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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5화 (17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5화

응접실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얼어붙었다.

“……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황태자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들으신 그대로입니다.”

뷘터는 짧게 대답했다. 경악으로 홉뜨여진 세 쌍의 푸른 눈이 하릴없이 흔들렸다.

제가 들은 게 믿기지 않는다는 양, 공작이 더듬더듬 물었다.

“독인 줄…… 독인 줄 알고 마셨다니. 그 무슨…….”

“후작님께서, 그걸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데릭이 공작의 말을 받아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건…….”

“빨리 말해 보게, 후작! 독인 줄, 독인 줄 알고 마셨다니!”

“……영애께서 걸고 있었던 목걸이.”

숨넘어갈 듯 재촉하는 공작의 큰소리에, 뷘터는 망설이다가 진실을 토했다.

“영애께서 술을 들이켜기 전, 목걸이 정중앙에 있는 구슬 색이 변했습니다.”

“그게 무슨…….”

“그 목걸이는 독성에 반응하는 마법이 걸려 있는 아티팩트입니다. 근처에 독성 물질이 있을 시, 구슬의 색이 변하는데, 페넬로페 영애가 잔을 들었을 때 노란색으로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앞서 페넬로페에게 목걸이에 관해 대강의 설명을 들었던 공작과 황태자의 얼굴이 동시에 흙빛으로 물들었다.

황태자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그럼 공녀가…… 그걸 뻔히 보고도 마셨다, 이 말인가?”

“영애께서 목걸이의 색이 변하는 것을 보셨는지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아마, 보셨을 겁니다.”

“어떻게.”

“멀리 있는 제 쪽에서도 보일 만큼 뚜렷한 원색이었으니까요.”

“하…….”

황태자가 헛바람을 터뜨리며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공작 또한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연신 메마른 얼굴을 문질렀고, 레널드는 혼이 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오로지 데릭만이 처음처럼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무심결에 그를 바라본 뷘터는 찰나, 의아함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황태자가 입을 열었다. 고개를 돌리자, 자신을 향해 형형히 빛나고 있는 시뻘건 눈동자가 보였다.

“그대는 그 아티팩트에 대해 어떻게 그토록 상세히 알고 있지? 제국에서 통용되는 종류도 아닌 듯하던데.”

그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후작의 군청색 눈이 얕게 흔들렸다. 그러나 착각이라 여길 수도 있을 만큼, 매우 찰나의 순간이었다.

“제국에서는 희귀한 물건인지라…….”

뷘터는 변함없는 얼굴로 황태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답했다.

“저 또한 그 아티팩트를 보유한 적이 있습니다. 그것이 통용되는 나라에서는 악령을 두려워하여 여러 물건들을 몸에 걸치는 풍습이 있지요.”

“그대는 참, 별걸 다 가지고 있군. 해독제부터 시작해서 먼 타국의 희귀한 물건까지.”

“……그건.”

“공녀가 소유한 것과 같다니, 참으로 공교로운데.”

묘한 눈으로 후작을 바라보던 황태자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악령은 잘 막아 내었나?”

“물론입니다.”

사람 좋은 얼굴로 답한 뷘터는 공작 쪽으로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따라서 페넬로페 영애가 이본 영애를 해치기 위해 독을 구해 오라 명했다는 하녀의 증언은 실상황과는 맞지 않습니다.”

“……반대의 경우는요.”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또 다른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그 평민이 베킨지 뭔지를 시켜서 계획한 걸 수도 있잖습니까.”

“레널드.”

공작이 놀란 눈으로 둘째 아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채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소공작이 득달같이 경고했다.

“여기가 어느 안전이라고 함부로 입을 놀리는 거냐. 말조심해라.”

“기억을 되찾았다고 아직 확실하게 판명 난 것도 아닌데, 거슬리는 입양아 따위 죽여 버리고 싶을지 알 게 뭐야.”

“이본은……!”

잔뜩 충혈된 눈으로 잘도 얄밉게 빈정거리는 동생의 모습에 데릭의 이마에 굵은 핏줄이 솟아올랐다.

“……이본은 본래 페넬로페의 성인식에 참석하지 못할 예정이었다.”

한순간의 실수로 10년간 잃어버렸던 여동생에게, 그들은 죄악이었다.

간신히 되돌아온 그녀에게 사죄와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어떻게 그런 잔인한 의심까지 지우는가.

넌 그 애에게 미안하지도 않냐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데릭은 그것을 힘겹게 참았다.

“내가 아니었다면 후원에 발도 들이지 못했을 애가, 어떻게 성인식에 갈 줄 알고 독살을 계획하지?”

“그건 공녀 또한 마찬가지 아닌가?”

하지만 되돌아온 대답은 레널드가 아닌, 황태자 쪽이었다.

“소공작, 그대가 갑작스럽게 친동생을 데리고 올 줄 공녀가 예언이라도 했나 보지?”

“…….”

조롱이 잔뜩 담긴 비웃음에 마침내 데릭의 입술이 닫혔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럼 두 가지 가정으로 나뉘는군요.”

얼마 후, 뷘터가 조심스럽게 상황을 정리했다.

“누군가 페넬로페 영애 또는 이본 영애를 노리고 그 하녀를 사주했거나, 아니면…….”

차마 내뱉지 못하고 흐려지던 말을 공작이 받았다.

“……페넬로페가 자작극을 벌인 것이겠군.”

그녀가 잔을 들이켜기 직전, 일부러 잔을 바꾸었다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이로써 공작의 친딸은 자연스럽게 용의자에서 제외되었다.

톡톡톡- 팔걸이를 손톱으로 빠르게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황태자가 불쑥 물었다.

“……공녀가 그런 자작극을 벌일 이유가 뭐가 있지?”

“이유야 충분합니다.”

언제나 그녀가 벌인 사고의 뒷수습을 맡아 해 왔던 데릭이 묵묵히 답했다.

“말씀드리기 부끄러우나, 페넬로페는 종종 이런 식으로 관심받는 것을 자처하곤 했지요.”

“그대들도 소공작의 말에 동의하나?”

칼리스토의 물음에 공작과 레널드는 숙연하게 눈을 내리깔 뿐 다른 답을 하지 못했다.

데릭의 말은 더도, 덜도 아닌 사실이었다.

페넬로페는 종종 파괴적인 방법으로 시선을 집중시키곤 했다.

최근 철이 좀 든 듯하나, 자작극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는 상황이었다.

황태자는 그 무렵에 전쟁터에 나가 있었고, 공작가에서는 저택 내부의 소문이 퍼지는 것을 기를 쓰고 막아 왔으니 후작 또한 이해하지 못할 만했다.

하지만 여식의 허물은 곧 아비의 허물인 법.

“……페넬로페가 그렇게까지 했을 거라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공작은 무거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레널드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말이 맞습니다. 걔가 그렇게까지 할 일이 뭐가 있어요. 매번 주는 돈 받아서 놀고먹기 바쁜 앤데.”

“페넬로페는, 이본이 돌아온 것을 싫어했습니다.”

오로지 데릭만이 다른 소리를 했다.

이번 사건의 결말이 페넬로페의 자작극이라 굳게 믿는 사람처럼.

“사용인들이 말하길,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이본이 매번 울며 돌아왔다더군요.”

“……하?”

레널드가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어떤 눈 삔 놈이 그래? 걔는 별말 하지도 않았는데 그 평민이 그냥 쳐 운 거라고!”

“그 애의 언행은 따지고 보면 사교계에 발도 들일 수 없는 것들뿐이지.”

아름다운 외양과는 달리 양동생의 혀는 칼과 같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 칼에 여러 번 난도질당했던 레널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이내 제 형을 쏘아보았다.

“그래서, 평민한테 쏠린 관심을 제게로 돌리려고 걔가 독까지 처먹으면서 자작극을 벌였을 거라고?”

“비약하지 마라. 자작극을 벌였다면 이런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일 뿐이니까.”

“둘 다 그만하지 못해!”

공작이 벌컥 화를 내며 둘을 저지했다.

“페넬로페가 자작극을 벌인 일이라는 게 확실한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억측할 것 없다! 좀 더 조사를 해 보는…….”

“자작극, 자작극 말은 참 쉽게도 하는군.”

가족 간의 싸움에 불쑥 타인이 끼어들었다.

공작이 퍽 불쾌한 표정의 황태자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공녀가 정말로 자작극을 벌였다면, 일생에 딱 한 번, 모두에게 주목받는 날을 노리고 계획했다는 소리가 아닌가.”

“…….”

“뭔가 이상하지 않나? 직접 독을 마신 이유가, 고작 그대들의 관심을 받고 싶어서라는 게?”

공작과 두 아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태자가 말한 ‘고작’에 담긴 의미가 그들의 관심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냐는 뜻인지.

아니면, 그 관심 하나를 못 얻어서 그런 짓까지 벌였냐는 뜻을 내포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공작이 무어라 대답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 그러나 황태자가 앞섰다.

“게다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말이야……. 소공작은 꼭, 이 소동의 원인을 공녀의 탓으로 돌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것 같군.”

황태자의 시뻘건 시선이 공작에게서 데릭으로 옮겨졌다.

“공녀와 관련된 일은 매번 그렇게 얼렁뚱땅 해결해 온 건가? 정확한 원인을 찾아낼 생각은 않고, 모든 것을 공녀의 탓으로 뭉뚱그린 후에 빠르게 마무리 짓는 것. 그게 에카르트의 해결 방식인가?”

“…….”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대단하신 공작가라더니, 별거 없군. 이거 참…….”

“…….”

“실망스러운걸.”

혼잣말처럼 되뇐 황태자의 중얼거림에 공작과 데릭의 얼굴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수치로 붉어진 낯빛으로 진노를 꾹꾹 참아 내며, 공작이 대꾸했다.

“전하. 송구합니다만, 그것은 가문 내부의 일입니다. 제 여식을 걱정해 주시는 마음은 감습하오나 황궁과는 관련이 없는 일임을…….”

“공녀와 약혼을 기약했다.”

가문의 일이니, 네놈과는 관련 없는 일이란 말을 끊고 황태자가 거칠게 뇌까렸다.

공작 일가의 얼굴이 하나같이 멍해졌다.

“그, 그게 무슨…….”

“지금 뭐라…… 하셨습니까?”

“성인식 이후, 예비 황태자비의 가문에 정식으로 청혼서를 넣으려 준비하던 중이었지.”

“…….”

“그러니 공녀가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더는 집안일이 아니게 될 거야, 공작.”

칼리스토는 응접실 내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며, 이를 드러내고 천천히 웃었다.

하지만 호선을 그리는 입과는 달리, 시뻘건 눈 안은 알 수 없는 것들이 들끓었다.

사납고, 잔인한 얼굴로 웃는 황태자로 인해, 장내는 찬물이라도 쏟아부은 듯 얼어붙었다.

살벌해진 분위기에 침묵을 고수하던 뷘터가 가까스로 소리를 내었다.

“저도, 자작극은 아닐 거라 판단…….”

똑똑-.

그때였다. 누군가 닫혀 있던 문을 두드렸다.

“공작님, 펜넬입니다.”

집사의 다급한 알림에 ‘쨍-’ 하고 얼음이 깨졌다.

“……들어오게.”

공작이 더듬더듬 허락했다. 곧바로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급히 전달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를 구한 집사는 창백해진 얼굴로 빠르게 급보를 알렸다.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던 베키라는 하녀가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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