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2화
뷘터는 핏발이 선 눈으로 나를 보며 대답을 강요했다. 아니, 어쩌면 그건 애원이나 다름없었다.
“그건…….”
나는 입술을 벙긋대며 한참을 고민했다.
신뢰 문제가 맞다고 답하기가 모호했다.
내가 이본을 죽일 것이라 생각했으면서도, 죄를 감춰 주려 했다는 그.
‘아니. 저번에 그 난리를 쳤는데도 날 극악한 악녀 취급한 거니, 어쩌면 신뢰 문제가 맞나?’
나는 꿰뚫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향해, 고심 끝에 답했다.
“……그건, 후작님의 인성 문제 같네요.”
“인성…… 말씀이십니까?”
“네, 인성.”
뷘터의 검푸른 동공이 커졌다. 이내 그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작게 실소했다.
“인성에 대한 지적을 듣는 것은 처음인데…….”
허탈한 그의 중얼거림에 나는 좀 민망해졌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 인성 지적이라니. 내가 듣기에도 무례하고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허허’ 하고 얼빠진 웃음을 연신 터뜨린 덕분에 심각했던 우리 사이가 좀 유해졌다.
나는 그를 흘끔 올려다보며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관심이 있다고만 하시지 않으셨어요?”
‘만남’이라는 계약 조건을 내걸 때만 해도, 그저 호기심을 채우고 싶다고 했지 않나.
대체 언제부터 그의 마음이 변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내 물음에 잠시 침묵하던 그가, 일그러진 미소를 지은 채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당신을 방에 데려다준 이후…… 정신을 차릴 때마다, 당신을 떠올리고 있더군요.”
“…….”
“어쩌면 영애와 함께할 수도 있었을 많은 날들을, 제 손으로 망쳐 버린 것 같아서 수없이 후회했습니다.”
그는 그 말을 하며 잡고 있던 내 손가락을 천천히 놓아주었다.
나를 향한 네 의심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말을 삼키며, 나는 다소 냉정하게 뇌까렸다.
“죄송하지만, 저는 못 받아드려요.”
네 그 마음.
미안하지만 지금의 내게는 별로 필요하지 않았다.
뷘터는 덤덤히 내 말을 알아들었다.
“받아 달라고 애원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
“제발 스스로를 사지로 몰지 마십시오.”
뷘터는 나를 간절하게 쳐다보며, 마침내 대화를 원하던 이유를 밝혔다.
“차라리 저를 이용하십시오.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을요?”
“……모든 것을.”
나는 그의 대답에 잠시 멈칫했다. 그리고 하드 모드가 끝났음에도 여전히 게이지 바가 떠 있는 그의 머리 위를 흘끔 올려다보았다.
‘……보라색은 뭘 뜻하는 걸까.’
필요 없다고 대답하려다, 마음을 바꾼 것은 단순한 변덕이었다.
“저를 돕다가…… 후작님의 가면이 벗겨지더라도요?”
“독을 만들었을 때부터 이미 각오한 상태입니다.”
“제가, 진짜 범인을 이본으로 몰아 달라고 하면요?”
“기억 조작 마법으로…… 상황을 준비해 보겠습니다.”
그가 과연 어디까지 허용할까 궁금했던 나는, 그의 대답에 새삼 놀랐다.
“……저 대신 그 애를 죽여 달라고 하면요?”
마지막 질문에 드디어 그의 말문이 막혔다.
나를 위해 모든 것을 한다는 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
입술을 달싹이며 머뭇거리던 그가 새된 비명처럼 띄엄띄엄 말했다.
“암살 길드에 의뢰를 하고…….”
“…….”
“그리고, 자수하겠습니다.”
나는 그의 답변에 그제야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나도 그다운 답변이었기에.
‘하드 모드가 끝나기 직전에 이랬으면, 차라리 좋았을까.’
의심병 말기였지만, 뷘터는 기본적으로 다정하고 세심한 편이었다.
때문에 이클리스를 대신해 몇 번이고 보험으로 삼을 계획도 했었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게 무의미했다.
“그럼 후작님이 보호하고 있는 아이들은요?”
웃음기 담긴 내 목소리에, 일순 군청색 눈동자가 커다랗게 확장되었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레일라 신도들에게 핍박받고 있을지 모를 마법사의 후손들은요.”
“그건…….”
미처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그의 얼굴이 부지불식간에 흐려졌다.
사랑이냐, 사명이냐.
이제 와 뷘터를 믿기에, 그는 짊어진 짐이 너무 많았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애석하게도, 그와는 달리 나는 이제 그것을 벗어던지려 계획 중이다.
나는 거의 울기 직전까지 몰린 뷘터를 그만 놀리기로 했다.
“걱정 마세요, 후작님. 그런 부탁 안 드릴 거니까.”
“……영애.”
“믿으실지 안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전 평화주의자거든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저 때문에 후작님의 사명을 저버리진 마세요. 나중 가서, 어쩔 수 없었다는 후작님의 변명거리로 쓰이고 싶지 않아요.”
가벼운 말투와는 달리 싸늘하기 그지없는 내용에 뷘터가 이를 악물었다.
그것을 본체만체하며 나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그냥 이 일을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짓고, 공작저를 떠나고 싶어요.”
“하지만…… 자작극이 아니잖습니까. 분명, 누군가 영애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스스로 누명을 쓰려는 겁니까.”
집요하게 따져 묻는 남자의 행동에 문득 피로가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후원에 서 있은 지도 꽤 오래 지났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진실을 털어놓았다.
“맞아요, 자작극.”
“독이 다르지 않습니까.”
“그럼 그 독을 산 사람의 자작극이겠지요.”
“그게 무슨-.”
“저는 제 전담 하녀를 통해 이미 독을 구한 상태였죠.”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내가 잠든 사이 공작저 내의 모두가 답을 찾지 못한 수수께끼를 그에게 던졌다.
“……그럼 죽은 하녀를 통해 독을 구한 사람은 누굴까요?”
뷘터는 의미심장한 내 물음에 크게 숨을 들이켰다.
“역시, 역시 알고 계셨군요.”
저벅-.
그가 단숨에 내가 벌려 놓은 거리를 좁히며 다가왔다.
“누굽니까. 누가, 영애를…….”
성급하게 묻던 그가 문득 무표정한 내 얼굴을 보며 말을 멈췄다.
정답을 알아차린 듯, 그는 떨리는 눈으로 연신 내 기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본 영앱니까?”
“…….”
“대답…… 대답해 주십시오. 이본 영애가 그런 겁니까? 이본 영애가 자작극을 벌인 겁니까?”
나는 답하지 않고 그를 고요히 지켜보았다.
그가 과연 내 말을 믿을지 안 믿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맙소사…….”
받아들이기 퍽 힘든지, 뷘터가 두 손을 들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하기야, 남을 돕기만 하는 천사 같은 여주가 그런 짓까지 했다는 걸 바로 받아들이긴 힘들 테지.’
나는 그런 그를 이해했다.
한참 후, 그가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당신은 왜 그걸 알면서도 세리주를 마신 겁니까. 이본 영애에게 쓸 것도 아니면서 제겐, 왜 따로 독을…….”
주절거리던 뷘터가 불현듯 말을 멈췄다.
그는 얼굴을 파묻었던 제 두 손을 서서히 떼어 내며 나를 바라보았다.
“정말, 죽으려고 했던 겁니까?”
깊은 심해를 담은 눈동자가 기이한 빛을 띠었다.
“정말, 깨어나서 했던 말처럼……. 죽으려고…….”
섬뜩하게 안광을 빛내며 더듬더듬 내뱉던 그의 얼굴이 찬찬히 허물어졌다.
내가 채 입을 열기도 전에, 성큼 다가온 그가 내 양어깨를 와락 움켜잡았다.
“왜…… 대체, 왜……!”
“이미 들으셨잖아요.”
나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깨어난 이후, 난 거짓을 꾸미는 대신 정말 내 멋대로,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 독을 마시는 데 거창한 이유까지 필요할까요?
같은 것을 떠올리고 있는지, 코앞까지 다가온 군청색 동공에 절망이 스며드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내 몸까지 흔들릴 정도로 어깨를 붙든 그의 손이 파들파들 떨리다, 이내 스르륵 떨어졌다.
“아, 아아…….”
뷘터는 허옇게 질린 안색으로 제 이마를 짚으며 비틀거렸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런 그의 변화에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럼…… 그럼 저는, 어떻게 행동해야 합니까. 당신이 제가 만든 독을 마시기라도 하면, 저는…….”
“후작님이 하실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영애.”
“굳이 저를 위하신다면, 그냥 가만히 입 다물고 제가 무사히 파양당하기를 기도해 주시는 게 맞겠네요.”
나는 묵묵히 하고자 했던 말을 내뱉었다.
내 말에 뷘터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독약이, 제가 준 독약이 남아 있지 않습니까.”
횡설수설하던 그는 돌연, 짚이는 게 있다는 듯 득달같이 소리쳤다.
“당신이 그걸 마시고 또 죽을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럴 일은 없어요.”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그 짓도 한 번 했으면 됐지, 두 번은 못 해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사붓이 답했다.
사실이었다. 탈출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인데, 실패하고도 그 짓을 또 할까.
나는 여주를 위한 엑스트라 중 하나로 휘둘리다가 허무하게 죽기 싫었다.
내 얼굴에서 단단한 의지를 엿보았는지, 뷘터가 조금 전보다 진정한 듯한 어투로 말했다.
“그 독약은……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
“제게 돌려주십시오. 확실히…….”
“후작님.”
나는 그만 이 지지부진한 대화를 끝내고 싶어서, 그의 말을 끊고 화제를 돌렸다.
“아직도 이본이 착하고 선량한 아이 같으세요?”
“그건…….”
그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어쩌면 내 말이 진심인지, 거짓인지 가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저 의심병자가 맹목적으로 착하고 선량하다고 믿게 만든 이본도 대단했다.
‘그것도 세뇌의 영향인가?’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난 이 집에서, 이 스토리에서 벗어날 거니까.
나는 여전히 고민하는 뷘터에게 ‘타임 오버’를 선고했다.
“답은 됐어요, 후작님.”
“……영애, 부디 제게 재조사할 시간을…….”
“그보다 부탁드릴 게 있어요.”
그가 섣불리 변명하려 했지만, 나는 그의 뒷말을 막으며 내 말만 했다.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뷘터는 마지못해 응했다.
“……무엇입니까.”
“그 죽은 하녀요. 베키라는 아이.”
“아…….”
“후작님께서 시신을 잘 거둬서 약소하게나마 장례를 치러 주세요.”
전혀 생각지 못한 말인 듯, 뷘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건, 왜…….”
“그냥, 가엾잖아요.”
나는 후원에 핀 이름 모를 보라색 꽃을 바라보며 쓸쓸히 중얼거렸다.
“엑스트라처럼, 이용만 당하다 허무하게 죽은 게.”
그러다 갑자기, 뷘터처럼 의아함이 들었다.
내가 왜 날 악역으로 몰았던 하녀까지 신경 써야 하는 건가.
불쑥 심술이 솟아났다. 나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짓궂게 물었다.
“착하고 선량한 이본이 후작님께 이런 걸 부탁하지는 않던가요?”
“그녀는…….”
내 말에 뷘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궁핍한 살림에도 남을 돕던 착한 여주라면 응당 나보다 먼저 죽은 하녀의 시신을 챙겼을 터였다.
하지만.
“그녀는…… 죽은 하녀에 대한 얘기를 꺼낸 적 없습니다.”
그는 완전히 혼돈으로 물든 얼굴로, 내게 이유를 물었다.
“짧은 시간이지만 함께했으니 분명 슬퍼했을 텐데, 왜…….”
“글쎄요.”
나는 비죽 웃으며 노랫말을 흥얼거리듯, 장난스럽게 읊조렸다.
“그래도 짧은 시간 제 시중을 들었던 아인데, 왜 그랬을까.”
그건 네 사명이니, 네가 알아서 생각해야지.
뷘터는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채 얼어붙었다.
우두커니 선 그를 남겨두고, 나는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