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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8화 (178/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8화

“페넬로페-!”

에밀리의 외침에 방 안에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공작과 집사, 그 뒤로 데릭과 레널드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그들은 눈을 뜬 채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나를 보고 하나같이 사색이 되었다.

“의원을, 의원을 불러오게! 어서!”

“네, 네!”

벌컥 외치는 공작의 호령에 집사가 허둥지둥 주치의를 부르러 나갔다.

침대 주변이 순식간에 사람들로 꽉 찼다.

공작은 손을 내게로 뻗었다.

“페넬로페, 얘야. 괜찮은 것이냐? 아비를 알아보겠어?”

독을 먹고 죽었다 살아난 것이 꽤나 충격을 주긴 했는지, 그의 손가락 끝이 조금 떨렸다.

공작은 끝내 나를 건들지 못하고 손을 거둔 채 거칠게 제 얼굴을 문질렀다.

“야, 너…… 괜찮아?”

공작의 뒤편에서 레널드가 말을 걸었다.

“씨발, 그건 대체 왜 마셔 가지고……!”

“레널드.”

붉어진 눈으로 큰 소리를 내는 그를 공작이 날카롭게 저지했다.

문득 왼뺨이 따가웠다.

스르륵 눈동자를 굴리니, 데릭이 시퍼렇게 안광을 빛내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뒤, 열린 방문 너머에 가면을 벗은 뷘터가 서성거리는 게 보였다.

죽다 살아난 것은 난데, 모두들 토끼처럼 시뻘건 눈을 하고 낯이 거무룩 죽어 있었다.

눈을 굴리며 이본이 있는지 확인하던 나는, 이내 그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안심하고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페, 페넬로페!”

누군가 절박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다시 뜨지 않았다.

피곤했다.

원치 않아도 부산스러움에 저절로 눈이 뜨였을 땐, 의원이 한창 진찰 중이었다.

“독 기운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맥박을 잡고 있던 늙은 주치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맥박이 희미했는데, 오늘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거 참…… 기적 같은 일이로군요.”

“그럼 이제 완치 단계에 이른 것인가?”

“상한 몸만 회복하시면 될 듯합니다.”

“신이시여.”

경과를 묻던 공작이 다리에 힘이 풀린 사람처럼 털썩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믿지도 않는 신을 찾는 그 얼굴이 몇십 년은 늙어 보였다.

나는 무미건조한 눈으로 그것을 바라보다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간 누워만 있던 탓에 몸을 움직이는 것이 힘든 것만 빼면, 놀랍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피를 그렇게 많이 쏟은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이토록 빠르게 회복된 원인이 깨어나기 직전 꿨던 빌어먹을 시스템 꿈과 연관되어 있다는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짜증 나.’

복잡한 상념을 떨치기 위해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런 거지?”

듣기 싫은 소리가 불쑥 나를 붙잡았다.

나는 감으려던 눈을 도로 떴다.

새파란 눈이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이 꼴이 되면 좋아할 줄 알았는데, 왜 저래?’

아까도 느꼈지만, 데릭의 눈동자에는 기이한 초조함이 감돌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놈이 곧바로 입을 열었다.

“깨어났으니 말해 봐라. 뭐가 필요해서 이런 짓까지 벌인…….”

“데릭, 입 다물어라.”

“하지만-.”

“형은 씨발, 이제 겨우 눈 뜬 애한테 그딴 말밖에 못 해?”

그때, 아무 말 없이 서 있던 레널드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1주일 만에 깨어났어! 그런데 괜찮냐고 묻지는 못할망정……!”

“레널드! 너도 그만해라.”

“말리지 마요, 아버지! 형 요즘 이상해진 거 알아? 얘 쓰러진 후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것처럼 굴잖아!”

“일어났으니 한시 빨리 상황을 해결하고 퍼져 나가는 헛소문들을 진압시켜야 할 것 아니냐.”

데릭의 대꾸에 레널드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었다.

방 안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새끼들이 정말!”

끼익-! 보다 못한 공작이 의자를 끌며 벌떡 일어났다.

그가 둘을 향해 무어라 거칠게 소리치려던 순간.

“다들.”

나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제가 회복이 필요한 환자라는 말을 못 들으셨나 봐요.”

세 사람의 입이 동시에 합, 다물렸다.

저들끼리 싸우든 말든 사실 내 알 바는 아니었지만, 시끄러운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쉬고 싶은데, 부디…….”

항상 하던 대로 무심결에 부탁 조로 말하던 나는 문득 놈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색상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호감도 확인하기]라는 글씨가 없었다.

이제 호감도는 사라진 것이다.

그러니 더는 놈들의 눈치를 살피며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나는 잠시 멈췄던 말을 바꿔 내뱉었다.

“……나가 주시겠어요? 피곤하거든요.”

내 말에 세 인간들의 낯빛이 달라졌다.

공작은 숙연해졌고, 레널드의 표정은 왈칵 일그러졌으며, 데릭은 턱이 불뚝 불거졌다.

나는 그것을 관조하는 심경으로 빤히 바라보며 무언의 축객령을 내렸다.

“……미안하구나. 생각이 짧았다.”

마침내 공작이 천천히 몸을 물렸다.

“우린 그만 갈 테니 아무 생각 말고 푹 쉬려무나, 페넬로페.”

다정하게 속삭인 그는, 이내 두 아들을 끌고 방을 나섰다.

나는 습관적으로 내뱉던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탁-. 등 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 *

“아가씨, 아- 하셔요.”

에밀리가 묽은 미음을 뜬 수저를 내 입 앞에 들이밀었다.

고분고분 몇 숟갈 받아먹던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툭 내뱉었다.

“맛없어.”

“그래도 드셔야 해요. 오랫동안 드시지 않으셔서, 당장 음식을 먹는 것은 힘들다고 의원님이 그러셨잖아요.”

그래도 아무런 간도 안 된 미음은 너무 하지 않은가.

내가 끝내 먹지 않자 에밀리는 별 수 없이 그릇을 치웠다.

깨어난 이후, 묘하게 사용인들의 태도가 변했다.

에밀리는 물론이고 공작과 두 아들, 집사, 평소 나를 괄시하던 각종 엑스트라들까지.

꼭 쉽게 깨지는 유리 인형처럼 극진히 나를 모셨다.

그게 좀 웃겨서, 종종 입술 끝을 비틀어 올렸다.

‘이제 와서.’

나는 그릇을 정리하고 있는 에밀리에게 불쑥 물었다.

“에밀리, 내가 얼마 동안 쓰러져 있었다고 했지?”

“1주일이요.”

“1주일.”

그 기간이면 여주가 온 집안사람들을 양껏 홀리고 다니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애는 그간 어떻게 지냈니?”

“그 애요? 아…….”

내가 묻는 것이 누군지 알아차린 에밀리가 내게 바짝 다가와 속삭였다.

“아가씨가 쓰러진 이후에 방에 연금당했어요.”

“연금?”

“네, 사건이 모두 해결될 때까진 한 발짝도 못 나가도록 공작님께서 명하셨대요. 쌤통이죠?”

그 말을 하며 에밀리가 음흉하게 웃었다.

나는 의외의 소식에 좀 얼떨떨해졌다.

나라는 방해꾼도 없으니 온 집안을 활개 치고 다닐 거라 예상했다.

애매하게 진행된 그때 상황도 그렇고, 유물 때문이라도 그녀가 범인으로 몰리긴 어려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봐.”

내 명령에 에밀리는 소상히 그간의 일을 고해바쳤다. 다행히 세뇌의 영향이 그녀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쓰러지고 난 후 상황을 냉정하게 습득해 나갔다.

하지만 베키라는 하녀가 하루아침에 자살한 대목에선 섬뜩함에 흠칫 몸을 떨었다.

“……그간 다들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몰라요, 아가씨. 저도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세요?”

보고를 끝마친 에밀리가 눈물을 글썽이며 푸념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러니? 네가 고생 많았구나.”

“고생은요! 저보단 사실, 황태자 전하께서 고생이 더 많으셨죠…….”

나는 생소한 단어를 들은 것처럼 멈칫, 에밀리를 돌아보았다.

“황태자…… 전하?”

“네! 아가씨께서 쓰러진 후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셨어요. 어찌나 무시무시한 얼굴로 역정을 내시는지, 다들 숨도 제대로 못 쉬었다니까요.”

“…….”

“그래도 전 알아요. 밤마다 전하께서 아가씨의 손을 붙들고 얼마나 간절하게 비셨는지요.”

“……빌어? 뭘?”

“자세힌 못 들었는데…… 원하는 걸 다 들어 줄 테니 제발 죽지만 말라고 하셨던 것 같아요.”

그 순간 꿈결인지, 환청인지, 무의식중에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 여기서 벗어나고 싶으면 벗어나게 해 줄게.

- 사랑이든 뭐든 제기랄,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나는 천천히 얼굴이 흐려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밝혔던 목적.

그렇게나 듣고 싶었던, 그리고 한편으론 듣기 싫었던 그 말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드 모드는 끝이 났고, 이곳에서 빠져나가는 것마저 실패했다.

“……게다가 전하께서 곧 아가씨께 청혼서를 넣을 거란 소리가 있어서, 다들 모일 때마다 사냥 대회 때 소문이 사실이었나 보다고…… 에구머니나!”

일그러진 내 표정을 미처 보지 못한 채 마구 재잘거리던 에밀리가 퍼뜩 제 입을 틀어막았다.

“제, 제가 실언을 했어요, 아가씨. 죄송해요.”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잘못을 빌었다. 나는 조용히 물었다.

“지금은…… 어디 계시니?”

“부, 북방에 무슨 반란이 일어났나 봐요. 그 때문에 황명을 받고 급히 가셨어요.”

“……그렇구나.”

나는 짧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내가 더 묻는 것이 없자, 방 안은 금세 고요해졌다.

“……아가씨.”

에밀리는 할 말이 퍽 많은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내 결심한 듯 비장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정말로…… 아가씨께서 제게 시키셨던 그것을 스스로 드신 것, 아니죠? 그쵸?”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저택에서, 아가씨가 자작극을 일으킨 게 아니냐는 소문이 파다해요.”

“……자작극?”

“네, 네. 아가씨께서 그 여자에게 쏠린 관심을 돌리려고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니냐고요.”

‘상황이 그렇게 돌아갔던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툭 내뱉었다.

“그것참 다행이구나.”

“다행은요!”

에밀리가 대경실색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자작극 정도야 귀엽지, 뭐.’

그 짓거리까지 했는데, 세뇌로 인해 내가 여주를 독살하려던 것으로 몰리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억울하단 말인가.

이런 내 생각을 알 리 없는 에밀리가 훌쩍이며 그간의 고충을 털어 놓았다.

“저는 아가씨께서…… 그걸, 그걸 그 여자한테 먹이려는 줄 알았어요.”

“쉿, 에밀리. 그런 악당 같은 발언은 함부로 내뱉으면 안 돼.”

“아, 악당은 그 여자지요!”

주의를 주는 내 모습에 에밀리가 퍽 억울한 얼굴로 와락 외쳤다.

“저 다 알아요. 아가씨께서 먹은 독이, 저를 시켜 받은 독이랑 다르다는 거……!”

“너.”

나는 험악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의 팔을 와락 붙들었다.

아픈지 에밀리가 미약하게 신음했다.

“아, 아가씨.”

“그 얘기 남들에게도 했어?”

“예, 예?”

“내가 상단으로 보내 시킨 것을, 누구한테 말했느냐 이 말이야.”

“아, 아니요, 아니요.”

에밀리는 조금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가씨가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잖아요. 그래서 눈 꾹 감고 모른다고만 했어요.”

“확실해?”

“네, 네!”

나는 여러 번 확답을 들은 후에야 꽉 붙들고 있던 그녀의 팔목을 놓아 주었다.

“앞으로도 그렇게만 해, 에밀리. 아무한테도 말하지 마.”

“하, 하지만, 그럼 아가씨는…….”

“내 생각 말고 네 안위만 생각하렴.”

나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친딸을 독살하려 한 범인으로 누명 쓰긴 싫잖니. 그렇지?”

그 말에 에밀리는 울먹이며 나를 옹호했다.

“그렇지만 자작극이라니요. 그거야말로 모함이잖아요. 우리 아가씨가 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야.”

나는 딱히 그렇게 몰린 것이 억울하지 않았다. 예상하기도 했거니와, 내 의지로 독을 마신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죽기 싫으면 넌 계속 모른 척해. 알았어?”

내 닦달에 에밀리는 울상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계속 모른 척할게요, 아가씨. 시키는 대로만 할게요.”

그러나 이렇게 여러 번 다짐을 받아 봤자 솔직히 믿을 수 없었다.

아마도 하녀가 자살한 것은 여주의 세뇌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에밀리도 세뇌당하면 어떻게 될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제가 입을 다물고 있어도 아가씨가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니라는 걸 밝힐 수 있을까요?”

“걱정하지 말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불안해하는 하녀에게 그렇게 되뇌면서도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해결할 필요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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