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4화
“소공작님.”
집무실을 나오자 데릭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하녀장이었다.
“뭐지?”
“저…… 이본 아가씨를 찾아 주시면 안 될까요?”
그녀는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소리 죽여 말했다.
“연금된 후로 계속 불안에 떨며 울고만 계셔요.”
그 말에 데릭이 멈칫했다.
괜찮다던 그녀를 부득불 성인식장에 끌고 간 것은 저였다.
그런데 반나절 만에 범죄자 취급을 당하며 방에 갇혔으니 얼마나 두렵고, 억울한 심정일까.
오라비인 저라도 신경 써야 했다.
그리 판단한 그는 이본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머리와는 달리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상했다.
문득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조금 전 공작과의 대화 때 느꼈던 초조함과 불안함이 온몸을 타고 저릿저릿하게 퍼져 나갔다.
“……나중에.”
데릭은 꽉 막힌 목소리로 힘겹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하오나, 밥도 드시질 않고 계속 소공작님만 찾으시는데…….”
“나중에, 나중에 가겠다.”
그는 간절하게 매달리는 하녀장을 피해 도망치듯 걸음을 옮겼다.
그는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건가.’
페넬로페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부터, 그는 죄라도 지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제가 한 짓이라곤 숨죽인 채 울고 있던 이본을 데리고 간 것뿐인데.
- 오라버…… 아, 아니 소공작님. 혹시…… 시간 되세요?
이른 아침, 이본이 찾아와 함께 다과를 들길 요청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웃음 지었지만 침울한 기색이 한가득이었다.
그럴 만했다. 페넬로페의 성인식 준비로 인해 그녀를 신경 쓰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성인식 내내 방 안에 숨어 있었는데, 오죽하면 어려워하던 저를 찾아왔을까.
낯간지럽게 위로 같은 건 할 줄 몰랐다.
- 저, 저는 괜찮아요. 성인식은 이미 치렀는걸요.
그저 괜찮냐는 한 마디에, 그녀는 곧 사라질 안개처럼 아스라이 웃으며 말했다.
- 성인식보다는…… 이번 축제를 같이 보내지 못해 아쉬워요. 승전 기념으로 이번 축제의 불꽃놀이가 다른 때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예, 예뻤…… 잖아요.
- 조, 조금만 더 일찍 기억을 되찾았더라면, 이번에야말로 오라버니들과 함께 볼 수 있었을 텐데…….
제 눈치를 보며 덧붙여진, 아쉬움이 가득한 떨리는 음성.
그것은 데릭이 그간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을 생생하게 되살리기 충분했다.
십여 년 전, 이본을 잃어버렸던 그 날.
위험하다며 축제 밤거리에 가는 것을 금한 공작 몰래 세 남매는 개구멍을 기어 나갔다.
어린 여동생이 불꽃놀이를 가까이서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처음 가 본 축제의 밤거리는 무척이나 재밌었다.
싸구려 장식품을 사고, 길거리 음식을 먹고, 들려오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출 즈음.
퍼레이드 행렬이 그들을 덮쳤다.
- 오빠!
- 이본-!
동생은 눈 깜짝할 새 사람 떼에 쓸려갔다.
눈물이 가득 담긴 채 점점 제게서 멀어지던 푸른 눈동자. 제게로 뻗어지던 그 작은 손을, 그는 끝내 잡지 못했다.
순식간에 되살아난 그 기억에 데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오라버니?’ 하는 작은 기척에 다시 눈을 뜨자, 걱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말간 얼굴이 보였다.
그 순간, 데릭은 확신했다. 노예 놈이 데리고 온 평민은, 잃어버린 제 동생이 확실하다는 것을.
- 죄, 죄송해요, 소공작님. 제가 괜한 말을 해서 심려를 끼친 것 같아요. 그냥 갑자기, 그때 기억이 나서…….
- 그래도…… 정말로 보고 싶었어요. 기억을 잃었을 때도, 항상.
일그러진 제 얼굴을 보고 이본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일을 겪고도 여동생은 자신을 놓친 그를 원망하기는커녕 되레 걱정하고 위로했다.
제 집을 찾아 돌아왔음에도 기가 잔뜩 죽어 ‘오라버니’란 말조차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2층을 차지한 그 애와는 다르게.
그래서였다. 성인식 직전, 이본을 찾아 숨죽여 울고 있던 그녀를 데리고 나온 것은.
그 누구보다 화려한 성인식을 앞둔 페넬로페와는 달리, 평민들 사이에 섞여 살아 성인식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을 이본이 안타까웠다.
전날에 꿨던 불길한 꿈 내용도 한몫했다.
‘제아무리 망종 같더라도, 모두의 앞에선 함부로 굴지 않을 테지.’
- 너도 같이 가자.
- 네? 하, 하지만 공녀님이…….
- 너 또한 공녀이지. 직계 가족들이 모두 참석하는 자리인데 친딸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더 우스운 일 아니냐.
그 말에 기뻐하며 울먹이는 이본을 후원으로 데리고 가는 도중, 문득 궁금증이 들었다.
제가 데리고 온 이본을 보고 그 애는 어떤 반응을 할지.
화를 내며 악을 지를까. 아니면 평소처럼 입을 다물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을까.
아니면…… 아니면, 제가 모두 잘못했다고, 자신을 버리지 말라고.
제게서 손수건을 받았을 때처럼, 그 사랑스럽게 웃는 얼굴로 제게 애원을 할지…….
데릭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놀라 퍼뜩 걸음을 멈췄다.
“여긴…….”
어느새 이곳까지 올라온 건가.
주위를 둘러보니, 자신은 중앙 계단의 마지막 층계 위에 서 있었다.
저 멀리 복도에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집사와 하녀 하나가 보였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이내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소공작님.”
인기척에 고개를 든 집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에…… 있나?”
데릭이 물었다. 잠시 모호한 물음의 주체를 가늠하던 집사가 이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주치의가 진찰을 보고 계십니다.”
“잠깐 상태를 확인했으면 하는데.”
“아, 그게…….”
방에 들어가겠다는 말에 집사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난감한 표정에 의아함을 느낄 적, 문득 안쪽에서 낯선 음성이 들려왔다.
“어떤가, 상태는.”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였다.
일순 놀란 데릭이 살짝 열려 있던 방문을 활짝 열어젖히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을 무렵.
“소공작님, 황태자 전하십니다.”
집사가 서둘러 그를 막아서며 낮게 읊조렸다.
그 말에 데릭은 문고리를 쥔 채 굳었다.
문틈 새로 자욱이 내려앉은 뿌연 연기와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이 비쳤다.
침대를 가운데에 둔 채 주치의와 황태자가 서 있었다.
“고비는 넘겼습니다만, 아직 피가 완전히 멎지 않았습니다. 의식을 언제 차리실지는…….”
의원이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닦아 낸 건지 그의 손에 붉은 물이 흥건한 천 뭉치가 들려 있었다.
다리의 힘이라도 풀린 사람처럼, 황태자가 비틀거리며 침대 옆에 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놈은 이불 밖으로 삐죽 삐져나온 손을 잡아 입가에 가져다 대고 고개를 숙였다.
방 안에 죽음 같은 음울한 침묵이 찾아왔다.
“……내가, 매번 못돼먹었다고 놀려서 그래? 그래서 이번엔 엿 좀 먹어 보라고 이러는 건가?”
한참 후, 황태자가 무어라 중얼거리는 게 들렸다.
데릭은 숨을 멈춘 채 잘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잘 알고 있어. 그대가 소문처럼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
“그런데 그 말을 할 때마다, 내게 눈을 흘기는 그대가 너무 예뻐서.”
“…….”
“그래서 나도 모르게 자꾸 그런 거야. 진심이 아니었어.”
두서없이 뇌까리던 황태자가 페넬로페의 손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그대는 피도 눈물도 없는 악녀라는 소문을 꺼렸지. 피도 눈물도 없기는커녕, 잔인한 것은 아주 질색을 하는 사람인데…….”
“…….”
“그런데 피가 아직도 흘러나와. 그대는 이런 걸 싫어하는데……. 그렇지?”
시체처럼 창백한 손에는 온기 하나 없어 보였다.
황태자는 그 손에 제 입술과 뺨을 마구 비비며 제 체온을 전했다.
“이 지옥에서 꺼내 달라며…… 그러니 제발 눈떠.”
“…….”
“죽지 마, 페넬로페.”
“…….”
“이 지옥에 나만 두고…….”
그 속삭임을 듣는 순간.
쿠구웅-.
데릭의 귓가에 거대한 굉음과 함께 무언가 부서져 내렸다.
‘이런 것을…….’
이런 것을 원한 건 아니었다.
그저, 궁금했다. 과연 이본을 데리고 가면 어떤 반응을 할지.
하지만 이런 것을 원한 건 아니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 데릭의 얼굴은 거멓게 일그러졌다.
* * *
“그 하녀의 방에서 나온 겁니다.”
달칵.
탁자 위에 투명한 액체가 들어 있는 작은 유리병이 올려졌다.
“상단 거리를 뒤져 가며 확인해 본 결과, 페넬로페가 먹은 독의 해독제였어요.”
증거품을 꺼내 놓기 위해 몸을 일으켰던 레널드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착석했다.
현재 응접실에는 무거운 얼굴의 다섯 남자가 앉아 있었다.
공작, 데릭, 레널드, 뷘터, 칼리스토.
이번 사건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모인 자리였다.
데릭은 공작의 명대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선 빠졌지만, 소공작으로서의 상황 수습을 위해 자리했다.
“……하녀는 뭐라더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먼저 깬 것은 공작이었다.
레널드가 잠시 뜸을 들이다 답했다.
“페넬로페가 이본에게 먹이기 위해 구해 오라고 시켰답니다.”
“그럼 공녀가 남 먹이려고 구한 독을 등신처럼 제가 처먹었다는 건가?”
황태자가 날카롭게 맞받아쳤다. 신경질적인 음성에 레널드가 오만상을 찌푸렸다.
“……사실이라면, 잔이 비슷해서 착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후작이 입을 열었다.
공작은 그의 말에 놀라 눈을 치켜뜨고 그를 돌아보았다.
“후작, 말조심하게.”
“하녀의 주장대로라면 말입니다.”
뷘터가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레널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레널드가 퍽 심기 불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새 잔을 일부러 비슷한 것으로 준비하고, 그 안에 독을 바르라 시킨 것도 페넬로페랍니다.”
“하지만 페넬로페 영애는 범인이 아닙니다.”
방금 전에 한 발언이 무색하게 뷘터는 바로 말을 바꾸었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데릭이 고개를 쳐들고 반응했다.
“그걸 어떻게 확신하는 겁니까.”
“페넬로페 영애는…….”
베르단디 후작은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말을 멈추었다가, 이내 한숨처럼 쏟아내었다.
“……세리주를 마시기 전 이미 독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