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1화
“페넬로페 영애.”
나를 부르는 나지막한 음성에 계단을 오르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천천히 몸을 돌리자, 매번 이때쯤 나를 부르는 남주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죠?”
“잠시 대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어쩌죠? 저는 딱히 후작님과 나눌 대화가 없는데요.”
“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증언했던 영애의 전담 하녀가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을 거라는 말씀을 공작님께 드릴까 합니다만.”
의외의 협박에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홀에는 그를 제외하고 아무도 없었다.
‘하긴. 한 번쯤은 부딪혀야 할 일이지.’
독을 의뢰할 때까지만 해도, 이 빌어먹을 게임에서 나가면 두 번 다신 보지 않을 사이니 편리하게 이용해 먹자 했건만.
깨어나 보니, 그가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는 게 후회가 되었다.
“……따라오세요.”
나는 힘겹게 오른 계단을 다시 내려가며 한숨처럼 말했다.
그를 이끌고 뒷문을 통해 저택 밖으로 나갔다.
저택 안은 듣는 귀가 많았다.
‘이본한테 세뇌당한 사용인이 어디 숨어 있을지 좀 무섭기도 하고…….’
하여, 나는 그를 끌고 후원의 한가운데까지 도착한 후에야 걸음을 멈췄다.
“이제 말씀하세요.”
이름 모를 보라색 꽃들이 바람결에 하늘하늘 흔들리며 향긋한 향기를 뿜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노란 꽃들이 만개했던 것 같은데…….’
이곳에서 한 남자에게 꽤 감동스러운 선물을 받고 티격태격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모든 게 바뀌었다.
후원의 정경, 앞에 서 있는 남자도.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상념에 잠겨 있을 무렵, 뷘터가 어두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고개를 슬며시 들며 되물었다.
“무엇을요?”
“영애가 드신 독이 제게 의뢰한 독과 다르다는 것 말입니다.”
‘이제 정체고 뭐고 내 앞에선 다 까발리기로 했니?’
이렇게 직설적으로 따지고 물을 줄은 몰라서, 잠시 당황했다.
부지가 넓어 아무도 우리의 소리를 듣지 못하겠지만, 나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투덜댔다.
“……아무리 밖이라도 공작저 내인데, 말씀을 좀 조심하시는 게 어떨까요.”
“방음 마법을 걸었습니다.”
“잘됐네요. 이제 이어 말씀하세요.”
“처음엔 영애께서 따로 독을 구했던 게 밝혀지면 누군가를-.”
내 허락에 서둘러 주절대려던 뷘터 놈이, 갑자기 말을 멈추고 정정했다.
“……돌아온 이본 영애를 해치려 했다는 누명을 쓸까 봐 염려했습니다.”
이왕 방음 마법까지 건 거, 아예 노골적으로 가려는 모양이었다.
그는 변명처럼 제가 나서지 못한 이유에 대하여 해명했다.
“그래서, 영애가 깨어날 때까지 섣불리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신변이 걸려 있으니 그가 입을 다문 것은 당연했다.
나와 거래한 것은 베르단디 후작이 아니라, 한낱 정보상이었으니까.
되레 그가 입을 다물고 있어 준 덕에 수월히 파양 얘기를 꺼낼 수 있었다.
“그렇군요.”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뷘터가 곧장 다음 질문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무엇이요?”
“자작극이라니요. 왜 그 말을 인정하시는 겁니까. 영애께서 저한테 보낸 하녀는 죽은 하녀가 아닌, 다른 이였잖습니까.”
“그랬었나요?”
“영애.”
짐짓 모르겠다는 얼굴을 가장하며 고개를 기울이자, 뷘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화에 참여할 의사가 별로 없어 보이는 내가 답답한지, 그가 좀 전보다 더 직설적으로 말했다.
“차라리…… 다른 독을 구했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러면 제가 상단주로서 증언을…….”
“후작님.”
나는 문득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한 가지만 해 주세요. 제 앞에서 베르단디 후작님으로 계실지, 아니면 저와 거래를 한 상단주로 있을지.”
뷘터의 입이 다물렸다.
한차례 흔들리는 군청색 눈동자를 응시하며, 나는 찬찬히 입술을 떼었다.
“베르단디 후작님이시라면, 과한 관심이십니다. 염려 감사합니다만,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결하도록 할게요.”
“……페넬로페 영애.”
“저와 거래를 한 상단주로서 제 앞에 서 있는 거라면.”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이내 그가 원하는 대로 민낯을 까발렸다.
“……그대도 날 의심한 건 마찬가지이지 않나?”
갑자기 바뀐 말투에 뷘터가 눈을 크게 뜨며 숨을 멈추는 게 보였다.
“내가 하녀를 통해 독을 의뢰했을 때, 솔직히 무슨 생각을 했지?”
“…….”
“돌아온 진짜 공녀를 독살하려 하는 악독한 가짜 공녀.”
내가 의뢰했을 적 그가 했을 법한 생각들을 읊자, 그가 어깨를 움찔거렸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것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저지른 무례까지 들먹이면서 막무가내로 구니까, 이번만 원하는 대로 해 주고 다시는 상종하지 않으려 했겠지.”
“…….”
“그러니 해독제 없는 독을 의뢰했는데도, 꾸역꾸역 해독제를 만들어 가져온 거 아니야.”
내가 이것까지 직시하고 있을 줄은 미처 알지 못했던 걸까.
그 순간 뷘터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별 감흥은 없었지만, 잘생긴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지는 것이 좀 볼 만했다.
그가 내게 무슨 답을 듣길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실은 이본을 해치려 한 거란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독을 쓴 이는 누구인지 밝히고 싶어 하는 건지.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 와서 그것을 따져 봤자 뭐 해. 중요한 건, 그대는 이전에도 지금도, 나를 신뢰한 적이 없지. 이게…….”
나는 한쪽 손을 들어, 내게 바짝 다가선 그의 가슴을 검지로 ‘주욱-’ 밀었다.
그다지 힘을 가하지 않았음에도 그가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우리 사이의 거리야.”
나는 떨어진 그와의 거리를 흘끗 눈짓하며 차갑게 선을 그었다.
언제나 한 발짝 떨어진, 타인.
우린 고작 그 정도 사이이니, 더는 내 일에 관여하지 말라는 소리였다.
뷘터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현명한 자니, 나는 그가 곧 내 말을 이해하리라 여겼다.
그러나 불현듯 그가 아직도 그의 가슴을 밀어내던 내 손가락을 잡아챘을 때.
“……타인을 독살하리라 예측했음에도, 당신의 손에 독을 쥐여 주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를 보며, 나는 무언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무슨…….”
“저는 그 무엇보다도 생명을 중시하는 마법사입니다.”
“…….”
“타인의 생명을 갈취하여 힘으로 삼는 레일라와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는 걸 일생의 사명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
“……당신을 만나고, 응당 가져야 할 많은 것들을 저버렸습니다.”
그는 절절 끓는 음성으로 내게 알 수 없는 말을 토해 냈다.
손가락을 압박하는 힘이 꽤 강했다.
나는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다.
“핑계를 댈 거면 남이 아닌 자신에게서 찾아보는 게 어떠신가요, 후작님.”
“이본, 그 애는.”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나를 붙든 채, 그가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을 내게 하기 시작했다.
“저보다 먼저 빈민촌 사람들을 돕던 아이였습니다.”
“……그게-.”
“없는 살림을 쪼개서 항상 남을 위하던 선량한 이였지요. 봉사를 시작할 무렵 만나, 서툴렀던 저를 도와 주고, 많은 것들을 알려 주었습니다.”
뜬금없는 이본과의 첫 만남 이야기를 늘어놓는 그의 기행에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나는 헛웃음 지으며 빈정거렸다.
“그래서요? 그런 착한 애를 제가 죽이기라도 할까 봐 많이 두려우셨나 본데…….”
“제가 두려워했던 건!”
그 순간, 뷘터가 갑자기 큰 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
“……그녀가 공작저로 돌아갔을 때 절망할 당신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내게 비자금을 맡긴 당신!”
“…….”
“공작님의 친딸이 돌아오면, 당신이 그 돈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질까 봐!”
이제껏 노골적으로 내게 말을 꺼낸 것은 장난이었다는 양, 뷘터는 처참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제 민낯을 모두 내보였다.
“어릴 적의 기억을 되찾았다던 그 애를 외면했습니다. 머리로는 공작저로 데려가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내 그러지 않았습니다.”
“…….”
“제가 외면한 뒤 계속해서 빈민촌에 있던 그 애가, 마물의 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후로 단 하루도 편히 잔 적이 없습니다.”
“…….”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 같아서, 눈을 감기만 하면 악몽을 꿨지요.”
그의 안색이 신에게 죄를 고하는 이처럼 거멓게 침잠했다.
뷘터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내 손가락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괴로운 음성으로 속삭였다.
“……공작님의 친딸이 돌아왔다는 정보를 취득하고 가장 먼저 걱정한 건, 우습게도 당신이었습니다.”
“…….”
“의뢰를 받은 후 당신이 끔찍한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고 여겼으면서도…….”
“…….”
“해독제를 만들어서 어떻게든 당신이 저지를 짓을 감춰 줄 생각만 했지요.”
한차례 격정이 쓸고 지나간 후.
그는 잔뜩 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래도 신뢰의 문젭니까?”
나는 조금도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아.’
벌어진 입 사이로 나지막이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제야 상황이 어떻게 됐는지 알 것 같다.
원래 성인식에서 여주를 데리고 올 예정이었던 마법사 남주.
그러나 그는 나를 향한 호감으로 인해, 여주를 저버렸다.
내 귀로 똑똑히 그의 피 끓는 듯한 고백을 들었음에도, 나는 좀체 믿기지 않았다.
노멀 모드에서 언제나 여주를 위하던 선량하고 다정한 남주.
페넬로페의 성인식에 여주를 데리고 왔어야 할 그는, 자신의 신념까지 저버리고 한참 전에 그녀를 외면한 상태였다.
“……대답해 주십시오, 영애. 이래도 신뢰의 문젭니까?”
그리고 그런 이본을 세뇌당한 이클리스가 데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