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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79화 (179/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79화

며칠 후.

에밀리의 지극 정성 어린 간호로 혼자 거동을 할 수 있을 무렵, 공작에게서 호출이 왔다.

집사를 따라 공작의 집무실로 들어서자, 이미 나를 제외한 모두가 모여 있었다.

공작의 두 아들과 뷘터는 물론, 여주까지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런데 성인식 이후 이런 장면이 노멀 모드에 있었나?’

그쪽으로 향하던 중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원래 게임에선 뷘터가 이본을 데리고 왔으니, 이런 장면 하나쯤은 있었을 수도 있다.

나는 불쑥 든 위화감을 금방 떨쳐 냈다.

아무렴 뭐 어떤가.

이미 내가 독을 먹은 시점에서 모든 게 다 어그러진 상태였다.

얌전히 자리에 앉자, 얼마 후 하녀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차를 내왔다.

아무도 찻잔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않고 정적만 흐르던 와중.

“……페넬로페.”

상석에 앉아 있던 공작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상태에서 이런 자리를 만들어 무척 미안하구나.”

“…….”

“하지만 더 지체되기 전에 성인식에서 쓰러진 것에 대한 자세한 정황을 들었으면 한다. 두 번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니까.”

공작은 퍽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이어 물었다.

“하여 너와 이본에게 그때 일에 관하여 몇 가지 하문을 하고 싶다. 허락해 주겠느냐.”

“네, 물어보세요.”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 번쯤은 겪어야 하는 일이었기에.

“먼저…… 성인식 날, 세리주를 마신 것을 기억하느냐.”

“네, 먹고 피를 토하면서 쓰려졌었죠.”

산뜻하게 대꾸하자 집무실 안이 잠시 숙연해졌다.

“……네가 마신 잔을 수거하여 조사를 해 보니, 윗부분에 독이 발려져 있더구나.”

“그렇군요.”

“그 잔이 네 것이 아닌, 이본의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느냐.”

“글쎄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하고…….”

“페넬로페.”

그런 내 모습이 퍽 가벼워 보였는지, 공작의 눈썹 사이가 깊이 파였다.

“이건 매우 중요한 사안이야. 널 그렇게…… 그렇게 만든 원인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하니, 신중히 떠올려 보거라.”

“잔이 비슷해서 헷갈린 것 같기도 하고요.”

심드렁하게 대꾸한 나는 불현듯 고개를 앞쪽으로 돌렸다.

“이본, 넌 어때?”

“어, 어?”

멍하니 제 앞의 찻잔을 내려다보고 있던 여주가 화들짝 놀랐다.

“넌 그때 기억이 어떠냐고.”

“너, 너무 놀라서 그때 일이 잘 기억나지 않아요. 수, 술을 마시고 갑자기 페넬로페가 쓰러진 것밖엔…….”

말끝을 흐리던 이본의 푸른 눈에 갑자기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그녀는 측은하게 나를 바라보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왜, 왜 그런 무서운 짓을 한 거야, 페넬로페……. 흑, 부디 네 몸을 소중히 여겨 줘.”

“허.”

나는 그녀의 행태에 짧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내가 내 손으로 독을 먹은 것은 맞지만, 그녀의 말은 꼭 내가 자작극을 저지른 것을 확신하는 듯 들렸기 때문이다.

내가 삐딱하게 조소하자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데릭 놈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훌쩍이는 이본으로 인해 잠시 멈춘 대화를, 뷘터가 이었다.

“……황태자 전하의 말씀처럼 이본 영애가 자작극을 벌이려다 페넬로페 영애에게 저지되었단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아직 세뇌가 안 된 건가?’

여주를 미리 만난 그가 멀쩡한 이성으로 중립을 지키다니 꽤 놀라웠다.

“제, 제, 제가요?”

이본은 뷘터의 지적에 그야말로 숨 넘어갈 듯 헐떡였다.

“저는, 저는 그러지 않았어요. 정말이에요!”

물이 넘치는 잔처럼 그렁그렁하던 여주의 커다란 두 눈에서 기어코 눈물이 줄줄 쏟아졌다.

“저는 그 자리에 갈 수 있을 거라 생각도 못 했는걸요. 첫째 오라버니, 아니, 소공작님도 아실 거예요. 제가…… 제가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린 걸.”

“그건 사실입니다.”

그녀의 지목에 데릭이 짧게 대꾸했다.

‘사실이겠지. 너는 네가 세뇌당한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이니까.’

나는 속으로 빈정거리며 또 한 번 비죽 웃었다.

그런 나를 발견한 데릭 놈이 또다시 눈을 부라렸다.

제게 몰린 시선이 억울했는지, 여주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냈다.

“게다가 저는 베키보다 하녀장님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많았는걸요. 그리고…….”

“…….”

“베키는 시시때때로 에밀리와 만남을 가졌어요. 페넬로페의 전담 하녀요…….”

“…….”

“저는 그래서…… 그래서 베키가 페넬로페의 사람이란 것을 알고 있었어요. 저를 감시하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본은 그 말을 끝으로 더는 말을 못 잇겠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나는 아무도 모르게 혀를 찼다.

‘쯧, 무서운 계집애.’

이런 것을 우려해서 에밀리에게 묻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었다.

기껏해야 한두 번 근황을 물었던 것을 귀신같이 알고 엮는 것을 보니, 소름이 끼쳤다.

‘천사 같다는 설정이라며! 개뻥이잖아.’

짜증스럽게 게임을 향해 저주를 퍼부을 무렵, 다행스럽게도 나 대신 공작이 먼저 나서 주었다.

“네 임시 하녀는 집사가 지정한 게다, 이본.”

“그렇지만 페넬로페는 집사님과 무척 친하잖아요. 그게 아니더라도…….”

“…….”

“제가 정말 후작님의 말씀처럼 자작극을 펼친 범인이라면, 페넬로페는 그걸 마시지 않았을 거예요.”

“…….”

“흑, 그냥 술을 쏟아 버리고 그 자리에서 저를 지목하지 않았을까요?”

의문을 제기한 뷘터의 입이 서서히 닫혔다. 이로써 사건은 다시 원점이 되었다.

나는 고요한 침묵 속에서 묵묵히 시선을 내려 테이블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의 내 선택으로 인해, 상황이 이렇게 돌아갈 것쯤은 예상했다.

처음에는 어떻게 타파할지 머리를 굴렸는데, 이내 다 귀찮아졌다.

‘게임처럼 내가 독을 먹인 게 아닌 것만으로도 다행 아닌가?’

아직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이본을 독살하려 했던 페넬로페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

그런 생각을 하던 나는 여주의 앞에 놓여 있는 찻잔으로 무심결에 시선을 옮겼다.

김이 가신 투명한 찻물의 색이 꼭 내가 마신 세리주처럼 벌겠다.

‘진하게 우려진 건가? 그럼 쓸 텐…….’

태평하게 떠오르던 생각이 문득 멈췄다.

나는 미약하게 흔들리는 시선을 들어 이본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뭐가 그리도 억울한지, 소리 없이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선을 내려 그녀의 찻잔을 바라보았다.

이어서 다른 이들의 앞에 놓인 찻잔 또한.

‘……없어.’

그 순간, 등골을 타고 섬뜩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이본의 찻잔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의 잔상이, 물 위에 비치지 않았다.

“……독이란 걸 알면서도 왜 마신 거냐.”

그때, 누군가 말을 건넸다.

나는 퍼드득 어깨를 떨며 고개를 들었다.

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듯 데릭 놈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왜 그러는 거지?”

놈은 소스라치게 놀란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듯 방금 전 내가 바라보고 있던 테이블을 훑었다.

“아뇨, 아무것도…….”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뭐라고 하셨죠?”

되묻는 내 물음에 수려한 얼굴이 불쾌하게 일그러졌다.

“네가 걸고 있던 마법 목걸이.”

놈은 내게 같은 소리를 반복하는 대신 다른 말을 했다.

“주변에 독성 물질이 있다면 색이 변한다던데. 베르단디 후작님은 네가 그것을 못 봤을 리 없다고 증언했다.”

“아.”

나는 곁눈질로 슬쩍 뷘터를 바라보았다.

그 또한 데릭 못지않게 아까 전부터 나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군청색 동공이 한차례 흔들렸다.

‘그런 것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성인식에서 마지막에 보았을 때, 꼭 상종도 안 할 것처럼 굴더니 의외였다.

눈치 빠른 황태자에게 들키지 않고 목걸이의 성능을 밝히느라 진땀 좀 뺐을 것이다.

그러나 별로 고맙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베키라는 하녀가 죽기 전에 범인으로 널 지목했다는 것쯤은 들어서 알고 있겠지.”

내가 뷘터를 바라보며 새삼스러운 감상에 잠겨 있을 즈음, 데릭 놈은 홀로 취조를 진행했다.

“그 하녀의 방에서 네가 먹은 독의 해독제가 나왔다.”

“데릭, 그만해라. 여긴 심문을 하는 장소가 아니야.”

공작이 엄한 목소리로 그를 막았다.

“그리고 그건 더 들추지 말라 하였지 않느냐!”

“왜 독인 것을 알면서도 먹은 거지?”

그러나 평소 아버지의 명을 칼 같이 들어먹던 놈답지 않게, 데릭은 공작의 말까지 무시하고 집요하게 물었다.

“대답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뭘 원해서 그런…….”

“이미 답을 정해 놓고 묻는 질문이 아닌가요?”

“……뭐?”

“제가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닌가, 그걸 묻고 싶은 거라면.”

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렇게 이 대답을 원해서 안달인데, 못 할 것도 없었다.

“제가 베키에게 시켰어요.”

“페넬로페!”

“야!”

레널드가 놀랐는지 벌떡 일어났다.

집무실 분위기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나는 데릭에게 고정했던 고개를 돌려, 이본을 응시했다.

이런 상황까진 미처 예측하지 못한 걸까.

커다란 푸른 눈이 당황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그 눈을 똑똑히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독을 구해 오란 말 외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 멍청한 하녀가 제가 이본에게 먹일 거라 멋대로 착각했나 보네요.”

“그, 그게……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탕-! 공작이 경악이 서린 얼굴로 팔걸이를 세게 내리쳤다.

“네가, 정말 네가 스스로 그런 게냐? 네가 정말 자작극을…….”

“하, 하지만 영애께서 전담 시녀를 놔두고 그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내가 뱉은 폭탄 발언으로 난장판이 된 상황에서 유일하게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는지, 뷘터가 침착하게 지적했다.

나는 아무렇게나 변명했다.

“에밀리를 그다지 믿지 못했고, 베키의 약점을 잡았어요. 약점이 있는 한 함부로 입 놀리고 다니지 않을 테니까.”

“약점……?”

“그 애가 제대로 된 보증서가 아닌 것으로 저택에 들어온 사실을 우연히 들었거든요. 그것으로 협박했어요.”

“너……!”

공작은 청산유수처럼 흘러나오는 내 말에 핏발 선 눈을 부릅떴다.

레널드가 금방이라도 내게 달려들 것처럼 외쳤다.

“……왜? 너, 너 진짜 왜 그래!”

“이본에게 쏠린 관심을 내게 좀 돌려 보려고.”

나는 모두를 돌아보며 내 일이 아니라는 양 고저 없이 읊조렸다.

“공녀 자리를 빼앗기기 싫어서요.”

“페넬로페! 너……!”

“그게…… 이유의 끝인가?”

공작이 나를 호명함과 동시에 데릭이 되물었다.

“고작, 확실하게 판명 나지도 않은 평민에게 쏠린 관심 좀 집중시키겠다고.”

“…….”

“……죽을지도 모르는, 그 짓을 했다고?”

내가 눈을 떴을 때부터 자작극으로 몬 것은 분명 놈이었다.

그런데 바라던 대로 고스란히 답해 주는 내 말에, 놈은 꼭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초점이 나간 눈으로 나를 멍하니 응시했다. 일순간에 핏기가 빠진 데릭의 안색이 이상했다.

하지만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차라리 죽으면 더 다행이란 생각을 하긴 했네요.”

“뭐……?”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놈이 더듬더듬 되물었다.

“왜…… 왜지?”

“뭐가요?”

“왜 하필 독이야. 관심을 받기 위해선 다른 방법도…….”

“독을 마시는 데 거창한 이유까지 필요할까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단 하나뿐인 진실을 입에 담았다.

“그냥 마셨어요. 죽나 안 죽나 확인해 보려고.”

“……상황이 맞지 않습니다.”

그때, 또 다른 목소리가 곧바로 내 말을 받아쳤다.

시선을 돌리자, 뷘터가 일그러진 표정을 하고 필사적으로 나를 변호했다.

“영애의 말이 사실이라면, 죽은 하녀는 왜 독을 이본 영애의 잔에 바른 겁니까.”

“음…… 글쎄요.”

나는 과장된 행동으로 곰곰이 생각하는 척하다가, 이내 떠올랐다는 듯 ‘짝!’ 하고 손뼉을 치며 말했다.

“제 잔에 바르는 것을 깜빡 잊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혹시나 제가 등신처럼 잔을 헷갈릴까 싶었나 보죠, 뭐.”

“그게,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공작이 또 한 번 ‘쾅!’ 팔걸이를 내리치며 격노했다.

누가 들어도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하지만 말이 되고 안 되고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가장 중요한 건, 아직도 이 빌어먹을 게임 속에 있는 내가 살아남는 것뿐.

“어쨌든 물의를 일으켜서 죄송해요. 저는 너무 큰 죄를 지었고, 이 일에 깊은 책임을 느끼고 있어요. 아버지, 그리고 소공작님.”

혼돈으로 물든 좌중을 돌아보며 나는 택했다.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해결할 방법은 딱 하나뿐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게…… 무엇이냐.”

“저를 파양시켜 주세요.”

여기서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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