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0화
‘파양’ 소리에 집무실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격노하던 공작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말을 더듬었다.
“지…… 지금 파양이라고 했느냐, 페넬로페?”
“네.”
나는 가볍게 수긍했다.
“제 죄를 물으려고 이 자리를 만든 것이 아닌가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런 뜻으로 너를 부른 게 아니다!”
공작이 눈을 부릅떴다.
“말했잖느냐,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혹여나 에카르트를 노린 누군가 있을 것을 염려하여…….”
“외부와 관련 없어요.”
나는 서둘러 그런 공작의 말을 막았다. 이건 예상과는 좀 다른 전개였다.
친딸도 돌아왔겠다, 이렇게 말하면 파양이 금방 진행될 줄 알았는데.
공작에게는 아직 세뇌를 시도하지 않았는지, 쉽지 않았다.
“모두 다 제가 시킨 거라니까요? 더 조사할 필요도 없어요. 다 제 잘못이니까, 제가 책임질게요.”
“대체…….”
“파양은 안 돼.”
말을 잇지 못하는 공작 대신 누군가 단호하게 내 제안을 거절했다.
고개를 돌리자, 데발놈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어느새 그의 눈에 핏발이 잔뜩 서 있었다.
“왜요?”
내가 이러면, 다들 내심 쌍수 들고 환영할 줄 알았건만.
나는 그런 그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곧장 되물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제 잘못으로 매듭 지으면 깔끔하고 좋잖아요. 그러니 제가 집을 나가는 게…….”
“네가, 가긴 어딜 가!”
그 순간, 놈이 공작 뺨치게 버럭 큰 소리를 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나는 당황해서 어버버하며 놈을 쳐다봤다.
“자작극이라면, 더욱이 소문을 잠재우고 덮어야지. 이 시점에서 파양을 했다간 에카르트의 위신은 어쩌고, 넌!”
“…….”
“네 평판은……!”
데릭은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식은땀까지 흘리며 빠르게 내뱉다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건지, 그는 앞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가문을 벗어나면 널 보호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언제부터 그렇게 제 평판을 신경 쓰셨다고요.”
“너 정말……!”
내 대꾸가 뭐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놈의 얼굴이 흉흉해졌다.
점점 이 상황이 짜증 나는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데릭의 말이 맞다, 페넬로페.”
그때, 살벌해진 분위기를 뚫고 공작이 서둘러 개입했다.
“아가, 일단 진정하려무나. 설령 네가 자작극을 했다 한들, 네 탓을 하려는 게 아니야. 응?”
그는 토라진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어투로 진땀을 뺐다.
돌아가는 상황에 아까부터 이본은 흐느끼던 것을 멈추고 묘한 얼굴로 데릭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게 소름 끼치게만 느껴졌다.
이건 모두 한 편의 쇼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아직도 이본이 정확히 뭘 노리고 이렇게 빨리 공작저에 입성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여주의 거죽을 뒤집어쓴 저 레일라 년을 이겨 먹을 자신이 없었다.
탈출에 실패한 이상, 남은 것은 내 목숨 부지하기뿐이었다.
그런데 속도 모르고, 망할 공작저 인간들이 끝까지 나를 방해하려 드는 것이다.
“하…….”
나는 깊은 한숨을 쉬며 피로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파양도 안 된다, 죄를 묻는 것도 아니다. 그럼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데요.”
“야, 너…….”
그러나 공작 대신 다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던 레널드였다.
“방금은 공녀 자리 빼앗기기 싫었다고 했잖아.”
“…….”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집 나간다는 소리를 쉽게 해.”
시선이 마주치자, 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꼭, 예전에 다락방에서 살벌하게 싸웠을 때처럼.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제멋대로 받아들이고 난리를 치던 레널드는, 의외로 지금은 조금도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 눈치였다.
당연했다. 그저 파양당하기 위해 아무렇게나 지껄인 말이었으니까.
“죽을 뻔했더니 다 지긋지긋해졌어.”
나는 언젠가 그에게 되뇌던 말을 또다시 입에 담았다.
딱히 달리 댈 변명도 없었다.
득달같이 물음이 돌아왔다. 레널드가 아닌, 데릭 놈에게서.
“무엇이.”
“모든 게 다요.”
나는 연이어 국어책을 읊듯 딱딱하게 준비한 답변을 읊었다.
“허울뿐인 공녀 노릇 하는 것도, 천둥벌거숭이 취급받는 것도. 아니, 그냥 이 집에 있는 것 자체가 다 지긋지긋해요.”
“페넬로페.”
“이제 이본도 돌아왔잖아요. 제가 더 남아 있을 필요가 있나요? 파양시켜 주세요.”
“파양이라니 당치도 않는 소리야!”
공작은 내 애원에도 완강하게 외쳤다.
그러다 곧바로 목소리를 누그러뜨리며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페넬로페, 아가. 누가 뭐래도 넌 내 딸이야. 성인식 전부터 대체 왜 이러는 게냐, 응?”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머리가 아파 왔다. 나는 짧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럼 더 이야기를 나눌 필요 없겠네요.”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앉아.”
“저 아픈데요, 아버지.”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데릭 놈을 무시하고, 공작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해 왔던 것과 다르게 퍽 예의 없는 행동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독을 먹고 얼마 전에 깨어났는데 예의 좀 밥 말아먹었으면 또 어떤가.
게다가 아프다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점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붙잡고 신음하자, 공작이 마지못해 허락했다.
“……그래, 그만하자꾸나. 올라가거라.”
“하지만-.”
“그만, 애가 아프다잖느냐!”
반박하는 첫째 놈에게 공작이 짓씹듯 윽박질렀다.
양딸이 그대로 죽어 버렸다면 그도 무척이나 입장이 난감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프다는 말을 꽤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었다.
나는 지체 없이 그 숨 막히는 자리를 벗어났다.
집무실을 나가기 직전, 앉아 있는 등장인물들과 스치듯이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형형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데릭, 피로해 보이는 레널드, 뷘터.
마지막으로 묘한 표정의 이본.
‘이 정도면 됐지? 나는 공녀 자리에 쥐뿔도 미련 없으니까, 난 제발 가만둬라. 응?’
나는 그녀에게 내 이 간절한 마음이 닿기를 기도하며, 서둘러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타악- 문이 닫히는 소리와 동시에, 공작이 입을 열었다.
“레널드, 이 일은 잠시 덮거라.”
“아버지!”
레널드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공작을 돌아보았다.
가족 간의 대화에 입을 다물고 있던 뷘터 또한 마찬가지였다.
데릭이 사납게 찡그려진 얼굴로 제 아비에게 항의했다.
“자작극을 했다는 자백을 듣고도 그냥 넘어가겠단 말씀입니까?”
“근신을 한다 하지 않느냐. 당분간은 조사고 뭐고, 다 멈춰. 페넬로페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아직 조사할 것이 남았습니다.”
공작의 명에 불복하며 데릭이 이를 악물고 되뇌었다.
“후작님의 말씀처럼, 아직 이본의 방은 수색하지 않았지요.”
“오, 오라버니……!”
눈을 굴리며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던 이본이, 갑작스럽게 저를 지목하는 데릭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어, 어떻게, 어떻게……!”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보며 연신 입을 벙긋댔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그저 충격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녀를 외면한 채 데릭이 빠르게 읊조렸다.
“외부 세력이 하녀를 사주했을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습니다. 시간을 두고 충분히 재조사를 하는 것이…….”
“나는 뭐 조사도 제대로 못 하는 병신인 줄 알아?”
그때, 레널드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후작님과 함께 죽은 하녀의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어. 그런데 아무것도 안 나왔다고! 깨끗해!”
“…….”
“어차피 형은 조사할 권한도 없잖아. 아버지 말씀이 맞으니까, 그만 좀 해. 괜히 입 놀려서 걔 성질이나 긁지 말고.”
“뭘 그만두란 소리냐. 아직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는…….”
“페넬로페가 원하지 않잖아!”
답답한 소리를 늘어놓는 제 형제에게 레널드가 벌컥 화를 냈다.
“형이 입 열 때마다 제대로 진행되는 게 없어! 괜히 들쑤셔서 쟤 또 독이라도 처마시면! 그땐 어쩔 건데!”
“…….”
“아버지 말씀처럼 지금은 그냥 내 버려 둬. 당장 집 나간다고 난리 치는 것보다 낫잖아.”
말을 마친 레널드가 거칠게 씨근덕거렸다.
그는 방금 전 페넬로페의 얼굴을 떠올렸다.
모든 게 다 지긋지긋하다고 말하는 그 얼굴이, 일전에 그에게 말했을 때와 똑같았다.
전담 하녀의 농간질로 썩은 음식을 퍼먹는 것을 제게 들켰을 때.
- 내 방에 공녀의 목걸이를 가져다 놨을 때부터 예상했던 일 아니야?
그 일의 전말을 그녀가 모두 알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황하는 그에게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달려가 고해바치지도 않았다.
그저 ‘네가 그럼 그렇지.’라고 말하는 듯 염증이 난 표정으로.
- 그런데 이제 모든 게 다 지겨워졌어.
다락방에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시비를 걸던 그에게 그녀는 욕을 하는 대신 초연한 얼굴로 말했다.
- 넌 항상 날, 노예보다 못한 버러지처럼 비참하게 만들어.
어쩐지 그 말이 자신에게만 국한된 게 아니라는 위화감을 떨칠 수 없었다.
레널드는 그때 느꼈던 섬뜩함이 되살아나는 듯해, 얕게 몸을 떨며 중얼거렸다.
“……쟤 저런 말 한두 번 한 줄 알아? 저러다가 어느 날 진짜 짐 싸들고 몰래 나가 버리면.”
“…….”
“그래서 진짜 누가 암살이라도 하면, 찾을 방법도 없다고…….”
더 자극했다간, 그녀는 충분히 짐 싸고 나가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페넬로페가 회복할 때까지 입들 조심하고, 자극하지 마라.”
레널드의 말에 혹여 그녀가 또다시 잘못된 선택을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공작이 쐐기를 박았다.
집무실 내 분위기가 한순간에 숙연해졌다.
“원하신다면…….”
그때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찢었다.
“제, 제 방을 수색하셔도…… 저는 괜찮아요.”
물기 어린 푸른 눈을 가진 소녀가 좌중을 둘러보며 애처롭게 말했다.
그 모습에 데릭의 낯이 어두워졌다.
“넌 입 다물고 있어.”
눈치도 없냐며 레널드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이자, 그녀가 ‘헉’ 하고 겁 먹은 소리를 내었다.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는 데릭도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레널드의 말을 끝으로 장내에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저마다 생각에 잠겨 있느라, 치맛자락을 꽉 붙든 채 부들부들 떨리는 여린 손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그때였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는 그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뷘터가 난감한 얼굴을 하고 주섬주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 후작. 가 보게.”
그제야 다른 가문 사람에게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자각을 한 공작이 서둘러 그를 내보냈다.
뷘터는 황급히 공작의 집무실을 나섰다. 그리고 뛰다시피 복도를 가로 질렀다.
다행히 얼마 안 가 중앙 계단참에 서 있는 작은 인영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몸이 회복되지 않아, 걸음이 느려진 탓이었다.
그는 재빨리 입을 열어 그녀를 불렀다.
“페넬로페 영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