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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6화 (17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6화

“뭐…… 뭐라?”

공작을 포함한 모든 남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하녀가 죽어……?”

집사가 어두운 얼굴로 통고했다.

“예, 혀를 물고 자진했습니다.”

“자, 자진……? 레널드.”

공작은 심문을 맡았던 둘째 아들을 돌아보았다.

“그, 그럴 리 없습니다! 분명 고문까지 갈 필요도 없을 정도로 순순히 진술했는데 어째서…….”

레널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얼굴로 변명처럼 중얼거렸다.

페넬로페가 시킨 대로 했을 뿐이라며 주장하던 하녀는, 제가 끌려온 상황 자체만으로도 바들바들 떨었다.

그 얼굴에는 거짓 한 점 없었다.

그러나 자진은 임무를 실패한 암살자들이나 하는 관례였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심각해졌다.

응접실 안에 기괴한 침묵이 감돌았다.

“……우선, 죽은 하녀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해라.”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황태자가 묵직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독은 어디서 구했는지, 공작저에서 평소 무슨 일을 도맡아 했는지, 성인식 전에는 뭘 하고 있었는지, 그간 공녀와 접점은 얼마나 있었는지.”

“…….”

“정말로 공녀가 시킨 게 맞는지, 내가 전장에서 쓰던 방법으로 알아 보고 싶었는데 뒈져 버려서 아쉽군 그래.”

농담처럼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칼리스토의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누군가 공녀를 타살하려고 했다는 것에 중점을 둔 것 같은 그를 보며, 공작이 조심스럽게 아뢰었다.

“그 애는…… 이본의 하녀입니다.”

“그럼 그 계집도 조사 대상에 포함시키는 게 좋겠군.”

“전하!”

“아직 친딸로 확정 지은 단계는 아니라며?”

“그, 그건…….”

공작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건 사실이었으나, 모든 일에는 법도라는 것이 있었다.

가문 내부의 예민한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무르는 황태자의 모습에 공작의 얼굴이 굴욕으로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태자는 좋을 대로 결론을 지었다.

“잘됐군. 이참에 그 평민에 대해서 낱낱이 확인해 보도록 해, 공작.”

“페넬로페가 독인 것을 알고도 마셨다는 후작의 진술이 있음에도 말입니까?”

그때, 누군가 딱딱하게 반문했다.

칼리스토가 휙 고개를 돌렸다. 공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소공작이었다.

“아, 그렇지.”

황태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데릭에게서 휙 시선을 돌려 다른 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베르단디 후작. 자네는 왜 공녀가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지?”

집사가 들어오기 전 그가 내뱉으려던 말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던 황태자가 물었다.

“그건…….”

뷘터는 바로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죽은 하녀를 통한 자작극은 확실히 아니었다.

그녀는 전담 하녀를 통해 제 상단에 독약을 의뢰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술잔을 들이켜기 전, 그녀는 자신과 눈이 마주쳤다.

분명 목걸이의 색이 원색으로 변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는, 제가 준 독과 다른 것임을 모르고 마신 걸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그는 그녀의 의중을 조금도 파악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에서 제가 아는 모든 것들을 털어놓는 것이 그녀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도 알 수 없었기에.

“……후작?”

대답 없는 그가 이상한지 황태자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불렀다.

뷘터는 묘한 황태자의 시선에 입 안쪽 살을 아득 깨물다 마침내 입을 열었다.

“……공녀님께선 전담 하녀가 이미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럴싸한 핑계가 흘러나왔다.

“전담 하녀를 놔두고 왜 다른 이를, 그것도 하필이면 이본 영애의 임시 하녀를 맡은 이에게 그런 은밀한 일을 시키겠습니까.”

“모처럼 생각이 일치했군. 내 말이 바로 그거야.”

황태자가 다시 새빨간 눈동자를 데릭에게로 스륵 옮겨졌다.

데릭이 또다시 반박했다.

“하지만 자작극이 아니라면 해독제는 왜 발견된 것이고, 페넬로페는 왜 독이 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술을 들이켰겠습니까.”

“그러니 조사를 해 보자고, 소공작.”

황태자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누가 공녀에게 독을 먹인 건지, 아니면 정말로 그대들의 관심을 받고자 공녀 스스로 독을 먹은 건지.”

“…….”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계획한 자작극을 눈치챈 공녀가 그를 저지하려 그런 건지.”

“그, 그게……!”

“같이 한번 알아보자 이 말이야. 응?”

그의 말에 세 쌍의 푸른 눈이 천천히 커졌다.

그쪽으로는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지 그 눈빛들에서 짙은 의구심이 읽혔다.

칼리스토가 아는 페넬로페는 충분히 그런 선택을 할 만큼 영민한 여자였다.

그간 공작가 일가가 그녀를 얼마나 멍청하고 어리숙한 애송이로 여겨 왔는지 알 만했다.

“낱낱이 조사해, 공작.”

칼리스토는 세 사람을 번갈아 보며 이를 악물었다.

“내가, 일개 목격자가 아니라 황족으로서 직접 개입하기 전에.”

* * *

칼리스토는 공작저의 응접실을 빠져나와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공녀의 독살 사건의 정황을 알아보고자 회담에 참여했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사이 의식이 없는 여자에게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발걸음이 절로 분주해졌다.

거의 뛰어가다시피 복도를 지나, 중앙 계단을 막 오르려던 찰나.

“전하.”

중앙 홀에 앉아 있던 누군가가 달려오는 그를 보고 벌떡 일어났다.

멈칫한 칼리스토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뭐야.”

다른 때 같았으면 ‘여어, 세드릭 포터.’ 하고 능글맞게 맞이했을 황태자가 소름 끼칠 만큼 무표정한 얼굴로 제 보좌관을 응시했다.

며칠 만에 보는 상관의 얼굴은 무척이나 까칠해져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세드릭은 마른침을 삼키며 용건을 말했다.

“페하께서, 전하를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왜.”

“크로니아 반란군들이 북쪽 변경을 점령했습니다.”

“하…….”

헛웃음을 터뜨린 황태자는 이내 층계로 거칠게 몸을 돌렸다.

“바빠서 못 가니까 다른 놈들 보내라 해.”

“부, 북쪽에 진을 치고 다른 패전국들의 잔당과 결탁하여 점점 세를 불리고 있답니다!”

세드릭이 서둘러 외쳤다. 그렇게 외치는 그의 얼굴 또한 착잡함으로 뒤덮여 있었다.

“엊그제 케르트 후작령이 점령당했습니다. 당장 가서 진압하라는 명이십니다.”

케르트 후작령은 북쪽 변경 중에서도 장벽이 견고하고 사병들의 훈련이 잘되어 있는 편에 속했다.

그곳이 뚫렸다면 이미 반란군들의 머릿수가 꽤 모였다는 소리일 터.

“씨발…….”

계단 난간을 콰득 움켜쥐었던 황태자가 다시금 보좌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뚜벅뚜벅 계단을 걸어 내려오는 그의 안광이 시뻘겋게 빛이 났다.

“이 나라에는 나 말고 장수가 한 명도 없나? 속국으로 만들어서 코앞까지 떠먹여 줬으면 됐지, 싸지른 똥까지 일일이 치워 줘야 해?”

“…….”

“근 10년을 전쟁터에서 개처럼 굴렀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가 언제 죽어 나갈지 모르는 상황에 빌어먹을 전쟁 놀음이나 해야겠냐고, 내가!”

“폐하께서……!”

‘한 대 맞는다!’

휙 쳐 올라간 커다란 손에 눈을 질끈 감은 세드릭이 벌컥 소리쳤다.

“폐하께서 이번 임무를 마치시면 공녀님과의 약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해 보겠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눈을 뜬 그는 간절한 음성으로 황태자를 설득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전하……. 폐하의 입김이 없으면 약혼은 성사될 수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그가 아무리 청혼서를 넣어도 공작이 거절하면 소용없었다.

물론 그 이전에 공녀가 싫다 하면 무용지물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으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그에게는 들어줄 수 있는 권력과 재력이 있었다.

물론 약혼이 성사된다는 전제하에.

“제기랄!”

세드릭을 줘 패기 위해 높이 쳐들렸던 그의 주먹이 결국 길을 잃고 계단 난간에 휘둘러졌다.

콰앙-! 난간 위, 나무로 조각된 둥그런 장식이 움푹 일그러졌다.

세드릭은 그것이 제 머리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며 달달 떨었다.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아무것도 모른 채로 쫓겨나듯 전쟁터에 내팽개쳐진 후, 그는 개처럼 구르며 아득바득 살아남았다.

승전보와 함께 수도로 돌아오면서, 다시는 황제의 손아귀에 놀아나지 않겠노라고 수천 번을 다짐했다.

지금 수락하면, 또다시 저를 옥절 목줄을 제 손으로 바치는 꼴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기다려.”

그는 격양된 숨을 천천히 내리 쉬며 짓씹듯이 말했다.

“하오나, 전하. 상황이 시급-.”

“제기랄, 작별 인사는 하고 와야 할 것 아니야!”

버럭 외친 칼리스토는 세드릭이 채 잡기도 전에 휙 몸을 돌려 계단을 올랐다.

그런 그의 뒤로 쏟아지는 피처럼 펄럭이는 붉은 망토를, 세드릭은 끝내 잡지 못했다.

2층으로 올라간 칼리스토는 곧장 공녀의 방문을 열었다.

이제 그의 존재에 제법 익숙해진 공녀의 전담 하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서둘러 몸을 피했다.

저벅, 저벅-.

방 안을 가로지르는 발길이 거침없었다.

얼마 안 가 커다란 구두 한 쌍이 침대 앞에 우뚝 멈춰 섰다.

침대 주변은 해독초가 타오르며 내뿜은 뿌연 연기로 자욱했다.

독한 약초 향기 사이로, 공녀는 여전히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창백한 안색, 독 기운을 내뿜으며 부르튼 입술, 빛을 잃고 푸석해진 진분홍빛 머리칼이 꼭, 시체 같았다.

그 언젠가, 공작저를 찾아온 저를 속인답시고 억지로 분장을 한 모습조차 이렇지 않았다.

생기 넘치는 얼굴과 입술 위로 펴 바른 허연 분과 눈두덩이에 시커먼 칠을 한 우스꽝스러운 모습.

‘참…… 깜찍했지.’

감히 자신과 만나기 싫다는 이유로 분장까지 했던 괘씸한 여자.

그러나 페넬로페 에카르트는 그 모습조차 예뻤다.

“……페넬로페 에카르트.”

황태자는 손을 뻗어 희멀건 거스러미가 진 여자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녀가 독을 먹고 쓰러진 지 벌써 삼 일째였다.

그는 삼 일 내내 피가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 뭔지 절감할 수 있었다.

단 몇 초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사이에 그녀가 죽을까 봐.

지금은 다행히 멎었지만, 눈을 꾹 감은 채 입새로 하염없이 피만 줄줄 흘리는 그녀를 볼 때마다 수십, 수천 번 생각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을까.

그 생각을 하다 보면 속에 천불이 일고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황태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드글드글 끓는 눈으로 공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네게 누가 독을 먹인 건지, 아니면 죽고 싶어서 네 손으로 직접 먹은 건지. 이제 그딴 건 상관없어.”

“…….”

“어차피 내가 시퍼렇게 눈뜨고 살아 있는 이상, 넌 못 죽어.”

“…….”

“기다려. 돌아와서 널 이렇게 만든 놈들을 다 조질 거니까. 죽지 않게 심장을 마법으로 얼리고, 네가 흘린 피만큼 사지를 하나하나 잘게 찢어 발겨서 그놈의 주둥이에…….”

시뻘건 눈을 희번덕거리며 점점 격양된 소리를 내뱉던 황태자가 문득 말을 멈췄다.

이렇게 잔인한 소리를 하면, 여자는 으레 오만상을 찌푸리며 질색을 하곤 했다.

‘하실 거면, 저 없는 곳으로 가서 하세요.’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제게 타박할 것 같았다.

하지만 온기 없는 차가운 몸뚱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야…….”

황태자는 그제야 서서히 몸을 허물어뜨렸다.

“이런 말 하려는 게 아니었어.”

침대 옆에 쓰러지듯 무릎 꿇은 그는 두 손으로 더듬더듬 페넬로페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해, 공녀. 인사를, 인사를 하러 왔어. 내가 지금 급히 가 봐야 하거든.”

“…….”

“금방 올게. 그러니 내가 돌아왔을 때, 뜬 눈으로 맞이해 줘. 그 말을 하고 싶었어. 그 말을…….”

횡설수설 얼버무리던 칼리스토가 문득 절박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찬찬히 상체를 숙였다. 연인에게 작별 키스를 하기 위해서였다.

거슬거슬한 입술이 닿았다. 그는 온기 없이 바싹 마른 그것에 제 입술을 마구 짓눌렀다.

제 숨결을 전해 주고 싶은 듯.

“……다 해 줄게.”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아무도 들으면 안 되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그녀만 들을 수 있도록.

“여기서 벗어나고 싶으면 벗어나게 해 줄게.”

“…….”

“사랑이든 뭐든 제기랄,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

“죽지만 마.”

그는 다시 한번 메마른 입술을 삼키며 처절하게 애원하고, 구걸했다.

“죽지만 마, 페넬로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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