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85화 (185/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5화

“……아니야. 그건 내가 아니…….”

“네 백성들이 아직도 곳곳에 살아 숨 쉬면서 널 기다리고 있어. 전사는 비겁하게 전쟁을 피하지 않아.”

이본의 속삭임이 끝나는 순간, 찬란했던 과거 델만의 광영이 이클리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실제 그의 눈앞엔, 푸른빛을 뿜는 거울 조각이 들이 밀어져 있었다.

이클리스의 눈이 서서히 혼몽하게 풀렸다.

왕의 사생아였지만 그는 차별받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형제들과 달리 무거운 직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었다.

드넓은 대지, 푸르른 녹음, 아름다운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 고국.

그 모든 것들이 제국인들의 발에 짓밟혔을 때, 아버지와 형제들은 그의 이름을 계보에서 지우고 노예로 위장시켰다.

그렇게 가족과 고국인들을 등져 가며 살아남은 더러운 목숨이다.

자신은 이제 왕족이 아닌, 천한 노예였다.

그런데 이제 와 어떻게 그 이름을 다시 뒤집어쓴단 말인가.

“네 말대로 이제 끝이야, 이클리스.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페넬로페를 가질 수 없어.”

이본이 간절하게 되뇌었다.

“북방으로 가. 가서 반란군들과 접촉해. 황태자를 죽이고, 네가 제국의 주인이 되는 거야.”

“……주인님은 그런 걸 원하지 않아.”

완전하지 않은 유물 탓인지, 먹잇감이 미약하게 반항했다.

하지만 유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그의 눈을 가리자, 음습한 욕심이 다시금 샘솟았다.

이본은 인내심을 가지고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페넬로페는 안온한 삶을 원해.”

“안온한 삶…….”

“고작 공작가에서 내놓은 양딸 출신의 황태자비 자리가 아니라. 그녀가 그런 위태로운 자리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조각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점차 강해졌다.

‘페넬로페는 황태자비 자리를 원하는가?’

이본의 물음에 이클리스는 잠시 고민했다.

그녀가 원한다면, 그는 황태자를 죽이고 그 자리를 빼앗아서라도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아는 주인은 딱히 그것이 목적인 것 같지 않았다.

이본이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녀가 불행해지는 걸, 너는 막을 수 있잖아. 그렇지?”

“……그녀는 행복해져야 해. 이 집에서, 그 새끼들 때문에 매일 슬퍼했는데…….”

“그럼 내 말대로 해, 이클리스.”

마침내, 이클리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푸른빛으로 잿빛 동공을 완전히 점령한 후였다.

그런 그를 보며 이본은 지그시 이를 사리물었다.

제멋대로 구는 먹잇감으로 인해 최대한 공작저 내의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게끔 조각을 빼내려던 계획은 실패했다.

‘과거보다 더 쉽게 해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대체 제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든 게 쉽지 않았다.

믿기지 않을 만큼 상황이 전부 바뀌어 있었다.

강력한 고대 마법을 사용하는 가짜 공녀와 제가 쳐 둔 거미줄에 좀처럼 결려 들지 않는 먹잇감들.

그들은 대체 왜인지 하나같이 페넬로페에게 절절맸으며, 설상가상으로 그녀는 쥐새끼같이 제 조각을 가져가 버렸다.

‘분명 날 알아봤어.’

그날, 섬이 무너지던 날.

벗겨진 가면 때문에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고, 여자는 분명 자신을 보았다. 자신의 정체 또한.

‘다 알고 있으면서, 깜찍하게도…….’

시치미를 떼며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페넬로페를 생각하니, 미칠 듯한 초조함이 몰려 왔다.

시간이 없었다.

페넬로페의 사랑을 받지 못해 절망하는 멍청한 먹잇감들은 젖혀 놓고.

‘……이젠, 직접 행동하는 수밖에.’

* * *

“흐으…….”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꽉 쥐고 있던 조각 끄트머리가 기어코 살을 파고들었지만, 바짝 얼어붙은 몸은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내가 있는 곳은, 소각장 바로 옆. 이클리스가 손을 짚었던 건물 외벽 너머, 창고였다.

남몰래 조각을 없애기 위해, 주변을 샅샅이 훑었던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 몰랐다.

지난번에 이본이 이클리스를 세뇌하던 장면을 보았기에, 그냥 가면 안 된다는 내 판단은 적중했다.

얄팍한 벽 하나를 두고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인기척이 사라지고도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곳을 빠져나갔다.

“아, 아가씨!”

곧장 방으로 돌아오자 막 청소를 마친 에밀리가 나를 맞이했다.

“왜 이렇게 늦게 돌아오신…… 세상에! 아가씨, 손이 왜 그러세요? 피가 나셔요!”

“에밀리.”

나는 호들갑을 떠는 그녀를 제지하며 명령했다.

“가서 망치 좀 가져와.”

“네? 하, 하지만 손부터 치료를…….”

“가서 망치 가져오라고.”

“그, 금방 다녀올게요!”

눈을 부라리며 재촉하자, 그녀가 헐레벌떡 방을 나갔다.

나는 그제야 손을 펴고 쥐고 있던 조각을 바닥에 내던졌다.

타악-.

모서리에 찢겨 엉망진창이 된 손바닥이 아팠다.

그러나 그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여주가, 아니 그 괴물이, 조각을 찾고 있다.

그리고 조각을 없애려는 내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다.

‘빨리 제거해야 돼!’

다행히 에밀리는 커다란 망치 하나를 가지고 금세 돌아왔다.

“아가씨! 여기 가져왔어요. 그런데 망치는 왜…….”

“위험하니까 물러서 있어.”

거의 뺏듯이 망치를 받아 든 나는, 곧바로 그것을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내던진 거울 조각을 향해 힘껏 내리쳤다.

휘익, 콰앙-!

“아가씨, 악!”

갑자기 바닥을 향해 망치질하는 나를 보고 에밀리가 비명을 지르며 기겁했다.

그러나 나는 멈추지 않았다.

쾅, 쾅, 콰앙-!

거울 조각을 아예 가루로 만들 기세로 미친 듯이 망치를 휘갈겼다.

콰직 -!

그러다 가장자리를 잘못 맞았는지 거울 조각이 허공에 팍 튀었다가 바닥에 도로 나동그라졌다.

“허억, 허윽. 제발-!”

금 하나 가지 않고 멀쩡한 조각을 발견한 나는, 왈칵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 미친! 거울을 무슨 강철로 만들었냐고!”

공포와 두려움에 질린 나는 악을 쓰며 망치를 바닥에 집어 던졌다.

덜커덩-!

“아가씨, 제, 제발 진정하세요! 진정하시고, 손부터……!”

에밀리가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나를 만류했다.

손바닥이 온통 끈적끈적했다. 몇 줄기 피가 손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조각에 베인 것도 잊고, 그 손으로 망치질을 한 대가였다.

“……에밀리.”

“네, 네?”

나는 심호흡하며 냉정을 되찾으려고 노력했다.

“지금 당장 심부름 좀 갔다 와야겠구나.”

“예? 무슨…….”

“저거 들고 흰 토끼 상단으로 가. 최대한 아무와도 마주치지 말고.”

나는 바닥에 떨어진 조각을 흘긋 턱짓했다.

에밀리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주섬주섬 그것을 주웠다.

“가서, 아무도 모르는 안전한 곳에 보관하라고 전해. 내가 찾으러 갈 때까지.”

불에도 타지 않고, 망치로 부숴도 부서지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장 저택 밖으로 빼돌려 두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네, 네! 그럴게요, 아가씨!”

“그리고, 하나 더.”

충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에밀리에게 나는 또 다른 지시 사항을 내렸다.

“섬이 사라진 밤에 부탁한 일을 한 번 더 실행해 달라고 전하렴.”

“네, 절대 잊지 않고 전할게요!”

“그래, 조심히 갔다 오렴.”

몇 번 해 본 일이어서 그런지, 에밀리는 아무것도 묻지 않은 채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게 제 기억을 지워 달라는 의뢰라는 걸 까맣게 모를 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당장 여기서 나가야겠어.’

북방으로 가야 했다.

* * *

“아가씨, 저 다녀왔어요!”

그날 저녁, 에밀리는 내가 준 임무를 완수하고 돌아왔다.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고 갔다 온 거 맞지?”

“네, 아가씨께서 전하라는 말씀도 다 전했어요. 상단주가 잘 보관하겠다는 답을 전했어요.”

“고생했구나.”

“고생은요! 손은 잘 치료하셨어요?”

그녀는 내 손에 감긴 붕대를 바라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곧장 물었다.

“그런데 에밀리, 내가 전달하라는 물건은 잘 전달했니?”

“네? 무슨 물건이요?”

전혀 모르겠다는 듯 휘둥그레진 눈에는 거짓이 없었다.

뷘터가 에밀리에게서 조각과 관련된 기억만 지웠다는 것을, 직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착각한 것 같구나.”

이제 남은 건 ‘언제 탈출하냐’뿐이었다.

* * *

다음 날.

밤새 한숨도 자지 못하고 뒤척이던 나는 꼭두새벽부터 방을 나섰다.

갑자기 사라진 내 모습에 놀라 자빠질 에밀리를 위해 이불 안에 베개를 쌓아 불룩하게 해 놓았다.

아직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희뿌연 여명이 내려앉은 공작저 부지는 소름 끼칠 만큼 적막했다.

서늘한 아침 이슬을 헤치며, 나는 연무장으로 향하는 숲길을 걸었다.

훈련하는 기사들도 기상 전인 시각이라 그런지, 대낮에 비해 숲이 퍽 음산하게 느껴졌다.

나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탈출의 기본은 바로 탈출로 확보였다.

개구멍을 쓴 지 벌써 꽤 오래전 일인지라, 다시 한번 위치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겸사겸사 복잡한 머리도 식힐 겸 천천히 걷다 보니, 어느새 눈에 익은 지형에 이르렀다.

‘그래도 독 먹었다고 기억력이 감퇴하거나 하진 않았나 보네.’

아직 쓸 만한 두뇌를 자찬하며 나는 빠르게 그쪽으로 다가갔다.

비슷비슷한 여러 개의 수풀 중, 기억에 남은 특징을 떠올리며 개구멍을 가린 위장 수풀을 찾았다.

곧바로 그것을 옆으로 밀고 상체를 숙였을 때였다.

“뭐야.”

분명 개구멍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넓은 부지의 끝을 가로막은 담벼락, 그뿐이었다.

‘위장 수풀은 그대론데?’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내가 밀어 둔 수풀과 틈 하나 없는 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위치가 여기가 아닌가?’

좀 더 옆인 건가 싶어서, 나는 쪼그려 앉아 벽 아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수풀을 뒤적여도 뻥 뚫린 구멍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 없는 거야. 어디 갔지?”

“개구멍 이제 거기 없다.”

“그럼 어디 있는데?”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그거야 당연히…….”

탈출하려고…….

무심결에 답하던 나는 퍼뜩 입을 다물었다. 싸한 감각이 뒷골을 타고 몰려왔다.

‘설마…….’

현실을 부정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분홍 대가리가 내 뒤에 바짝 선 채 귀신처럼 웃고 있었다.

“당연히, 뭐?”

“아악-!”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