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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83화 (183/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3화

늦잠을 자서 점심에 가까운 아침을 먹은 나는, 에밀리를 물리고 느지막이 방을 나섰다.

마주치는 고용인들마다 나를 보고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는 뒤통수에 달라붙는 시선을 무시하고 저택의 뒷문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산책 겸 한가로이 후원 주변을 거닐었다.

요즘 공작저 내에서 아무도 내 심기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근신을 한다고 한 상태인데 방 밖을 나돌아 다녀도 아무런 제지가 없었다.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아니면 이본에 대해 의심하느라 바쁜 건지, 뷘터 또한 마지막 대화 이후 공작저에 오지 않았다.

하드 모드를 진행하면서 꼭 마주쳐야 했던 지긋지긋한 면상들을 보지 않자, 심신에 안정이 찾아왔다.

‘또 독이라도 마실까 봐 무서웠나 보지.’

나는 속으로 빈정거리며 심술 맞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 밖을 나설 때면 이따금 숨죽인 시선들을 느꼈다.

그건 에밀리도 마찬가지였다.

저택 전체에 내가 또 헛짓거리를 하는지 아닌지 감시하라는 명이 떨어진 것 같았다.

쥐새끼 같은 시선이 느껴질 때마다 종종 짜증이 났지만, 나는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뭐, 호위랍시고 대놓고 교도관들을 붙인 것보단 낫지.’

벽돌 같은 기사 놈들과는 달리, 사용인들은 나를 꽤 두려워했다.

마주칠 때마다 눈을 부라리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곤 했으니까.

“헉!”

어설픈 감시자 몇 명을 그렇게 내쫓자, 저택 뒤편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나는 인기척이 사라진 주변을 둘러보다,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도착한 곳은 저택 뒤, 가장 외진 곳에 있는 소각장이었다.

나는 커다란 가마 앞에 선 채, 주섬주섬 치마 속주머니를 뒤적였다.

얼마 후 내 손에 끌려 나온 것은 작은 유리병 하나와, 지저분한 조각 하나였다.

‘독약, 그리고 유물 조각.’

나는 그것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반대편 손을 뻗어 화구의 문을 열었다.

재와 물이 섞여 지저분한 가마 안이 보였다.

나는 가지고 온 독약과 유물 조각을 그 안에 내려놓은 후, 다시 문을 닫고 옆에 달린 레버를 돌렸다.

마법으로 구동되는 커다란 가마는 편리하게도 장작 없이 거센 불길을 뿜어냈다.

문에 달린 작은 쪽창 위로 시뻘건 불꽃들이 넘실넘실 춤을 췄다.

나는 안에 있는 것들이 재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타들어 가기를 기다리며, 가마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

이런 내 모습이 청승맞기 그지없어서 갑자기 실소가 터져 나왔다.

‘망할. 어차피 집 나가겠다고 결심했으면서, 퀘스트 따위 알 게 뭐냐고…….’

〈SYSTEM〉 돌발 퀘스트 발생!

[고대 마법 거울의 조각]을 안전한 곳에 보관하십시오!

다시 눈을 뜬 날 이후, 시스템 창은 아직까진 잠잠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곳에 조각을 숨기는 것을 넘어, 독약과 함께 불태워 버리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안전한 곳이 어디 있어?’

숨기는 것보단, 아예 영원히 찾지 못하게 파괴하는 게 나았다.

미친 게임 따위 앞으로 철저히 무시하겠다고 수천 번 염불을 외워 놓고, 이러고 있는 내가 참 우습기 그지없었다.

그렇지만 별수 없지 않은가.

‘무서운 걸 어떡해.’

나는 아직도 그때, 그 일이 생생했다.

합쳐진 유물로 어떤 남자의 생명을 빨아먹던 흰색 로브.

아직도 그것만 떠오르면 오싹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이 집에서 나가기 전에, 조금이라도 후환이 남을 만한 것은 모두 제거하는 게 옳았다.

타닥, 타닥-.

경쾌하게 울려 퍼지던 타는 소리는, 불꽃이 먹잇감을 모두 살라 먹고 차차 잦아들었다.

쏴아아아-. 얼마 후 뜨거운 내부를 식히는 물이 자동으로 뿜어졌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이 끝나길 충분히 기다린 후, 마침내 화구 문을 열었다.

‘증거 인멸’이라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에 단순한 확인차였다.

물론 어마어마한 마법 화염에 모조리 타 버려서 재조차 남아 있지 않았겠지만…….

“뭐야.”

태평하게 생각하며 가마 안을 들여다본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뷘터에게 얻었던 독약은 다행히 흔적도 없었다.

그러나-.

“미친, 왜 이거 그대로…….”

거울 조각은 그대로였다. 그을린 자국 하나 없이, 멀쩡하게.

얼빠진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던 난 천천히 손을 뻗었다.

혹시 바짝 구워져서 겉보기로만 멀쩡해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희망을 애써 품은 채로.

‘제발 닿자마자 먼지처럼 부스러져라…….’

누가 봐도 초조한 손길로 막 더듬더듬 거울 조각을 쥐어 올리던 찰나였다.

타닥, 타다닥-. 거친 발소리와 함께.

“주인님.”

귀에 익은 음성이 나를 불렀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날카롭게 숨을 집어삼켰다.

조각의 모서리가 여린 손바닥 안을 딱딱하게 찌르는 사실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허둥지둥 등 뒤로 손을 숨기며 몸을 돌렸다.

건물 외벽을 손으로 짚은 채 거칠게 숨을 헐떡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땀에 흠뻑 젖은 곱상한 얼굴에 달라붙어 있는 회갈빛 머리칼.

이클리스였다.

“여기…… 계셨네요.”

놈이 기이하게 눈을 번뜩이며, 숨을 고르느라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들었다.

똑, 똑. 문득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에 시선을 돌리던 나는 와락, 오만상을 찌푸렸다.

놈의 손에서부터 핏물이 줄줄 흘러 흙바닥에 벌겋게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붉은 속살이 드러날 만큼 까진 손등은 물론, 더러운 맨발과 다리도 온통 생채기투성이였다.

멀쩡한 건 얼굴 가죽뿐이었다.

“대체…….”

놀란 심장이 두서없이 펄떡였다.

갑자기 나타난 그의 등장도, 처참하기 짝이 없는 몰골도. 모두 예상치 못한 것들이었다.

막 탈영이라도 한 걸까.

나는 벌어졌던 입을 천천히 다물었다.

마구 뛰던 심장이 조금씩 잦아들다, 종내에는 서늘하게 식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또 어떻게 알고 찾아왔는지 모르겠지만, 놈이 다쳤든 말든 더는 알 바 아니었다.

나는 곧바로 차갑게 얼굴을 굳히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한시 바삐 돌아가서, 불타지 않은 조각을 어떻게 처분할지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소각장을 채 빠져나가기도 전에 길이 막혔다.

나는 우뚝 걸음을 멈추고, 앞을 가로막은 커다란 형체를 싸늘히 노려보았다.

“비켜.”

“……주인님.”

이클리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희번덕거리던 눈동자에, 차차 무언가가 서렸다.

그리움, 애절함, 원망, 걱정 따위의, 이제는 별로 기껍지 않은 것들.

“내가, 널 죽은 사람 취급하겠단 말 못 들었니?”

냉랭한 내 질문에 이클리스는 입술을 달싹이다 작은 소리로 답했다.

“들었어요. 들었는데…….”

“…….”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하셨어요.”

“하.”

듣긴 했지만, 귓등으로도 내 말을 안 들은 태도였다.

놈은 짧게 코웃음 치는 나를 음울하게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영영, 비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나지막한 한숨을 쉬며 놈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너야말로 몰골이 그게 뭐야? 감옥에서 탈출하기라도 했어?”

인상을 쓴 채 형편없는 몰골을 지적하자, 수치스러운 건 아는지 놈이 미미하게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으로 뵌 이후 감옥에서는 바로 나왔어요. 그렇지만, 주인님의 성인식까진 숙소에 연금된 상태였던지라…….”

“…….”

“주인님께서 쓰러지셨다는 말을 듣고…… 여러 번 저택으로 오려 했어요. 그러다가 다시 감옥에 갇히는 바람에…….”

결국 감옥에서 탈출했다는 말이었다.

이클리스는 점점 굳는 내 표정에 다친 양손을 맞댄 채 제 손톱들을 까득까득 긁으며 덧붙였다.

“깨어나셨다는 말을 오늘 전해 들어서…….”

“그래서, 감옥 문이라도 부수고 나왔니?”

“…….”

침묵 속에서 긍정이 느껴졌다.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끌려가기 전에 얌전히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구나.”

나는 차갑게 읊조린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더 할 말도 없었고, 말주변이 없는 놈이 뭘 말하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저.”

하지만 채 스쳐 지나가기 전에 또다시 앞이 가로막혔다.

“이제 검 잘 다루게 됐어요, 주인님.”

그런 말을 갑자기 이 시점에, 내게 왜 하는 걸까.

나는 애써 심호흡하며 솟아오르는 짜증을 눌러 참고 답했다.

“그러니? 축하해.”

“노예가 아니라, 평민으로 신분 상승도 했어요.”

“잘됐구나.”

“그러니까…… 이제 주인님의 기사로서 다 해 드릴 수 있어요.”

“뭘?”

나는 이해가 안 가서 멀뚱멀뚱 되물었다.

이클리스가 조금 수줍게 눈을 내리깔며 중얼거렸다.

“……주인님을 이렇게 만든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거요.”

“허.”

실소가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네.’

날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너라고, 확 쏴붙이려다가 참았다.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지금 내게 저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말이 안 통하는 상대에게 소리 질러서 뭐 할까. 내 입만 아프지.

“그게 누군데?”

나는 짐짓 모르는 척 물었다.

“이본.”

답은 곧장 돌아왔다.

“그리고 에카르트 공작, 데릭 에카르트, 레널드 에카르트, 집사 펜넬, 하녀장, 주인님이 자작극을 벌였다고 떠들던 모든 고용인과 기사 놈들.”

“…….”

“마크 앨버트, 피터 라이너, 게릭, 한스.”

놈은 그 외에도 낯선 이름들을 줄줄 말했다.

그 안에는 내가 아는 이도 있었고, 모르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 사람들을 모조리 외우고 있다는 사실이 섬뜩하 게만 느껴졌다.

중얼중얼 이름 외우기를 마친 이클리스가 천천히 내 앞에 무릎 꿇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놈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내 한 손에 조심스럽게 제 얼굴을 가져다 댄 후 뺨을 비볐다.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

“그날, 주인님이 그렇게 가신 후로 많이 반성했어요.”

“…….”

“주인님은, 안온한 삶과 지위에서 벗어나기 싫어하시는데…….”

놈이 스륵 고개를 돌려 내 손등 위에 눅눅한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런데 하나뿐인 기사라는 새끼가 감히, 그것 하나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해서 도망치잔 말이나 꺼내고…….”

“…….”

“이제라도 계획을 수정해서 주인님의 손에 공작저를, 아니.”

“…….”

“원하신다면, 이 손에 제국이라도 쥐여 드릴게요.”

이클리스는 퍽 간절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허락만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다 알아서…….”

“이클리스.”

더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주절거림을 끊기 위해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넌 고용인들에게 자작극이라는 말은 들었으면서, 내가 독인 줄 알면서도 세리주를 마셨다는 말은 못 들었니?”

“그…….”

놈이 흠칫 말을 멈췄다.

찰나, 흔들리는 회갈빛 눈동자가 답을 주었다. 대강 돌아가는 상황을 모두 알고 있노라고.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던 예전과는 달리, 나는 그를 눈치채자마자 놈이 얼굴을 비비던 손을 거칠게 잡아 뺐다.

“이 집, 이 집 인간들이…….”

그러나 놈이 멀어지는 내 손을 제 피투성이 손으로 허겁지겁 붙들었다.

“이 집 인간들이 주인님께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고 갔…….”

“너 때문이야.”

“……예?”

“독주 마신 거, 너 때문이라고.”

물론 이클리스 하나 때문이 아니라 복합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거짓일지언정 뭐 어떤가.

‘언제까지 나만 X 같을 순 없잖아.’

일순 멍해지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나는 해사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상냥하게 일러주었다.

“네가 날 죽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잖아.”

어때.

사랑한다는 여자가, 너 때문에 죽다 살아났다는 소리를 듣는 기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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