다.

“전하, 영애의 얼굴을…….”

황태자가 서슬 퍼런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 마지못해 공녀의 얼굴을 품에서 내보였다.

핏물이 흥건한 얼굴이 드러났다.

그 참혹함에 잠시 눈을 질끈 감은 뷘터는, 이내 조심스러운 손길로 그녀의 입술을 벌리고 병을 기울였다.

한 방울, 두 방울, 세 방울.

입 새로 그녀에게 준 독과 닮은 액체가 똑똑 떨어졌다.

곧 멎을 것처럼 희미하게 이어지던 숨소리.

그것은 다행히 얼마 안 가 차차 원래대로 돌아왔다.

시체처럼 창백하던 안색 또한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공작님! 의원을 데려왔습니다!”

때마침 집사가 불러온 의원과 들것을 든 사용인들이 도착했다.

뷘터의 의해 응급 처치가 끝난 페넬로페는 저택 안으로 빠르게 이동되었다.

“하…….”

숨죽인 채 그것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입에서 저마다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

데릭.

그는 급박하게 돌아가던 상황 속에서 한 발짝 떨어진 채, 마지막까지 그 모든 것을 고요히 관망하기만 했다.

철썩-!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뺨에 번쩍, 불이 붙었을 때였다.

“너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눈을 뜨자, 흉흉하게 일그러진 얼굴의 아버지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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