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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84화 (184/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4화

회갈색 동공이 찢어질 듯 확장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안에 스멀스멀 충격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 그게…….”

일시 정지라도 한 것처럼 이클리스는 숨을 멈췄다.

밀랍 인형처럼 언제나 표정 없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꼴을 실시간으로 보는 것은 꽤 재밌는 일이었다.

“아, 넌 못 봤지? 내가 어떻게 죽어 갔는지.”

얹힌 듯 막힌 속이 시원해졌다.

나는 천천히 상체를 숙여, 그의 앞에 내 얼굴을 가져다 대었다.

호흡이 멎은 그에게 ‘후-’ 하고 입바람을 불었다.

“주, 주인님.”

움찔 떨리는 어깨, 하릴없이 흔들리는 눈동자.

기분이 유쾌해진 나는 달콤하게 속삭였다.

“너 혹시, 독주 먹어 봤어?”

“…….”

“독주를 마시면 있잖아……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누가 불을 지른 것처럼 가슴이 펄펄 들끓어. 그러다 숨이 막혀서 잠깐 입을 벌렸더니, 새빨간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는 거 있지.”

“…….”

“내가 먹은 건 끊임없이 각혈하게 만드는 혈관 독이라더구나. 덕분에 의식을 잃은 후에도 피를 한 바가지나 줄줄 흘렸대.”

“…….”

“쓰러지기 전에 나 너무 아팠어, 이클리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니?”

“아…… 주, 주인님, 주인님.”

무대 위에서 연기하는 배우처럼 서글픈 표정을 짓는 내 모습에 이클리스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놈은 마치 제가 독이라도 마신 것처럼 괴롭게 목을 떨었다.

날 사랑해서 그랬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성인식 전에 놈이 이본을 데리고 왔을 때 내가 느꼈던 절망, 좌절, 상실.

‘너도 한번 느껴 봐.’

나는 직전까지 짓고 있었던 울먹이는 표정을 지웠다.

그리고 이를 악물고 짓듯 내뱉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다, 너 때문에 그런 거라고. 알아들었어?”

“아, 아. 주, 주인…….”

“아쉽네. 네 얼굴을 다시 볼 줄 알았더라면,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나았을 텐데.”

확실히 내가 선택한 방법은 놈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내 앞에서 한 번도 감정을 드러낸 적 없던 이클리스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졌다.

길을 잃고 두서없이 떨리는 눈동자가 우스웠다.

놈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물에 빠진 사람처럼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다, 더듬더듬 지껄였다.

“왜, 아, 주인님…… 왜 죽음을…… 왜…….”

“왜겠니?”

나는 잔인하게 웃었다. 아니, 어쩌면 울고 있는 걸지도.

“넌 알고 있었잖아. 내가 널 사와 극진히 보살핀 것에 이유가 있었다는 걸.”

“…….”

“넌 그걸 저지하기 위해 이본을 데려왔고, 날 진창으로 처박았어. 목적에 실패한 패배자들의 말로가 보통 어떨까?”

“…….”

“너 같이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거나, 아니면 네가 사지로 밀어 넣은 네 고국인들처럼…….”

“…….”

“죽음뿐이겠지.”

나는 숙였던 상체를 천천히 들어, 그의 정수리 위를 내려다보았다.

호감도 게이지 바는 여전했다.

피처럼 검붉은 색. 죽음도 불사할 만큼 나를 사랑하는 이클리스.

하드 모드를 실패한 이유가 온전히 이클리스의 탓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안에는 분명 내 잘못된 선택과 판단이 존재했다.

어쩌면 이클리스에겐 죄가 없을지도 모른다.

내가 몰빵 남주로 택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렇게까지 처 돌아 버리진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내게 이용당한 그를 가엾이 여기고, 내 패착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기에 나는 너무 지쳤다.

내겐 게임 스토리도, 무시무시한 여주도, 세뇌당한 이클리스에게도 대적할 힘이 없었다.

‘어쩔 수 없잖아.’

죽기 싫은 패배자에게 남은 건 도망뿐이었다.

그때였다.

“……공작의 친딸을 데리고 오면, 주인님이 바로 내쳐질 줄 알았어요.”

“…….”

“그러면 주인님이 저만 믿고, 저에게만 의지할 줄 알았는데…….”

한없이 유약한 얼굴로 떨고 있던 이클리스가, 불현듯 입을 열고 음산하게 읊조렸다.

“안 되겠어요. 이본을 그냥 죽이고, 제가 다 원래대로 돌려놓을…….”

“죽으려면 네가 죽어야지, 이클리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듯한 그의 말을 끊고 나는 싸늘하게 뇌까렸다.

“멋대로 데리고 와서 모든 걸 망쳐 놓은 건 너잖아.”

“전…… 죽기 싫어요.”

“왜?”

그가 망설이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럼…… 당신을 다시 볼 수 없잖아.”

“……하.”

“가끔, 이 갈증 때문에 그냥 죽어 버리고 싶다가도…… 당신 옆에 나 말고 누가 서 있는 꼴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아.”

“…….”

“전 죽기 싫어요, 주인님.”

그 순간, 놈이 번뜩 아래로 내렸던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니까, 알려 주세요.”

“……뭘?”

“어떻게 하면 당신 옆에 다시 설 수 있는지.”

놈이 후회하는 건 잠깐이었다.

다시 살아난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하라는 대로 다 할 테니까…….”

놈이 선처를 구걸하며, 내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더듬더듬 제 뒷주머니를 뒤졌다.

무언가를 꺼내 든 그가, 내 손가락에 그것을 마구 밀어 넣었다.

검지에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어느새 커다랗고 빨간 루비 반지가 손가락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처럼 기어 다닐게요.”

내가 일전에 집어 던진 루비 반지를 돌려준 놈이, 벌벌 떨며 애원했다.

“불쾌하시면, 다시는 사랑한다는 말 따위 입에 담지 않을 테니까…….”

“…….”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주인님.”

나를 올려다보는, 울 듯 흐려진 얼굴이 말갛고 예뻤다.

찰나, 마음이 조금 약해질 만큼.

그러나 이클리스 뒤로 나타난 인기척에 번쩍 정신이 들었다.

“…… 이클리스.”

나는 천천히 그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놈이 경기라도 일으키듯 펄떡이며 다시 잡으려 했지만, ‘쉬이-’하고 달랬다.

완전히 그에게서 빼낸 손으로 나는 천천히 부스스한 잿빛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뒤통수를 타고 느릿하게 내려간 손이, 이윽고 딱딱한 무언가에 닿았다.

나는 정면에 위치한, 하늘하늘한 치맛자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난 이제 네 주인이 아니잖니.”

그와 동시에, 달칵-. 루비 알이 파인 홈과 맞물렸다.

툭-. 그의 목을 차지하고 있던 검은색 가죽이 아래로 떨어졌다.

노예임을 증명하며 언제나 그의 숨통을 죄던 마법 초커가, 마침내 풀렸다.

“……주인님?”

턱 아래가 휑해진 것을 느꼈는지 이클리스가 고개를 내려 그것을 확인하다가, 이내 얼빠진 얼굴로 나를 불렀다.

이건 나를 배신한, 내 하나뿐인 기사를 향한 내 마지막 배려였다.

“이제 그런 건 네 새로운 주인에게 물어봐.”

“그, 그게 무슨…….”

“안녕.”

나는 나지막이 인사했다.

“……이클리스.”

그때, 이클리스를 부르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고요한 소각장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이클리스가 느릿하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이본이 내 앞에 무릎 꿇은 놈과 나를 사색이 된 얼굴로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클리스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어서…… 차, 찾으려고…….”

우리 둘의 시선에 그녀가 바들바들 떨며 변명하다가, 이내 울상을 지었다.

나는 손바닥을 찌르는 조각을 조금 더 세게 꽉 쥐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어깨를 으쓱였다.

“찾아서 다행이네.”

그리고 이클리스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엑스트라는 주인공들을 위해 으레 자리를 피해 줘야 하니까.

“주, 주인님.”

멍하니 이본을 쳐다보던 이클리스가, 저를 스쳐 지나가는 나를 허겁지겁 붙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그의 손이 닿기 전에 나는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페, 페넬로페…….”

“좋은 시간 보내렴.”

소각장을 빠져나가기 전, 나는 우두커니 서 있는 이본에게 최대한 무해한 표정으로 말했다.

“주, 주인님!”

이클리스가 처절하게 외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클리스, 잠시만……!”

“이거 놔! 주인……!”

“사람들에게 들키기 전에 할 말이 있어. 내, 내 얘기 좀 들어 줘!”

하지만 그의 새로운 주인이 가로막아 준 덕분에 붙들리지 않고 도망칠 수 있었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소각장을 빠져나갔다.

* * *

소각장에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페넬로페가 사라진 자리를 응시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 이클리스에게 이본이 빠르게 다가섰다.

“이클리스.”

부름에도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이본은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 들었다.

“이클리스! 조각은?”

그제야 남자의 시선이 스르륵 옮겨졌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채 텅 비어 있는 회갈색 눈동자.

“……조각은?”

“…….”

“……조각을 가져오라고 풀어 준 건데, 이러고만 있으면 어떡해!”

침묵하는 그에게서 실패를 알아챈, 이본의 얼굴이 울상으로 일그러졌다.

그러든 말든, 이클리스는 공허한 눈으로 페넬로페의 자취를 쫓다가 허망하게 읊조렸다.

“…….다 끝났어, 이제.”

“뭐가.”

“주인님이 나보고 죽으래.”

“무슨…….”

“당장 죽어야겠어. 그래야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알 테니까.”

이클리스는 혼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잡을 틈도 없이 황급히 움직였다.

그가 막 소각장을 빠져나가려던 때였다.

“페넬로페와 황태자 전하가 곧 약혼해도?”

“…….”

“몇 년 후 결혼을 하고, 약혼녀인 페넬로페가 황태자비가 돼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게 살더라도.”

“…….”

“그래도 상관없이 죽을 수 있어?”

나지막한 이본의 음성에 이클리스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네가 그랬잖아. 그를 죽여서라도 약혼을 막고 싶다고.”

이본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간절하게 목소리를 흘려 내었다.

“난…… 네가 원하는 걸 다 들어 줬어. 약혼이 이대로 진행되지 못하게 그를 북방으로 보냈잖아.”

“…….”

“하지만 이대로라면 곧 돌아와서 약혼식을 강행하려 하겠지. 그는 강한 전사니까.”

“…….”

“……그래도 죽을 거야?”

이클리스의 꽉 쥔 두 주먹이 조금씩 떨렸다.

상상만 해도 눈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그는 절망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페넬로페를 가지고 싶어.”

“…….”

“어떻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해야 그녀가 예전처럼 내게 웃어 주지?”

“날 봐, 이클리스.”

이본은 신중하게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들어 눈을 맞추었다.

“가여운 이클리스.”

이본은 마치 그를 대신하듯 눈물을 글썽이며 방법을 제시했다.

“네가 그녀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제국을 손에 쥐는 것뿐이야.”

“내가…… 어떻게?”

이제 막 노예 신분에서 벗어난 제가 어떻게 이 커다란 제국을 손에 쥔단 말인가.

그러나 이본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그를 일깨웠다.

“잊었어? 너 또한 고귀한 피라는 걸.”

“…….”

“이클리스 칸 델만. 크루 칸 델만의 사생아. 초원의 마지막 왕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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