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7화
푸른빛이 찌르듯이 눈앞에 넘실거렸다.
나는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가물가물한 시야로 눈에 익은 공간이 보였다.
‘여긴…….’
레일라 신도들의 근거지였던 솔레일 섬의 광활한 지하 공간이었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돌아보던 나는 눈을 찌르던 광원을 찾아내었다.
제단 위에 서 있는 흰색 로브. 아니, 이본이 들고 있는 고대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그 빛은 정확히 아래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서 약간 떠 있는 기이한 모습으로 웅크린 어린아이.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눈에 보이진 않지만, 푸른빛이 닿는 아래에 내가 있다는 것을.
뷘터가 걸어 준 마법으로 투명화가 된 채 라온을 구하는 중이었다.
널따란 공간 구석에 쓰러져 있는 뷘터와 거대한 도마뱀들을 피해 바닥을 뒹굴고 있는 칼리스토.
내가 지난날 겪었던 그 순간이 정지한 화면을 들여다보듯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제3자처럼 한 발짝 떨어진 채 관전했다.
그때였다. 문득 흰색 로브, 아니, 이본이 들고 있는 고대 유물에서 뿜어지던 푸른빛이 일렁였다.
그와 동시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거울 위로 무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면 안 된다는 뷘터의 말을 착실히 되새기며 필사적으로 눈을 감았던 그때의 나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그러고 보니, 투명화 마법이 걸려 있었는데도 이본은 나를 정확히 봤어.’
이렇게 떨어져서 객관적인 시선으로 보니, 그때의 장면이 새롭게 와닿았다.
나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채 이본이 들고 있는 고대 유물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푸른빛이 강해졌다.
이윽고 수면에 파동이 일 듯 뿌옇게 요동치던 거울 안에 무언가 비쳤다.
‘흐읍.’
거짓말처럼 선명해진 거울 속을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눈을 부릅뜨며 날카로운 숨을 들이마셨다.
그건 나였다.
라온을 구하고 있는 내 모습이 아니라, 페넬로페의 아름다운 외양이 아니라, 진짜 나.
나는 조악한 반지하 방구석에서 화면이 켜진 휴대폰을 꽉 쥔 채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게임에 빙의되기 직전의 내 모습.
‘내가, 내가 왜 저기…….’
나는 주춤주춤 이본이 서 있는 제단 쪽으로 다가갔다.
한 발짝, 한 발짝 느리게 움직이던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나는 한달음에 거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것을 쥐기 위해 손을 내뻗는 순간.
쿠르르릉-.
유물이 뿜어내는 푸른빛에 손가락 끝이 채 닿기도 전에 커다란 굉음과 함께 주변 광경이 무너져 내렸다.
‘무, 무슨……!’
순식간에 제단과 동굴 벽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시커먼 어둠이 채웠다.
당황하여 정신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을 때쯤, 허연빛이 머리맡에 쏟아졌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이본이 들고 있던, 고작 노트북만 했던 유물은 어느새 고풍스럽고 거대한 크기의 전신 거울이 되어 어둠 한 면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위로, 방금 전 엿보았던 자고 있는 현실의 나, 내 방이 그대로 비쳤다.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가락 틈새로 ‘GAME OVER’가 떠 있는 게임 화면이 엿보였다.
‘지금, 지금이면 돌아갈 수 있어!’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거울에 닿으면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나는 희망과 환희로 부푼 가슴을 안고 거대한 거울을 향해 있는 힘껏 뛰었다.
왠지 모르게 이대로 돌진하다 보면 거울 너머 내 방으로 뛰어들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거울 앞에 도달했을 무렵.
나는 바닥을 박차고 올라, 있는 힘껏 거울을 향해 뛰어들었다.
그 찰나에도 나는 그대로 거울을 통과할 수 있다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콰앙-!
“아악!”
나는 차갑고 딱딱한 거울 면에 세게 부딪혀 형편없이 나동그라졌다.
“아야야, 나 죽네…….”
부딪힌 어깨가 아릿하게 아파 왔다.
아니, 이상하게도 고작 부딪힌 것뿐인데 구타라도 당한 듯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뭐야. 왜…….”
나는 울상을 짓고 눈앞에 있는 거울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불현듯 거울 위로 흰 글씨들이 떠올랐다.
〈SYSTEM〉 Error. 히든 루트에 진입했으므로 엔딩까지 [GAME OVER] 불능
나는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헛웃음을 지으며 내뱉었다.
“……지랄 마.”
이 게임에서 게임 오버는 캐릭터의 죽음을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빙의한 페넬로페의 죽음 말이다.
그런데 이 미친 게임이 죽음을 택한 내게, 게임 오버가 안 된다고 지껄이고 있다.
“내가 죽어서라도 여기서 나가겠다는데 무슨 개소리야!”
나는 비칠비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전히 내 모습을 비추고 있는 거울 앞으로 달려가, 두 주먹을 불끈 쳐들었다.
“이 미친 게임 새끼야! 네가 멋대로 진입시켜 놓고 왜 나보고 지랄인데!”
쾅, 쾅-! 나는 거울을 마구 두드리며 외쳤다.
돌아가고 싶다.
밤새 게임 하다 기절하듯 잠든 내 한심한 모습을 보니, 더욱더 간절해졌다.
“보내 줘! 나 보내 달라고!”
〈SYSTEM〉 Error. 히든 루트에 진입했으므로 엔딩까지 GAME OVER 불능
쾅, 쾅, 쾅-!
그러나 아무리 두드리고 소리쳐도 거울에 비친 내 모습 위로 흰 글씨만 다시 한번 떠오를 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때, 마치 시간이 다 되었다는 듯 거울 속이 일렁거렸다.
그 안에 있던 내 진짜 모습도 점차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사라지는 내 모습에 나는 고개를 마구 내저으며 미친 듯이 거울을 두드렸다.
“나 그냥 죽을 테니까 그냥 현실로 보내 달라고-!”
거울 속 내 모습이 흐트러지며 사라질수록, 시스템 창 안의 글씨는 더더욱 선명해졌다.
〈SYSTEM〉 Error. 히든 루트에 진입했으므로 엔딩까지 GAME OVER 불능
악몽보다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 시스템 창의 모습에, 나는 진저리를 치며 그만 눈을 감았다.
“헉!”
그리고 곧바로 번쩍 눈이 뜨였다.
방금 전까지 있었던 검은 공간과 거대한 거울 대신,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허억, 허억…….”
오래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거친 숨이 입술을 타고 터져 나왔다.
상황 파악을 위해 몸을 좀 일으키고 싶은데, 이상하게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도르륵 눈을 굴려 주변을 확인했다.
익숙한 이 공간은 내 방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공작저 내의 페넬 로페의 방.
‘그럼 조금 전은 꿈……?’
거울을 통해 현실의 내 모습을 엿본 것이 이토록이나 생생한데, 거울이고 시스템 창이고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나는 한참 동안 천장을 노려보며 가파른 호흡을 골랐다.
씁쓸한 약 향기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내가 잠에서 깨어났음을 인정하려던 찰나.
불현듯 눈앞에 새하얀 네모 창이 떠올랐다.
〈SYSTEM〉 [5억 골드]를 지불하여 히든 루트에 진입했습니다!
“……X발.”
나도 모르게 나지막한 욕설이 튀어 나왔다.
악몽의 연장선인가. 정신을 차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뜨는 시스템 창에 저절로 치가 떨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SYSTEM〉 지금부터 게이지 색상 외 호감도 수치를 확인할 수 없으며, 퀘스트를 따르면 히든 엔딩과 보상이 주어집니다!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고대 마법 거울의 조각]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십시오!
“하, 하하…….”
나는 기가 막혀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돈을 주고도 아예 호감도를 보는 것은커녕, 퀘스트를 수락할지 말지 여부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절망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신이 붕괴될 단계는 이미 지났기에.
“……그 짓거릴 했는데, 진짜 안 죽었네.”
나는 안간힘을 써 움직이지 않는 팔을 들어, 양손을 코앞에 펼쳤다.
독의 여파인지, 뼈밖에 남지 않은 메마른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방금 전에 보았던 꿈인지, 시스템의 농간인지처럼, 나는 끝내 현실로 돌아가는 데 실패했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와도 엔딩을 보지 못해 하드 모드에 실패해서 그런 건지, 자동 지불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로 이 미친 게임 속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긴 한 건지…….
‘어쩌면 더 일찍 죽어 볼 생각을 하지 않은 게 문제였던 건가?’
어쨌든 하나 남은 방법마저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이 빌어먹을 곳에서 또다시 휘둘리는 것뿐이다.
나는 허공에서 바들바들 떨리는 두 손을 내려 건조한 눈 위를 덮었다.
분명 좀 전까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자 뜨거운 것이 단숨에 목 끝까지 차올랐다.
“X발, 이 개새끼야-!”
나는 모호한 상대를 향해 욕설을 내뱉으며 비명을 질렀다.
마비라도 된 듯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을 마구 뒤척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이 분노와 절망을 어떻게 내리눌러야 하는지 좀처럼 알 수가 없었다.
“아아아악-!”
내 거친 몸부림에 보드라운 이불도, 베개도 마구 침대 아래로 떨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타악, 떨그렁-!
문득 시끄러운 쇳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비명을 내지르던 것을 멈추고 눈을 가리던 두 손을 내렸다.
흐릿했던 눈에 초점이 잡히자, 내 전담 시녀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의 아래로 엎질러진 물과 함께 양철 대야가 나동그라져 있었다.
“아, 아가씨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경악에 가득 차 있던 에밀리가 이윽고 입을 크게 벌렸다.
“세, 세상에, 고, 공작님! 집사님! 아가씨가, 페넬로페 아가씨가 깨어나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