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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엔딩은 죽음뿐-186화 (186/243)

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6화

나는 갑작스러운 레널드의 등장에 짧게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놈이 인상을 쓰며 귀를 후볐다.

“야!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래!”

“하, 그러는 너야말로 이 새벽에 왜 그렇게 음침하게 다니는 건데?”

“음침? 허! 이 꼭두새벽에 개구멍 찾고 있는 너는 고상하시고요?”

“…….”

놈의 반박에 모처럼 입이 스르륵 다물어졌다.

‘……망할.’

훈련하는 기사들마저 잠든 이 꼭두새벽에 레널드 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여주에게 언제 세뇌당했을지 모를 인물 중 한 명에게 들켰단 사실에 초조함이 몰려왔다.

입술을 잘근거리며 무슨 핑계를 댈지 머리를 굴리던 와중.

“빨리 안 일어나냐? 옷 더러워져.”

레널드 놈이 툭 내뱉으며 내게 손을 뻗었다.

잠시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던 나는, 이내 그것을 무시하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흙이 묻은 옷자락을 툭툭 털고 있자, 놈이 물었다.

“……기어이 집 나가려고 그러냐?”

“넌?”

“뭐?”

“넌 아버지한테 이를 거야?”

대답 대신 되묻자 푸른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놈이 잠시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아버지한테 고자질하면. 그럼…… 안 나갈 거냐?”

놈의 물음은 좀 이상했다.

공작에게 내가 남몰래 개구멍을 찾더라고 고자질하면 분명 가둬 두려 할 텐데, 그때 가서 내 의사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글쎄.”

나는 곰곰이 최악을 상상했다.

이대로 탈출이 막히고 무서운 여주 년에게 꼼짝없이 조각을 빼앗기고.

그리고 세뇌당한 인간들에게 여주를 괴롭히는 악독한 악역으로 몰려 끔찍하게 죽는 상상을…….

또 죽을 시도를 했으면 했지, 난 이 빌어먹을 곳에서 그따위 꼴로 개죽음 당하기 싫었다.

‘……그러고 보니 미친 자동 결제 때문에 이번엔 실패했지만, 또 시도하면 탈출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문득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냥 다시 죽어 볼까.”

“야-!”

그때, 레널드가 버럭 소리쳤다.

“이게 오라비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미쳤어? 간신히 죽다 살아 났으면서 또……!”

“그럼 아버지한테 말하지 마.”

나는 놈의 말을 중간에 뚝 잘라 먹고 싸늘하게 뇌까렸다.

“나 또 죽는 꼴 보기 싫으면.”

“너……! 아오!”

놈이 와락 얼굴을 찌푸리며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부글부글 속이 끓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가, 이윽고 손을 뻗어 내 팔뚝을 잡았다.

“……따라와.”

“어……!”

그리고 곧장 몸을 돌리는 바람에, 나는 비틀거리며 얼떨결에 그를 따라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어디 가는 건데?”

“…….”

“레널드. 어디 가냐니까?”

“아! 자꾸 종알대면 아버지한테 달려가서 다 이른다. 어?”

강한 힘이 아니어서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지만, 저택으로 돌아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당장 공작에게 현행범을 인도하려는 것은 아닌 듯했다.

때문에 나는 잠자코 놈을 뒤따랐다.

원래의 개구멍이 있던 곳에서 정반대편으로 한참을 걷던 레널드는, 인적 드문 담벼락 근처에서 우뚝 멈췄다.

외벽 아래, 짚더미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기사들이 훈련할 때 사용하는 허수아비의 잔해들을 모아 둔 장소였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레널드는 이윽고 내 팔목을 놓고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짚뭉치를 헤집었다.

얼마 안 가 뚫린 지 얼마 안 되어 보이는 울퉁불퉁한 구멍이 드러났다.

“어…….”

레널드가 그것을 내게 알려 줬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웠다.

멍하니 새로운 개구멍을 바라보며 눈을 껌뻑이고 있자, 놈이 삐딱하게 말했다.

“아까 거긴 너 때문에 형이 막았어. 그것 때문에 기사 놈들이 얼마나 네 욕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던 놈이 갑자기 우뚝 말을 멈췄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그쪽으로 다가가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레널드가 퍽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진짜 집 나갈 거냐?”

“몰라. 아직 확실하게 안 정했어.”

나는 성의 없이 대꾸하며 주변 지형을 마저 외웠다.

그러자 레널드에게서, 개구멍을 알려 준 것만큼이나 믿기 힘든 말이 돌아왔다.

“안 가면…… 안 되냐?”

“……뭐?”

“아버지가 너 절대로 파양 안 시킨다고 했잖아. 가출할 생각 말고, 그냥 계속 살면 안 돼?”

“왜?”

나는 정말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넌 나 싫어했잖아. 내가 없어지면 네게 더 좋은 일 아니야?”

“그건…….”

내 말에 레널드의 표정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다락방에서 싸운 직후 지었던 것과 비슷했다.

마치 내 말을 듣기가 괴롭기라도 한 사람처럼.

‘그럴 리 없잖아.’

내가 생각해도 우스운 가정에 나는 픽 실소를 흘렸다.

어린 페넬로페를, 그리고 빙의한 나를 매번 한계까지 내몰았던 이 악귀가 괴로울 리 없지 않은가.

“……맞아. 나 너 진짜 싫었어.”

뜬금없는 내 웃음에 허옇게 질린 입술을 달싹이던 레널드는 힘겹게 긍정의 말을 토해 냈다.

“네가 있으면 이본이 영영 돌아오지 않을 거 같았거든.”

귀에 딱지가 앉을 만큼 들은 소리였다.

대충 흘려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놈이 갑자기 울컥한 얼굴을 했다.

“고개 끄덕이지 마! 그러는 넌, 뭐 성격 괜찮았는 줄 아냐? 네가 얼마나 지랄 맞았는데!”

“허. 내가 뭐라 했어? 갑자기 왜 앞담을 하고 그래?”

“마음먹고 잘 좀 지내 보려고 해도, 네가 얼마나 나한테 지독하게 굴었는지 알아? 내 성인식 전날에 네가 꼬집어서 생긴 흉터가 아직도 남아 있어!”

뜬금없는 디스에 어이없어하는 나를 보고 놈이 씩씩거리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불쑥 내민 팔목 안쪽에 정말로 다른 피부보다 짙은 색의 손톱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건 좀 속 시원하네.’

나는 통쾌해서 비죽 웃었다.

“미안. 됐지?”

“아오! 이걸…….”

약이 오르는지 레널드는 제 가슴을 두어 번 퍽퍽 내리쳤다.

놈이 입을 다물자 우리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개구멍을 찾았으니 더는 볼 일이 없었다.

희미하게 동이 터 오는 하늘을 보며, 그만 방으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성인식 날, 네가 갑자기 피 뿜으면서 쓰러졌을 때 말이야.”

불현듯 레널드가 별로 꺼내기 싫은 화제를 입에 올렸다.

“처음에 난 네가 장난치는 줄 알았어.”

“무슨…….”

“내 성인식 전날 내가 네 방 창문 앞에 있는 나무에서 떨어지고 죽은 척해서, 너 엄청 울었잖아.”

덕분에 아버지가 그 나무 바로 베어 버려서 네가 또 지랄하고 난리가 났었지.

레널드가 익살맞게 덧붙였다.

나는 모르는 일이었으므로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늙은 후작 놈이 독을 먹은 걸지도 모른다고 그랬을 땐 이 계집애가 또 사고 쳤나 보다 했어. 사실 안 믿겼어.”

“…….”

“네가 솔직히 뭐가 아쉬워서 독까지 마시면서 자작극을 하냐? 사 달라는 거 다 사 줘, 하고 싶다는 거 다 해 줘. 이본이 돌아왔다고 아버지가 널 내쫓길 했어, 뭘 했냐고.”

“…….”

“그런데 네가 피를 줄줄 흘리면서 누워 있는 일주일 동안, 내가 고용인들 싹 다 불러서 조사하는데 말이야…….”

내게 두서없이 주절거리던 레널드의 얼굴이 점차 창백해졌다.

숨이 막힌 사람처럼 그는 잠시 가팔라진 호흡을 고르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도 네가 평소에 뭘 했는지, 어딜 갔는지, 누굴 만나는지 모르더라. 심지어 네 전담 하녀마저도.”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씨발, 주인 모시라고 봉급받는 것들이 어떻게 너에 대해 하나도 모를 수가 있냐고.”

놈이 내게 사나운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라고 미리 지시해 둔 것을 에밀리가 충실히 이행했다는 건 다행이었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내 알 바가 아니었다.

‘네가 그렇게 만들었잖아.’

수차례 해 왔던 그 말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이젠 놈 또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있잖냐.”

“…….”

“그때부터 자꾸…… 내가 너한테 못되게 군 것들이 떠오르는 거야.”

“…….”

“나도 알아. 이본의 목걸이, 내가 네 방에 갖다 놓고 누명 씌우고, 그 외에도 잘못한 짓거리 많다는 거.”

레널드가 속사포처럼 쏟아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어느새 그의 눈가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런데 인정하기 싫었어. 그러면 너한테 잘못을 빌 것들이 셀 수가 없는데…… 사과를 해도 네가 분명 안 받아 줄 거 같았거든.”

“…….”

“넌 어느 순간부터 날, 아니…… 우리 가족을 완전히 타인 취급했으니까.”

그가 얕게 헐떡일 때마다, 사랑스러운 분홍 머리가 하늘하늘 부스러졌다.

나는 그것을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친 놈은, 조금의 동요도 없는 날 보며 울 듯이 얼굴을 흐렸다.

“요 며칠 수십 수백 번 생각했어. 내가 그때 병신처럼 굴지 말고, 조금만 더 오빠답게 굴었으면, 네가…….”

“…….”

“네가 그렇게까지 안 되지 않았을까?”

그건 나도 알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을 타인 취급’ 하는 시점에 내가 빙의했을 테니까.

하지만 놈의 말처럼, 조금만 더 페넬로페에게 잘해 줬더라면…….

‘그 애가 죽진 않았겠지.’

그러면 내가 빙의할 일도 없었을지 모른다.

나는 레널드의 말에 건조하게 답했다.

“그랬다면 지금보단 여기가 덜 싫었을지도 모르지.”

“……미안하다, 페넬로페.”

레널드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메인 말들을 더듬더듬 토해 냈다.

“네가 그 정도로…… 죽고 싶을 만큼 지긋지긋해 할 줄은 몰랐어.”

너무 뒤늦은 사과였다. 그 사과를 들을 당사자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나는 결국 페넬로페가 아니었으므로, 그를 용서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은 무의미하다고 답하기 위해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 본 찰나였다.

나는 문득 발견한 레널드의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레널드.”

놈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주먹으로 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너…… 울어?”

“미친, 안 울거든?!”

내 물음에 놈이 바락 소리 지르며 입을 틀어막고 있던 주먹으로 제 눈가를 마구 비볐다.

‘울었네, 울었어.’

속으로 생각했는데, 놈이 발작하듯 외쳤다.

“안 울었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안 울었다고!”

놈이 꾸역꾸역 항변하며 토끼처럼 시뻘게진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거칠게 씨근덕거리던 그는, 얼마 후 눈에서 힘을 풀고 읊조렸다.

“……혼자 끙끙대지 말고 돈 부족하면 말해라.”

“…….”

“나가면 용병 길드로 가서 호위부터 고용하고. 돈 좀 들더라도 거지 같은 여관 말고 호텔만 이용하고. 호신 마법 걸린 무기나 스크롤 같은 거…….”

“오라버니.”

나는 내 가출 계획을 대신 짜 주는 레널드를 막고 담담히 인사했다.

“잘 지내.”

그 순간, 레널드의 얼굴이 또 한 번 왈칵 일그러졌다.

놈이 황급히 주먹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내렸다.

나는 더 놀리지 않고, 그가 해묵은 감정들을 모두 쏟아내길 묵묵히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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