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의 엔딩은 죽음뿐 187화
방으로 돌아온 나는 찬찬히 탈출에 대해 고민했다.
‘가장 중요한 것. 돈, 조각, 이동수단.’
마음 같아서는 당장 공작저를 나가고 싶었지만, 먼 북방으로 가려면 꽤 준비가 필요했다.
‘우선 벚터부터 만나야 해.’
새벽이 여물고, 쏜살같이 날이 밝았다.
마침내 생각을 정리하고,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책상 의자에서 막 일어나려던 찰나였다.
똑똑-.
“아가씨, 펜넬입니다.”
마침맞게도 찾으려 했던 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도로 의자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들어와.”
방문이 열리고 곧장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 인사했다.
“무슨 일이지?”
“지난달 에메랄드 판매 실적 및 수익 보고서입니다.”
그가 정중한 태도로 책상 위에 검은색 파일철을 올려두었다.
나는 그것을 들고 대강 내용을 훑어보았다.
딱 봐도 어마어마한 돈이 내게 떨어졌다는 것이 보였지만, 그다지 신나진 않았다.
‘어차피 이건 못 쓰는 돈이야.’
이것 또한 내 자금줄은 맞았지만, 집사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 봤어.”
‘탁-’ 하고 파일철을 닫은 나는, 약간의 기대가 서린 노집사의 표정을 무시하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런데 집사, 외출을 좀 하고 싶은데.”
“외출…… 말씀이십니까? 어딜 가시려는지…….”
“그건 알 것 없고.”
의아함이 서린 집사를 단호하게 뿌리친 후 되물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입궁하셨나?”
“아, 아닙니다. 오늘은 늦게 입궁하시려는지, 아직 저택에 계십니다.”
“그래?”
오늘 저녁에 공작이 퇴궁한 후에나 허락을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수확이었다.
“그럼 가서 아버지한테 여쭤봐 주겠어? 외출하게 허락해 달라고.”
어쨌든 나는 명목상 근신 중이었으므로, 잡음 없이 나가려면 확실하게 해 두는 게 좋았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잠시 후 집사는 떨떠름해하며 방을 나갔다.
다시 돌아온 그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시에 들고 왔다.
“아가씨, 공작님께서 외출을 허락하셨습니다.”
“다행이네.”
“그런데 곧 점심이니 함께 오찬을 들지 않겠냐고 물으셨습니다.”
“오찬?”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설마 하는 심정으로 물었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아닙니다. 소공작님과 작은 도련님은 기사단 훈련이 있으신지라…….”
오찬은 끔찍했지만, 그나마 다행인 소식이었다.
‘외출도 허락해 준다는데 오찬쯤이야.’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준비해서 곧 내려간다고 전해.”
* * *
집사를 따라 식당이 아닌, 저택 밖으로 이동했다.
날이 좋으니 온실에서 밥을 먹자는 공작의 제안 때문이었다.
‘굳이 온실까지?’ 싶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오랜만에 맡는 향긋한 꽃내음이 나를 반겼다.
먼저 와 있던 건지, 공작은 온실 한가운데에 놓인 테이블에 홀로 우두커니 앉은 채 사색에 잠겨 있었다.
“아버지.”
인기척을 내자 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왔느냐. 앉거라.”
나는 테이블을 돌아 그의 반대편에 앉았다.
만찬 참석자들이 모두 도착하자, 곧바로 사용인들이 빠르게 음식을 나르기 시작했다.
점심이라 그런지 샌드위치와 스프, 디저트 등 대체로 가벼운 것 위주였다.
한 상 가득 차려져 있음에도 누구도 섣불리 손을 올리지 않았다.
공작은 아까 전부터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도통 입을 열지 않았다.
어색한 정적에 휩싸인 채 그의 눈치를 보던 나는, 조심스럽게 먼저 운을 뗐다.
“하실 말씀…… 있으세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공작이 흠칫 고개를 들었다.
“……뭐?”
“제게 하실 말씀 있으신지 여쭤보았어요.”
“할 말?”
공작이 멍하니 되물었다. 정신을 딴 데 두고 있는지, 오늘따라 그가 좀 이상하게 느껴졌다.
“네. 오라버니들도 없이 저만 온실로 부르셔서…… 곧 입궁하셔야 하잖아요.”
이렇게 뜸 들일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아, 그래. 입궁. 해야지…….”
공작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사안이라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입궁’이란 말에 정신이 드는지, 그의 눈에 차차 빛이 돌아왔다.
나는 그런 그를 신중하게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너는…… 좀 괜찮은 게냐?”
공작이 나를 돌아보며 평소처럼 안부를 물었다.
“몸은. 주치의 말로는 아직도 회복이 필요하다던데.”
“괜찮아요. 많이 나아졌어요.”
“……집사에게 외출을 하고 싶다고 했더구나.”
마침내 본론에 도달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답답해서요. 근신도 이만하면 충분한 거 같기도 하고…….”
“그건 그렇지. 일주일이 다 돼 가니까.”
공작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근신을 이제 스스로 정하고 끝낼 수 있다는 사실이 좀 웃겼다.
예전엔 공작이나 데릭의 허락이 없으면 방 안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는데…….
“그렇게 하려무나.”
너무 쉽게 떨어진 허락에 한시름 돌렸다.
“감사해요.”
“하지만 파양은 안 돼.”
그러나 한시름 돌리기가 무섭게 다음 고비가 훅 치고 들어왔다.
나는 너무나도 뜬금없이 이어진 공작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아버지.”
“들어줄 수 없어 미안하구나. 그러나 네가 에카르트의 성으로 성인식을 마친 이상, 그건 가문 전체의 일이야.”
물론 그의 말도 일리가 있다.
성인식에서 내가 저지른 미친 짓 때문에 지금 수도의 온 시선이 공작저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잦아들길 기다렸다가 조용히 진행하자는 말은 들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친딸이 돌아왔는데도, 대체 날 왜 안 놓아주는 건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 말을 잃고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때였다.
“그렇지만…… 네가 원한다면, 공작저를 떠날 수 있게 조치해 주마.”
고요히 덧붙여진 공작의 말에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제가…… 어디로 갈 줄 알고요?”
“어디로든.”
나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방금 전까진 그가 내 말을 들어주리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었기에.
“……소공작님은요.”
나는 가장 큰 방해물을 지적했다.
여주에게 세뇌당한 놈은 쉽게 나를 놓아줄 기세가 아니었다.
“분명 반대할 텐데요.”
“아직 공작은 난데, 제깟 게 뭘 할 수 있겠느냐.”
공작은 내 물음에 눈썹을 꿈틀거렸다.
못마땅한 목소리로 대꾸한 그는 이내 시원하게 해결안을 제시했다.
“설령 못 가게 막거든 내게 달려오려무나. 혼쭐을 내줄 테니.”
그리고 그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오랜만에 보는 장난스러운 얼굴이었다.
분명 마법 석궁을 받을 때만 해도 하루가 멀다 하게 이 웃음을 보았다.
그땐 갑자기 내게 그러는 공작이 어색하고 불편하게만 느껴졌는데…….
성인식 아침, 죽였다고 생각했던 가슴이 다시 꿈틀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나는 테이블 아래 내려놓은 양손을 아득 움켜쥐었다.
“아버지.”
“응?”
“……이본을 얼마만큼 믿으세요?”
난데없는 화제 전환에 공작의 푸른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이게 과연 옳은 걸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간절하게 공작을 바라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갑자기 그 아이는 왜…….”
그는 내 의중을 파악하려는 듯 나를 살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 걸린 것이 있는지 목소리를 조금 낮추었다.
“혹시, 그 방을 수색하지 않아서 앙금이 남은 게야?”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성인식 전만 해도 기억이 확실하게 돌아온 건 아니었잖아요.”
“그건…… 그렇지.”
의아한 눈빛을 띠던 공작은 이내 내 말에 수긍했다.
그리고 내 염려를 모두 안다는 투로 나를 달랬다.
“기억이 확실히 돌아올 때까진 공표하지 않을 것이야.”
성인식 날 그녀를 데리고 온 데릭으로 인해 이미 ‘눈 가리고 아웅’이 됐지만, 그는 굳건한 표정으로 거듭 강조했다.
나는 그런 공작을 바라보며 떨어지지 않은 입술을 힘겹게 벌렸다.
“그 애와 있을 때…… 찻잔 안의 찻물을 들여다보세요, 아버지.”
“찻잔?”
공작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소리인 게냐, 페넬로페.”
“이본을 너무…….”
믿지 말라고.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힘겹게 삼켰다.
과연 내 말을 믿어 줄지에 관한 불신 이전에, 무서웠다. 완전하지 않은 유물로도 이클리스를 세뇌하는 그 여자가.
내가 공작에게 이런 말을 한 걸 알면 나를 가만두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공작이 세뇌당하도록 가만히 놔둘 수도 없었다.
완벽히 외면하지도 못하면서, 더 자세히 얘기해 주지도 못한다.
비겁하고 위선적인 내 스스로가 역겨웠다.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냥 기회가 되면 그렇게 해 보세요.”
“무슨…….”
“저 다 먹었어요.”
끼익-. 의자를 끌며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도 대지 않은 내 식기를 바라보며 공작이 놀란 눈으로 나를 불렀다.
“페넬로페.”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아요.”
말을 내뱉기 무섭게 꼬리를 마는 내 모습을 공작이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 그러려무나.”
그러나 이번에도 쉽게 허락을 내뱉는 공작의 모습에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문으로 가는 동안 끈덕진 시선이 뒤통수에 닿았다.
온실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흘끔 뒤를 돌아보았을 때였다.
여전히 걱정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눈과 눈이 마주쳤다.
몰래 훔쳐보고 있던 것이 걸려 민망스러웠는지, 움찔하던 공작이 한 손을 들어 흔들었다.
얼른 가 보라는 뜻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가, 이내 질끈 눈을 감고 외쳤다.
“그 애 조심하세요, 아버지!”
커다래지는 푸른 동공을 뒤로한 채 도망치듯 온실을 빠져나갔다.
* * *
생각보다 조금 이르게 공작과의 오찬 자리를 파한 나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갔다.
바로 외출 준비를 한 후 뷘터를 만나러 가기 위해서였다.
다들 점심을 먹는지, 중앙 계단을 모두 다 오를 때까지 저택 안은 한산했다.
텅 빈 복도를 빠르게 가로질러 내 방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나는 멈칫했다. 문이 힘없이 밀렸다. 살짝 열려 있는 것이다.
탁, 드르르륵- 타악-.
틈새로 나지막한 소음들이 들려왔다.
‘에밀리가 청소하고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을 무렵.
타악-!
화장대의 서랍 문을 닫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에밀리가 입는 하녀복과 같았다.
그를 보고 내려놓던 마음이 순간 다시 얼어붙었다.
‘에밀리는 모자를 쓰지 않는다.’
모자는 보통 주방에서 일하는 하녀들만 쓰기 때문에.
탁, 드르륵-.
내가 문을 연 것을 눈치채지 못한 건지 그사이 하녀는 분주한 손길로 화장대 두 번째 서랍을 열어 그 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전혀 청소를 하는 행위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본의 끄나풀? 아니면…… 단순한 보석 도둑?’
어느 쪽일지 곰곰이 생각하며, 나는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하지만 언뜻 본 옆얼굴이 천 마스크로 가려져 있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너 뭐 하니?”