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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3화 (17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3화

“황제 폐하의 시종장은 물론 황태자 전하까지 온 마당에, 일을 그따위로 만들어 놔!”

공작이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버럭 노성을 질렀다.

데릭,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매우 의젓한 편이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깨우쳤고, 굳이 시키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할 일을 끝냈다.

때문에 레널드와는 달리 공작이 직접 손을 댄 적이 손에 꼽았다.

주르륵- 한 줄기 핏자국이 그의 입가를 타고 흘렀다.

데릭은 입 안 가득 느껴지는 찝찔함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토록이나 분노한 아버지를 마주하는 것 또한.

그는 돌아갔던 고개를 천천히 원상복귀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애초에 이본의 존재를 숨기지 않고 바로 밝혔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겁니다. 페넬로페의 응석을 받아 주느라 이본이 돌아왔다는 공표를 미루지만 않았어도…….”

“이 새끼가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공작이 한 번 더 휙 손을 높이 쳐들었다.

그러나 그 손은 끝내 떨어지지 않고 허공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공표를 미루고 이본을 숨긴 것은 순전히 내 뜻이다, 페넬로페의 요청이 아니라!”

조금씩 어긋나던 가족은 이제 다시 기워 붙일 수도 없을 만큼 파국에 치달았다.

공작은 절망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소리쳤다.

“생에 단 한 번뿐인 성인식이지 않느냐, 누구보다 주목받아야 할 순간!”

“…….”

“떠들기 좋아하는 천박한 놈들한테서 곧 내쳐질 양딸 소리 나오는 꼴 듣기 싫어서 내가 직접 명했어!”

“…….”

“그런데도! 그런데도 오늘 아침까지 내게, 이본이 돌아왔으니 성인식을 취소해 달라는 말이나 하면서……!”

마구잡이로 내뱉던 공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다 입을 다물었다.

데릭의 푸른 눈이 일순 움찔거렸다.

그러나 막막함이 눈앞을 가린 탓에, 공작에겐 그 미세한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듬직하고 자랑스러웠던 첫째 아들은 어린 여동생을 잃어버리고 말수가 급격히 줄었다.

그래도 지낸 기간이 있으니, 페넬로페를 가족으로 어느 정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다.

착각이었다.

데릭은 페넬로페를 받아들인 게 아니었다.

그저 사사로운 감정보다 공적인 제 지위를 중시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을 뿐.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을 방치했던 과거가 사무치도록 후회됐다.

공작은 손으로 연신 얼굴을 문지르며 한탄처럼 중얼거렸다.

“……네가 이토록이나 페넬로페를 싫어하는 줄, 내가 미처 몰랐다.”

“…….”

“내가, 내가 몹쓸 짓을 했구나. 너희들 모두에게…….”

데릭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아버지의 말이 좀처럼 이해가 가지 않았다.

“싫어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한 번도, 단 한 번도 페넬로페를 싫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저.

“그런 유치한 감정에 치우쳐 벌인 일이 아니라, 성인식 때문에 친딸을 찾았다는 공표를 미뤘다는 소문이라도 잘못 퍼지게 되면 에카르트의 위신이…….”

“되었다. 그 얘기는 그만하자꾸나.”

그때, 공작이 한 손을 들고 그를 막았다.

그는 흥분이 조금 가셨는지, 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다소 냉정하게 읊조렸다.

“이제 오늘 일은 공녀의 성인식에서 벌어진 단순한 해프닝이 아니라, 에카르트 공녀를 노린 독살 사건이 되었으니까.”

“독살…… 말입니까?”

데릭의 푸른 눈이 그 순간 부릅떠졌다.

환히 웃으며 금배를 위로 쳐들다, 갑자기 피를 뿜으며 쓰러지던 그 애.

그는 조금 전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마치 기억을 통째로 조각내서 오려 붙인 듯 그때 일이 드문드문 끊겼다.

그 사이로 지는 꽃처럼 스러지는 진분홍빛 머리칼만이 간간이 떠오를 뿐이다.

공작의 말이 시발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맥박이 미친 듯이 펄떡이기 시작했다.

‘내가, 왜 이러지?’

부동자세를 취하느라 등 뒤로 맞잡은 손에 땀이 차올랐다.

데릭은 제 아비처럼 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차근차근 되짚어 보았다.

술을 마신 직후 피를 토하고 쓰러졌으니, 독을 의심할 만도 했다.

하지만 베르단디 후작을 제외한 그 누구도 쉽사리 확신하지 못했다.

같은 세리주를 마신 공작과 레널드가 멀쩡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누가 감히 에카르트를 상대로, 그런 무도한 짓을 저지를 엄두를 낸단 말인가.

데릭은 침중한 공작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럼 그 애는 지금 어떤지, 정신은 차렸는지, 독은 무슨 종류인지.

묻고 싶은 말이 혀끝을 뱅뱅 맴도는데,

“독을 먹은 것이…… 확실합니까?”

그러나 정작 나온 말은 전혀 다른 종류였다.

공작은 그런 아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다 짧게 대답했다.

“방금 전 주치의가 확진했다.”

데릭은 그 순간, 손바닥이 미끌거릴 정도로 축축해졌다는 것을 느꼈다.

“감히 누가 에카르트를 상대로…….”

그는 그를 감추기 위해 더욱 세게 두 손을 맞잡으며 뇌까렸다.

“베키라는 하녀를 지하 감옥에 가둬 놓고, 이본을 방에 연금해 두었다.”

공작이 짧게 대꾸했다. 데릭이 퍼뜩 고개를 쳐들고 되물었다.

“이본을 왜…….”

“잔을 가져온 것이 이본의 임시 하녀였으니까.”

“아버지.”

“페넬로페의 전담 하녀가 증언하더구나. 얼마 전 이본의 임시 하녀가 제게 상단 거리로 가는 길을 은밀히 물어보았다고.”

데릭은 이어지는 공작의 말에 내심 놀랐다.

어느새 수사가 그만큼이나 진척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 애는 지금 어떻게 되었는지, 당장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본이…… 이본이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그러나 지금은 그런 사사로운 감정보다 일어난 사건을 냉철하게 되짚어 볼 때였다.

그게 에카르트의 소공작이 할 일이었기에.

데릭은 혼란스러운 생각들을 한쪽으로 젖혀 두고, 공작의 말에서 의문스러운 점을 지적했다.

“이본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라, 딱히 그럴 만한 당위가 없습니다. 페넬로페에게 독을 먹여서 무슨 이득이 있겠습니까.”

“…….”

“표적이 페넬로페라는 것도 납득 가지 않습니다. 어쩌면 아버지나 저를 노린 일일지 모릅니다.”

“…….”

“아니면 그 하녀,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엘렌 후작 쪽이 아닐는지요. 최근 잠잠하다는 보고를 계속 받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사냥 대회 때의 일로 앙심을 품고 은밀히 진행했을 가능성이…….”

심각한 얼굴로 횡설수설 떠오르는 생각을 내뱉던 데릭이 번뜩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 당장 지하로 가서 그 하녀를 직접 심문하겠습니다. 시간이 길어져 봤자 빠져나갈 틈만 줄 뿐…….”

“데릭.”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빠져나갈 것처럼 구는 데릭을 공작이 불렀다.

그리고 고요히 통고했다.

“넌 이번 사건에서 물러나 있거라.”

“……예?”

데릭이 답지 않게 더듬더듬 되물었다.

“아버지, 잘못 들었습니만…….”

“알아서 할 테니, 너는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한 게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공작은 선명한 목소리로 소공작에게 명했다.

이번 사건에 관여하지 말 것을.

그를 알아들은 데릭이 아득, 어금니를 사리물었다.

“……이본을 데리고 왔다는 이유로, 제가 용의자가 된 겁니까?”

“그런 게 아니다.”

“그런 게 아니면 이유가 뭡니까.”

그는 조금도 납득 가지 않은 얼굴로 재차 따져 물었다.

“술병과 잔을 확인하는 것은 물론, 오늘 초대받은 이들을 모두 은밀히 뒷조사해야 합니다. 레널드나 집사가 그런 일을 모두 맡아서 하기에 무리라는 사실을 아시지 않습니까.”

“베르단디 후작 쪽에서 손을 보탠다더구나.”

공작의 대꾸에 데릭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는 다른 가문의 수장입니다. 그런데 뭘 믿고 가문의 내밀한 중대사를 그에게 맡깁니까.”

“…….”

“게다가 따지고 보면 그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아무도 그 자리에서 페넬로페가 독을 먹었다는 사실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오로지 후작만이…….”

“베르단디 후작이 아니었으면!”

쾅-!

침묵한 채 아들의 말을 듣고 있던 공작이 불현듯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후작의 응급 처치가 아니었으면, 지금쯤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었겠지!”

“…….”

“애가 왜 피를 토하는지, 무슨 이유로 쓰러진 건지! 독을 먹은 게 맞는지 네놈처럼 의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진노하던 공작은 차마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바로 독을 의심하지 못한 것은 자신 또한 마찬가지였다.

의심은커녕, 그는 쓰러지는 딸을 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저 얼어붙은 채 서 있는 것 빼곤 아무것도.

싫다는 아이에게 최고로 해 주겠다며 제 욕심으로 밀어붙였던 성인식은 결국, 최악으로 끝이 났다.

공작은 책상을 거세게 내려친 주먹으로 충혈된 눈가를 거칠게 쓸어내렸다.

손에 가려진 얼굴에 깊은 피로감이 내려앉아 있었다.

“……단숨에 끊어지는 극독은 아니지만, 제때 해독제를 먹지 않으면 출혈이 멈추지 않아 죽음에 이르는 희귀한 독이라더구나.”

“…….”

“결국 베르단디 후작이 죽어 가던 페넬로페를 살린 게야.”

“……죽어요?”

그때였다.

들려오는 떨리는 음성에, 공작이 눈을 짓누르던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데릭이 생소한 표정을 지으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초점 없이 아무렇게나 흔들리는 푸른 동공, 창백해진 얼굴.

처음 보는 아들의 모습이었다.

“그럴 리…… 없잖습니까.”

“데릭, 얘야.”

공작이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바라보다 그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부름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그때까지 뒤로 맞잡고 있던 손을 앞으로 펼쳐 들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내려 땀이 흥건한 제 양손을 바라보았다.

“그 애가 죽을 리…….”

그 순간, 잊고 있었던 무언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간밤에 꾸었던 꿈의 한 장면이었다.

제 품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죽어 가던 이본.

“……데릭?”

이상했다. 꿈이 뒤바뀌었다.

누가 머릿속을 주무른 것처럼 기억이 뒤죽박죽이었다.

하지만 그런 불길하고 재수 없는 꿈이 아니더라도…….

‘독을 먹더라도 이본이 먹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페넬로페라면 직접 독을 준비하면 준비했지, 독을 먹고 쓰러져 죽을 계집은 절대 아니지 않은가.

손도 모자라 등 뒤가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데릭은 다시 고개를 내저으며 두서 없이 지껄였다.

“……그 애가 죽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 애는, 그러니까, 직접 독을…….”

“데릭, 너…….”

공작이 그런 데릭을 놀란 눈으로 응시하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권했다.

“……네 방으로 가서 좀 쉬는 게 좋겠구나.”

“하지만, 심문을.”

“이건 명령이야.”

데릭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알겠습니다.”

그는 한참 후 짧은 대답을 끝으로 공작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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